금요일엔 돌아오렴 - 240일간의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
416 세월호 참사 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엮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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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엔 돌아오렴》은 세월호 참사로 목숨을 잃은 단원고 학생 열세명의 엄마 또는 아빠들의 인터뷰 모음집입니다. 여기에 실린 열 세편의 글들에는, 하나같이 기막힌, 참 슬픈, 아주 화나는 공통점이 있는데, 한편의 예외도 없이 애도의 감정을 넘어 자식들이 죽게 된 까닭에 대한 깊은, 씻을 수 없는 분노가 꽉 차있다는 점입니다. 책을 읽고 난 후 포스트잇을 붙여놓은 것을 보니 애도의 감정이 감동적으로 드러난 부분이 아니라 분노의 감정을 쏟아 내는 부분들이었습니다.

 

“이웃은 아직 안 끝났냐고 해. 그러면 설명을 다 해주지. 아무 것도 한 게 없는데 어떻게 끝나냐고 그런데 밖에서는 그게 아닌가 봐. ‘너희들 보상 많이 받았잖냐. 너희들 10억씩 받았는데 더 받으려고 그런 거 아니냐?’ 이런 말 나오면 기가 막히지...언론 플레이가 진짜 무서운 거야. 우리도 사고 나기 전엔 언론에 나온 거 다 믿었어, 100퍼센트. 그런데 직접 당하니까 하나도 믿을 수 없는 거야. 왜 이렇게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야당도 못 믿으니 유가족 힘으로 다시 뭉쳐보자고 했어.”(책, 63면)

“뭐 하나 제대로 밝혀진 게 없어요. 다 쉬쉬해요... 움직이지 말라고 방송한 선장이나 선원도 그렇고 한 시간 넘게 구조요청을 했는데도 왜 해경이 안 구했는지 알아야 할 거 아니에요. 진도관제센터가, 정부가, 청와대가 그 시간에 뭘 하고 있었는지 유족들은 알아야죠...우리는 나라하고 싸우는 건데 온통 거짓말만 한 나라하고 싸우는 건데, 사람들은 한창 유병언 얘기만 하더니 이제는 돈 얘기만 해요. 우리는 진짜 돈 받은 거 없어요. 해수부에서 긴급자금으로 준 거 말고는 없어요.. 사람들이 자식 팔아서 돈 벌려고 그런다는 말을 하는데 그런 얘기를 들으면 어떻게 자식 키우는 입장에서 저렇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자기 자식 아니라고 돈이랑 자식이랑 어떻게 바꿀까 싶고...”(책, 82-83면)

 

“2014년 10월 29일 박근혜 대통령이 시정연설을 마치고 국회를 빠져나갔다. 특별법 제정을 요청하며 ‘살려 달라’는 유가족의 외침이 손닿을 거리에서 들렸지만 대통령은 끝끝내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창현 아버지 이남석씨는 박근혜 대통령의 뒤를 이어 떠나려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지켜보던 이들의 가슴도 철렁 내려앉았다. 애원하는 창현이 아빠를 김무성 대표도 차갑게 외면하고 차에 올랐다. 아들이 죽은 이유를 알겠다고 나선 아버지의 간절함은 팽개쳐져 바닥을 뒹굴었다. 그날 두 사람이 밟고 지나간 것은 붉은 카펫이 아니라 유가족들의 피눈물이었다. 잔혹한 풍경이었다.”(책, 137면)

 

“팽목항에 하루 있어보니 그 분노를 이해하겠더라고요. 배가 몇 척이 나가서 구조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도 죄다 거짓말이었고. 거기 있던 가족들이 다 보고 있었던 거잖아요. 방송이 죄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아이들이 살아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데, 아무 것도 못한 채 보고만 있었으니...”(책, 221-22면)

 

“내가 서해 페리호 사고를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에요. 그런데 21년 후 세월호 사건을 또 겪은 거지, 내가. 그 얘기를 하는 건 지금이나 그 때나 바뀐 게 없어서야... 그때 만일 특별법이 제정됐더라면 세월호 참사가 났을까. 지금 와서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때는 특별법을 요구하지 안 했잖아요. 2003년 대구 지하철 사고의 유가족들이 와서 그랬다고 하던데 ‘우리가 특별법을 못 만들어서 이런 사고가 난 것 같다고, 죄송하다’라고요.”(책, 275-76면)

 

이 안타까운 장면들의 바탕에 깔려있는 것은 바로 〈왜〉라는 질문입니다.

 

“세월호는 전부 ‘왜’라는 물음에서 시작해서 ‘왜’라는 물음으로 끝납니다. 왜 한 아이도 살리지 못했을까, 왜 안개 낀 인천항에서 배는 떠났을까, 왜 배는 급선회했을까...왜 왜 왜. 사람들은 지겹다고 그만하라고 해요. 그런 사람들을 나는 좀 즐기고 싶어요. 나는 왜 그런 사람들을 못 만날까. 많이 만나고 싶어. 당신들 말대로 나 애새끼 팔아서 돈 벌고 싶은데 이 한 글자 왜라는 이 말에 답을 좀 줬으면 좋겠어. 그 답 들은 후에 돈을 벌게. 왜 아직도 아이들이 바닷속에 있는데 안 건지냐고 묻고 싶어.”9책, 187면)

 

마지막 대목이 들어있는 문지성 학생의 아버지 문종혁씨의 이야기 〈대통령과의 5분간의 통화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긴 고통〉을 첨부파일로 올립니다. 〈활과 리라〉식구들께 읽기를 청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아픔, 힘들지만 이를 이겨내야 살아남은 사람들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들의 마음상태가 이 책에 드러난 심적 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보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참사의 유가족들은 애도기간에 접어들지도 못한 듯합니다. 틀림없이 살 수 있었을 아이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그 까닭을 알아내지 못하는 한, 〈왜〉에 대한 명쾌한 답을 얻지 못하는 한 애도의 감정은 들어설 틈이 없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유가족들은 개인의 삶 뿐 아니라 한 집안의 정상적인 삶의 리듬이 깨진 상태입니다.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충분히 얻지 못하는 한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오기 어려울 텐데, 이는 유가족들이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우울증’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나는 이 점이 무섭습니다.

 

진상규명이 시급하게 이뤄져야 하는 까닭이, 무엇보다 진상규명을 바탕으로 다시는 유사한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대비책을 만드는 것이지만, 또한 그를 계기로 참사의 유가족들이 애도의 감정을 받아들임으로써 집단적 우울증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2월 9일이면 세월호 참사 300일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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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방랑 - 랭보 시집 대산세계문학총서 123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 지음, 한대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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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선술집]에서 - 저녁 다섯 시

 

여드레 전부터, 내 반장화는 찢겨 있었지,

길거리 자갈돌에.. 샤를루아로 들어가던 길.

― [초록 선술집]에서, 버터 바른 빵과

반쯤은 식어 었을 햄을 나는 주문했다네.

 

행복에 겨워, 나는 초록 식탁 아래로 다리를

뻗고, 벽 장식 융단의 아주 순진한 주제들을

바라보았지. ― 그런데 정말 근사했네,

엄청나게 가슴이 큰 처녀가 눈빛도 생생하게

 

― 이 여자, 입맞춤 하나로는 놀라지도 않지! ―

웃음 지으며, 버터 바른 빵에 미지근한 햄을

채색 접시에 담아 왔을 때,

마늘쪽 냄새 향긋한 장미색과 흰색의

 

햄을, ― 그러고는 커다란 내 맥주잔을 채워주었을 때,

늦은 햇살 하나로 금빛 물든 그 거품과 함께.

                                                           아르튀르 랭보

70년 10월

(랭보, 《나의 방랑 - 랭보 시집》, 한대균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 68면)

 

“1870년 10월, 1854년 10월 28일생이니, 랭보는 이제 만 16세가 되는 달에 이 시를 썼습니다. 지난번에 소개한 〈물에서 태어나는 비너스〉처럼 여성혐오증을 보이는 시는 아니지만 읽기에 따라서는 사뭇 에로틱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입니다. 무전여행 수준의 빈털터리 방랑의 어느 날, ‘초록주막’이란 이름의 허름한 주막에 들어가 테이블에 앉아 지친 다리를 쭉 뻗습니다.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의 알록달록한 그림을 보며 긴장감이 풀려 마음의 아늑함에 빠지는데 〈가슴이 엄청 크고 발랄한 눈빛의 아가씨가 생글거리며〉 ‘색깔 좋은 접시에’ 담은 빵과 햄, 맥주 한잔을 가져옵니다. 이제 마음의 아늑함은 몸의 아늑함을 불러왔습니다. 그리고 환상 속에서이지만 랭보는 관능적 쾌락감에 한껏 빠져듭니다. 아가씨가 그의 ‘커다란 맥주잔’에 채워준 것이 맥주가 아니라 〈그녀의 거품〉이라고 표현할 만큼 황홀하게, 깊숙이. ☞ [더 읽기]”

 

[더 읽기]

 

‘환상곡’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랭보의 대표적 방랑시편 〈나의 방랑〉을 연상시키는 또 하나의 방랑시편입니다.

이 시에 나오는 자갈길에 찢어진 ‘내 반장화’가 말해주는 방랑의 형편은 ‘터진 주머니’가 달린 낡은 ‘내 외투’, ‘커다란 구멍이 하나’ 나 있는 ‘내 단벌바지’, ‘찢어진 신발’이 말해주는 〈나의 방랑〉의 방랑의 형편과 정확하게 겹칩니다.

 

현실에서의 방랑의 형편은 일치하지만 현실세계와 상상/공상/환상의 세계를 버무리는 수법은 두 시가 다릅니다. 〈나의 방랑〉은 시 전편에 걸쳐 앞에서 말한 현실세계의 사정과 상상의 세계의 형편(‘하늘 밑’, ‘뮤즈’, 큰곰자리‘, ’칠현금‘)이 섞여서 나옵니다. 시 전편에서 현실과 상상의 세계의 경계가 모호합니다. 〈[초록 주막]에서〉에서는 사정이 좀 다릅니다. 첫 두 연은 온전하게 현실세계이고 후반부 3행시 두 연은 포장은 분명 현실세계인데 상상/공상의 세계를 끌어들여야만 시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습니다.

 

〈[초록 주막]에서〉의 첫 두 연은 앞서 말한 대로 방랑생활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1870년 10월 시도한 두 번째 가출은 벨기에의 브뤼셀까지 가는데 첫 번째 가출 때처럼 호주머니 사정은 전혀 여의치 않습니다. 벨기에의 시골 샤를르로와의 한 주막(주막의 이름은 [초록 주막] 또는 [초록 주막에서]입니다)에 들어섭니다.

 

일주일 내내 자갈길을 걸어 반장화는 찢어먹었습니다. 버터 바른 빵과 이미 식었을 햄을 주문하고 주막 식탁 앞 의자에 주저앉아 다리를 바닥을 향해 쭉 뻗습니다. 워낙 피곤했었나요, 온몸이 풀리는 게 아늑해지고 아득해집니다. 벽에는 알록달록한 그림들을 수놓은 태피스트리가 걸려있습니다. 그림들이래야 우리나라 1960-70년대 시골 이발소 그림을 연상하면 될 것입니다. 가슴이 엄청 크고 발랄한 눈빛의 아가씨가 생글거리며 빵과 햄을 담은 색깔 좋은 접시를 가져옵니다.

이상이 초반 두 연의 서사입니다. 여기서 〈아가씨의 출현〉이 둘째 연 마지막과 셋째 연 첫 두 행에 걸쳐 있다는 점은 지적해둬야 합니다. 미리 말하면 이 시에서는 ‘아가씨의 출현’이 현실을 지나 상상의 세계로 들어오는 문턱입니다.

후반부 두 연의 서사는 이렇습니다.

 

음식을 가져온 아가씨 인상이 만만치 않습니다. 키스 한 번 한다고 겁먹을 인상이 아닙니다(이미 상상/환상의 세계에 들어섰다는 표지입니다). 수줍다기보다는 섹시한데다 충분히 당돌하다는 느낌입니다. 아가씨가 색깔 좋은 접시에 담아온 빵과 햄, 나는 굳이 ‘햄’만 다시 들먹입니다.

 

“반쯤은 식었을 햄” - “미지근한 햄” - “마늘쪽 냄새 향긋한 장미색 흰색의 햄”

 

미지근한 햄까지는 현실세계인데 마늘쪽 냄새를 풍기는 장미색 흰색의 햄은 이미 현실세계를 넘어섰습니다. ‘냄새’(마늘 냄새)와 ‘색깔’(장미색과 흰색)과 ‘물질’(햄)의 뒤섞임, 어울림(연구자들은 여기에서 적절하게 보들레르의 〈만물조응〉을 언급합니다), 나는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마늘쪽 냄새 향긋한 장미색 흰색의

햄을, ― 그리곤 내 커다란 맥주잔을 채워주잖아,

지다 남은 햇살에 금빛으로 물드는 제 거품으로.”

 

아가씨가 내 맥주잔을 채워주는 게 맥주의 거품이 아니라 아가씨 자기의 거품입니다.

 

〈내 커다란 맥주잔〉과 그 잔을 채우는 〈아가씨의 거품〉, 직전으로 돌아가 〈햄〉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반쯤은 식었을, 미지근한 〈햄〉과 마늘쪽 냄새 향긋한 장미색 흰색의 〈햄〉은 이미 같은 햄이 아닙니다. 맥주의 ‘거품’이 아가씨의 ‘거품’으로 바뀌었듯이 ‘햄’ 또한 아가씨의 ‘햄’으로 바뀌었습니다.

 

요약하면 이렇게 됩니다.

 

아늑한 기분과 아득한 느낌이 하나 되면서 나는 상상/환상/공상의 세계로 넘어섭니다. 아가씨는 내가 수작을 걸어도 저항하는 게 아니라 도발하면서 오히려 내 욕망을 자극합니다. 색깔 좋은 접시는 알록달록한 태피스트리가 걸린 주막 안 배경과 대비되고 마늘 냄새를 풍기는 장미색 흰색의 햄은 아가씨의 육감적인 몸/살로 바뀝니다. 빈 ‘커다란 맥주잔’은 채워줘야 할 〈텅 빈 내 욕망〉이고 ‘거품’은 내 욕망을 채워줄 〈아가씨의 넘쳐나는 욕정〉입니다.

 

아마도 이 시는 랭보가 현실의 이면에 감춰놓은 공상의 세계를 제대로 찾아내 읽는다면 그의 시들 가운데 가장 에로틱한 시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시를 읽는 재미로는 최상의 것일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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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방랑 - 랭보 시집 대산세계문학총서 123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 지음, 한대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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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서 태어나는 비너스

 

양철로 만든 녹색 관에서 솟아나듯, 갈색 머리털에

포마드를 잔뜩 바른여자의 머리 하나가,

낡은 욕조에서, 천천히 그리고 멍청하게,

제대로 수선도 안 된 손상을 입고 떠오른다.

 

이어서 살진 회색 목덜미, 튀어나온

넓은 어깨뼈, 꺼지고 솟아오른 짧은 등,

이어서 퉁퉁한 허리 살이 날아오를 듯하고,

피하지방은 얄팍한 판지 조가들 같다.

 

등살은 약간 붉고, 그 모든 것이 이상하게도

끔찍한 맛을 낸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돋보기로 살펴야 할 기이한 것들......

 

허리에는 두 낱말이 새겨져 있다. 클라라 비너스

- 그리고 그 온몸이 꿈틀거리며 커다란 엉덩이 내미는데

항문에 돋은 종기로 징그럽게 예쁘다.

(랭보, 《나의 방랑 - 랭보 시집》, 한대균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 48면)

 

“나는 비너스 하면 우선 보티첼리의〈비너스의 탄생〉(1485년, 그림)을 떠올리는데 16세에 첫 시를 발표하고 21세에 절필한 시인 아르튀르 랭보, 그가 열여섯 살 때 만들어 낸 비너스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비너스가 ‘물(거품)에서 태어난 여신’이라는 점에서는 보티첼리와 랭보의 비너스가 같지만 보티첼리의 비너스는 미의 여신의 환대와 바람둥이 서풍의 신, 제피로스의 수작을 받으며 바다에서 조개를 타고 뭍으로 나타나고 랭보의 비너스는 ‘함석 관’을 연상시키는 ‘초록색 낡은 욕조’에서 망가진 모습으로 떠오릅니다. 비너스가 겉모습처럼 속마음도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보티첼리가 〈정숙한 비너스〉를 창조했다면, 랭보는 ‘끔찍한 냄새’를 풍기며 ‘큰 엉덩이,/ 항문에 종기가 돋아 징그럽게 아름’다운 〈클라라 비너스〉, 실은 ‘클라라 비너스’ 상표 마네킹을 패러디하며 비너스를 조롱합니다.

 

[더 읽기]

 

낡은 욕조에서 머리부터 엉덩이까지 차례로 떠오르는 여자는 갈색 머리에 포마드를 잔뜩 바르고 있고 상체는 뒤틀려 기형입니다. 끔찍한 냄새를 풍기며 항문에 종기가 돋은 큰 엉덩이는 징그럽게 아름답습니다. 허리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클라라 비너스”. 라틴어 어원을 찾아가면 클라라clara는 ‘천상의’, ‘찬란한’이란 뜻을 가지고 있어 생긴 모습과는 달리 ‘천상의 비너스’라는 이름이 생뚱맞기도 합니다.

 

많은 랭보 연구자들은 욕조에서 떠오른 여자, 클라라 비너스를 창녀로 여겼습니다. 이 시가 쓰일 당시 유럽에서는 기둥서방들이 창녀들 팔에 자기 이름을 문신해 넣는 것이 유행이었다 합니다. 클라라의 경우 다르기는 합니다. 이름이 있는 곳이 팔이 아니라 허리이고 기둥서방이 아니라 창녀 자신의 별명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연구자들은 한발 더 나갑니다. 아름다움의 여신, 욕정의 여신 비너스를 창녀에 비유하다니, 이를 랭보를 동성애자나 양성애자로 생각할 수 있는 근거의 하나로 삼지는 않았지만 여성혐오자라일 수는 있다는 혐의를 갖게 하는 중요한 단서로는 삼았습니다.

 

이 시를 되풀이 읽으면 한국어로 번역된 첫째 연의 마지막 행 “수선도 제대로 안 된 손상을 입고 떠오르니avec des déficits assez mal ravaudés”가 시 전체가 인체 부위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욕조 안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한 여자의 이미지 구성을 방해합니다. 생명체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시구가 지나치게 사물을 묘사하는 듯해서일 것입니다. ‘망가졌으나 제대로 손보지 않은 몸’ 정도의 뜻일 텐데 황현산, 한대균, 곽민석 교수는 다음과 같이 비슷하게 한국어로 옮기고 있습니다.

 

“수선도 제대로 안 된 손상을 입고 떠오르니,”(황현산, 미출간)

“제대로 수선도 안 된 손상을 입고 떠오른다.”(한대균, 2014)

“제대로 수선도 안 된 손상을 입고서 떠오른다.”(곽민석, 2010)

 

내가 이 시의 한국어 번역을 부탁했던 황현산 교수께서는 “클라라 비너스”에 〈마네킹의 상표라고 생각해야 할 듯〉이란 〈주〉를 덧붙여 보내주셨습니다. 〈클라라 비너스〉가 창녀의 별명이라기보다는 마네킹의 상표이고 욕조 속에서 떠오르는 것은 실은 망가진 마네킹일 것이라는 주장인데, 이 시의 해석에 중요한 장을 마련할 언급입니다..

랭보가 마네킹 상표가 ‘클라라 비너스’라서 비너스를 떠올린 것인지 그 상표와는 상관없이 그 뒤틀린 이상한 모습에 지독한 냄새까지 풍기는 물에 잠겨 머리만 내놓고 있는 마네킹을 보고 정숙하고 아름다운 기존의 비너스를 능멸하고 싶었던 것인지는 독자들이 판단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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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르카 시 선집 을유세계문학전집 15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지음, 민용태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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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한 유부녀

 

리디아 카브레라와 그녀의 흑인 소녀에게

 

그리고 나는 그녀를 강으로 데리고 갔는데

아가씨라 믿었으나,

남편이 있었지.

산티아고 축제의 밤

거의 약속이나 한 듯 했지.

불들은 꺼졌고

귀뚜라미들이 빛을 냈지.

거리의 마지막 모퉁이에서

그녀의 잠든 두 젖가슴을 만졌더니

그것은 히아신스 꽃다발처럼

돌연 피어났지.

풀 먹인 치마 내는 소리가

칼 열 자루가 찢는

비단 조각이 내는 소리처럼

내 귓전에서 사각거렸지.

은색 달빛도 비추지 않지만

그 아래에선 나무들이 자라고 있고

강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선

사방에서 개들이 짖어대고 있지.

*

찔레 덩굴과 갈대 가시나무,

골풀을 지나,

그녀의 머리칼 밑 진흙 위에

오목한 자리를 만들었지.

나는 넥타이를 풀었지.

그녀는 옷을 벗었지.

이 몸은, 권총을 찬 혁대를.

그녀는 네 겹 상의를.

수선화도 소라도

그녀의 살결만큼 삼삼하진 않고,

달빛에 비친 크리스탈도

그토록 눈부시게 빛나진 않지.

절반은 열기가 가득하고,

절반은 냉기가 가득해서,

놀란 물고기처럼 그녀의 허벅지가

내 밑으로 미끄러져 들었지.

그날 밤 나는 가장 근사한

말달리기를 했지,

고삐도 등자도 없는

자개 빛 암말을 타고.

그녀가 내게 한 말들을,

사나이로서 난 되풀이하지 않겠어.

이성의 빛이

나를 신중하게 하지.

나는 모래와 입맞춤으로 뒤범벅이 된,

그녀를 강으로부터 데려왔지.

공중에서는 백합들이 미풍을 향해

칼을 휘두르고 있었지.

 

나는 지금의 내가 그렇듯이

사나이답게, 진짜 집시답게 행동했지.

나는 담황색의 반짇고리를

그녀에게 선사했는데,

그러니까 내가 강으로 데려갈 때

아가씨인 척한

유부녀와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았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로르카 시선집》, 민용태 옮김, 을유문화사, 2008, 188-90면. 번역은 수정)

 

“내전 상태에 있던 스페인, 1936년 8월 16일 프랑코 장군의 민병대원들에게 끌려가 38세의 나이에 주검도 없이 사라진 가르시아 로르카, 20대 후반에 발표한 시들을 모아 출간한 《집시 이야기 민요집》(1928년)에 실린 〈부정한 유부녀〉는 그에게 대중적 명성과 개인적 당혹감을 동시에 안긴 시입니다. 이 시에는 출렁이는 관능, 노골적인 에로틱한 표현, 구체적인 성애의 이미지 게다가 완벽한 서사구조 등 온갖 요인들이 넘쳐납니다. 이 요인들이 바로 대중들을 열광하게 하지만 이 요인들의 이면을 독자들이 읽어내지 못하자 시인은 당혹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 시를 에로틱 포에지로 뿐 아니라 그 안쪽에 숨어 있는 로르카의 비극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사회성 강한 정치시로 읽어낼 때 우리는 가르시아 로르카와 제대로 만나는 것입니다.”

[더 읽기]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1898-1936)의 〈부정한 유부녀〉는 이미 말했듯이 전 세계적으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으나 막상 로르카 자신은 난처해했습니다. 집시풍의 자유로움과 에로티슴이 넘쳐나는 이 시에 대중들이 열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첫째 연.

 “그리고 나는 그녀를 강으로 데리고 갔는데

아가씨라 믿었으나,

남편이 있었지.”

 

시작부터가 집시들의 성적 자유로움을 물씬 풍기는데, 불란서의 갈리마르 출판사의 〈플레이야드〉판 《로르카 전집》의 〈주〉를 보면 이 3행은 로르카의 창작이 아니라 스페인 남부 시에라 네바다 지방의 노새 몰이꾼들이 콧노래로 즐겨 부르는 대중가요의 한 부분을, 의식하지 못한 채 차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스페인의 대표적인 수호신인 산티야고(불어로는 생 작크)의 축제의 날 밤, 늠름한 집시는 집시여인을 유혹하고 그녀 또한 집시답게 뒤로 빼지 않고 당당하게 응합니다. 성희의 묘사가 노골적입니다.

둘째 연.

성애의 과정이 구체적이고 에로틱하게 묘사됩니다. 집시는 우선 풀숲을 지나 강가 으쓱한 곳에 편하게 누울 오목한 자리를 만듭니다. 둘은 각자 스스로가 옷을 벗습니다.

 “수선화도 소라도

그녀의 살결만큼 삼삼하진 않고,

달빛에 비친 크리스탈도

그토록 눈부시게 빛나진 않지.

절반은 열기가 가득하고,

절반은 냉기가 가득해서,

놀란 물고기처럼 그녀의 허벅지가

내 밑으로 미끄러져 들었지.”

 그리고 집시는 집시여인을 근사하고 다이나믹한 암말에 비유합니다. 황홀한 말타기에 열중합니다. 둘째 연의 마지막 두 행에서는 백합 향내가 진동하다고 함으로써 에로틱의 절정을 암시합니다.

 셋째 연.

‘반전의 드라마’가 개입합니다. 예상과는 달리 집시는 집시여인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유부녀임을 밝히지 않았다는 트집을 잡아 반짇고리를 선물로 주면서 둘 사이를 끝냅니다.

 겉보기에 더 없이 ‘싱싱한’ 에로티슴을 보여주는 시이지만 로르카는 이미 첫째 연에서 죽음의 빛을 깔아놓고 있습니다.

스페인 최대의 축제임에도 불구하고 휘황찬란한 불빛이 없습니다. 청각적으로 에로틱의 진수라 할 수 있는 “풀 먹인 치마 내는 소리”가 〈죽음〉을 상징하는 “칼 열 자루가 찢는 비단 조각이 내는 소리”에 비유됩니다. 더 나아가 로르카에게서 〈번식〉을 뜻하는 “은색 달빛도 비추지 않”습니다. 달빛을 쬐지 못하는 나무들, 자라기는 하지만 이미 이 ‘성장’에는 생산성이 거세돼 있습니다.

 첫째 연의 이런 맥락을 감안하고 둘째 연으로 넘어가면 여기에서 펼쳐지는 남녀상열지사가 상호적이 아니라 일방적인 것이 아닐까 머뭇거리게 됩니다. 이 의구심은 세 번째 연에서 현실이 됩니다. 집시가 집시여인에게 준 반짇고리를 ‘선물’이라고 했는데 이제 이 선물은 ‘화대’로 전락하고 집시여인은 ‘창녀’ 취급을 받습니다.

 나는 앞에서, 로르카는 멋진 에로틱 포에지를 쓰지만 동시에 그 이면에 자기의 비극적 세계관을 숨겨놓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로르카는, 시인으로서든 인간으로서든, 언제나 〈약자〉의 편에 섰습니다. 그에게는 일반 시민보다는 집시가 ‘약자’입니다만 집시라고 해서 다 같은 집시가 아닌 것입니다. 세상에서 ‘약자’인 집시 가운데에서 다시 ‘강자’와 ‘약자’가 나뉩니다.

 〈마초 집시와 집시여인〉.

 이 시는 유부녀였더라도 유혹했을 게 뻔하면서도 성적 욕망을 해소한 다음에 오는 허망함, 그녀가 유부녀라고 밝히지 않았다는 트집으로 그 허망함을 분노로 바꾸고 함께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집시여인을 창녀로 전락시킴으로써 더 심한 ‘약자’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으면서 반대로 자신은 상대적으로 ‘강자’ 자리를 차지하는 비열하고 치사한 마초적 집시를 까발립니다. 이 시는 유부녀이면서도 결혼했다고 하지 않은 집시여인의 부도덕함을 드러내는 시가 아니라, 같은 집시이면서 그 가운데서 다시 더 처참한 ‘약자’ 쪽으로 내몰리는 집시여인의 슬픔, 참담함을 보여줍니다.

 이 시에 대한 대중들의 열광에 로르카가 당혹스러워 한 것은 대중들이 시의 이면에 숨겨놓은 이런 〈시적 장치〉를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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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적 공간 - 왜 노인들은 그곳에 갇혔는가
오근재 지음 / 민음인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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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오근재 선생은 속된 말로 잘 나가는 교수생활로 평생을 지냈고, 지금도 이런저런 디자인 관계 학회, 협회 등에 관계하며 연세대학교 ‘특별 초빙 교수’라는 직함도 가지고 계신 디자인 분야의 원로이십니다. 선생이 쓴 책의 제목이 《퇴적공간》입니다. ‘퇴적堆積’, “많이 겹쳐 쌓인 것”을 뜻합니다. 선생께서 이 책을 쓰게 된 직접적인 까닭은 사계의 원로이신 선생도 어느 순간 정상적인 사람의 영역에서 떠밀려 〈노인〉, 2014년부터 호칭이 바뀌어 ‘어르신’ 영역으로 편성됨을 실감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노인은 어떤 기여도 하지 못하고 복지기금이나 축내는 잉여물, 선생의 표현으로는 퇴적물로 분류됨을 실감했기 때문입니다. ‘어르신’이 존칭이기는 하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역시 잉여인간입니다. “청소부를 미화원으로, 파출부나 식모를 가사도우미로, 택시 운전사를 기사님이라는 호칭으로” 바꿔 부른다고 뭐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제 없듯, 노인을 ‘어르신’이라 부르는 것도 호칭의 인플레이션일 뿐입니다.

우리 사회의 퇴적물인 노인들이 몰려드는,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공간이 바로 서울의 탑골공원 그리고 종묘공원입니다. 저자는 이곳을 〈퇴적공간〉이라고 이름 짓고 이 공간 특유의 현상을 사회학적으로 정리했습니다. 여기에 모이는 퇴적물로서의 노인들의 가장 큰 특징은 〈연대감의 부재〉입니다.

 

“여기 오는 다른 사람들도 사연이 있겠죠. 몇 번 만나 얼굴은 익으니까 인사를 나누긴 하지만, 대부분 성도 이름도 모릅니다. 서로 묻지 않고 답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랄까. 만나는 사람은 많아도 그들의 속내는 몰라요. 속살을 드러내는 말은 서로 하지 않지요. 묻지도 않고......”

 

식구들로부터 점점 심하게 버림받아가는 맥락에서 보면 당연한 행태일 수 있고, 노인들을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 전제하고 가족들이 노인을 돌보는 게 아니라, 가족으로부터 그들을 떼어내 하나의 노인 단위로 규정한 다음 그들을 단위별로 국가가 돌보려고 하는 복지정책의 방향에서 볼 때도 당연한 행태일 수 있습니다. 복지 혜택의 대상으로 분류된 노인들은 이제 자립능력을 키우는 교육의 장으로 초대되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눈치만 보고 시혜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로 떨어집니다. 많은 것을 상실한 노인들에게 연대감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입니다.

 

책을 읽다보면 그럼에도 혜택의 대상일 뿐인 이들이 형성하고 있는 집단에 역시 먹이사슬이 생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먹이 사슬이 생기는 법. 여기에도 예외 없이 노인들의 주머니를 털려는 이들이 등에처럼 붙어 있다. 바둑과 장기 같은 게임판을 대여하는 자, 시국강연자, 작은 음식점과 소주방 운영자, 커피와 박카스를 파는 아줌마들이 그들이다. 이 작은 공간 안에도 작은 사회 조직이 움직이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먹는 자’와 ‘먹히는 자’ 두 그룹으로 나누어 본다면, 우리 ‘어르신’들은 젊었을 때는 자본주의자 고용주에게, 지금은 이런 등에들에게 먹잇감을 제공해 주며 석양처럼 소멸되어 간다.”

 

‘저자의 말’, ‘들어가는 말’, ‘나가는 글’을 빼고 5부 19장으로 돼있는 이 책은 ‘14. 늙은 디오니소스의 밤’, ‘15. 박카스 아줌마의 하루’ 두 장에서 ‘먹잇감’이 된 〈노인〉과 ‘등에’가 된 〈박카스 아줌마〉를 다루고 있습니다. 모든 삶의 공간이 그렇듯 퇴적공간도 낮과 밤으로 이뤄집니다. 아폴로와 박카스로. 퇴적공간은 주로 아폴로가 지배합니다. “보수와 진보의 시국강연, 바둑과 장기 게임, 법륜공 참선, 서화작품의 판매, 상호 담소 등”. 아주 작은 규모이지만 이곳에도 파토스 찬가가 은밀하게 연주되는 박카스적 공간이 있으며, 그 주관자는 ‘박카스 아줌마들’입니다.

성적 매력과 능력이 부재하는 박카스를 우리는 상상하지 않습니다. 물론 ‘박카스 아줌마들’은 성적인 까닭으로 박카스 아줌마라 불린 게 아니라 동아제약에서 제조 판매하는 피로회복/자양강장제로 분류된 음료수 ‘박카스’를 팔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박카스에게 술은 궁극의 목표가 아니라 궁극, 성적인 경지로 더 쉽고 더 빨리 가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박카스 아줌마들은 대개 술에서 멈춥니다. 그들에게는 더 갈 수 있는 매력이나 능력이 없고 먹잇감들 또한 진도를 더 나갈 수 있는 생물적, 경제적 능력이 없습니다. 사랑, 로맨스, 가슴이 뜀, 두근거림이라니요!

 

“박카스 아줌마들의 삶은 그들이 잃어버린 성적 매력을 자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고단하고 서글퍼 보인다. 그들은 기회가 닿는 대로 커피와 소주를 마셔야 수익이 발생하기 때문에 기호嗜好 행위가 노동으로 탈바꿈된 현실을 몸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한 마디로 그들은 건강을 조금씩 깎아 팔지 않으면 돈이 되지 않는 척박한 현실에 노출되어 있는 셈이다.”

 

노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처지가 고약한 경우는 남자들보다 여자들의 경우가 노인으로서의 삶이 더 열악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있지도 않은 성적 매력을 미끼로 늙은 남자들을 유혹해야 하는 그들의 삶은 별도로 살펴봐야할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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