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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 루비
박연준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7월
평점 :
낮동안 쓰지 못했던 여름과 루비의 이야기는 밤이 되면 저를 부릅니다.
“<여름과 루비>는 시이자 소설이자 목소리이자, 노래다. 이야기다.” -전승민(문화 평론가)
이야기에 빠져들수록 시이자 소설이자 목소리이자 노래라는 적확한 표현에 저절로 공감하게 됩니다.
어린 소녀 여름의 시선으로 삶, 사람, 관계.
그 속에서 일렁이는 감정의 결로 사랑, 우정, 이별, 상실 등을 섬세하게 그러나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작고 순수한 존재의 시선으로 그려진 세상은 이상하리만큼 모순적입니다.
꾸미지 않은 시선에는 거친 언어 하나 없지만 서늘하리만큼 투명한 날카로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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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엄마는 거의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짧은 시간동안 망설이다 내게 세상에서 가장 작은 고구마를 건네, 맹세컨대 그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고구마야. 새끼손톱만 할 거야. 그것 때문에 나는 치명상을 입지만 웃어. 알았다는 듯. 속셈을 다 알았으니 괜찮다는 듯. 아름답게 웃어보이는 거야. 물론 그 때문에 나는 키가 안 커. 다른 것만 자라. 다른 것. 우리가 갖고 싶어 하지 않는 것. 루비, 고구마가 그렇게 슬픈 거야.’ p.116
이렇게 아이들은 어른의 사소한 행동하나에도 그 속에 담긴 의도와 진심을 간파해버립니다.
먹먹한 이야기를 어쩜 이리도 담담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요?
여름에게 겨울은 마음이 찌부러져 있을 때 펴주던 사람으로 초경의 경험으로 의지할 곳 없을 때에도 망설임 없이 찾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잠시나마 안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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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언니의 사랑으로 나는 고통에서 벗어난다. 위로 위로 떠올라 제자리를 찾는다.’ (p13)
‘어린 여자애들은 늘 어린 여자애들을 의지한다. 어른들이 들고 있으라고 주고 간 죄의식과 수치심, 그것을 서로 들어준다. 잠깐 동안. 들어준다는 건 잠시 놓여나게 해주는 일이다. 잠깐의 시간을 주는 거다. 놓여날 시간.’ (p.128)
여름의 눈에 비친 고모의 모습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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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처럼 한쪽 면이 어두웠다.’ (p.141)
‘현재에 깃든 모든 것을 부끄러워했다...고모의 마음은 언제나 미래에 가 있었다.’ (p.144)
‘고모는 닿을 수 없는 곳을 그리다 상체가 꺾인 나무처럼 쓰러져 잠들었다.’ (p.160)
‘서쪽 창에 서서 해가 뜨길 기다리는 사람, 저녁이 되어야 아침을 보는 사람’ (p211)
여름에게 아빠의 존재는 답답한 먹먹함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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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 가랑잎이 되었다. 낮부터 취해서 바닥의 거름이 되어보려 하는 일.’ (p174)
‘나자빠지는 가랑잎은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p.179)
여름에게 루비는 먼저 손을 내밀어준 친구였지만 둘이 있을 때만 친구였죠.
루비는 모든 아이들의 적이었고, 그런 루비를 여름은 아이들 앞에서 피합니다.
‘나는 한결같이 비겁했다. 내가 사라지거나 내 앞에 나타난 루비를 사라지게 하고 싶었다.’(p194)
저는 이 부분이 가장 아팠습니다. 타인의 비극이 전염될 까 두려워 비겁함을 선택한 여름이 누구보다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둘은 헤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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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별은 깔끔하다. 사과 반쪽처럼, 나뉘고 먹히고 사라진다...
모든 이별은 언덕 위에서 이루어진다. 사소한 이별이라 해도 그게 이별이라면, 올라선 곳에서 내려와야 한다.
내려오기. 그게 이별이다. 당신이 있는 곳과 없는 곳, 거기와 여기, ‘사이’라는 높이.
당신이 한사코 나와 떨어져 존재하려는 높이.’ (p197)
마지막 페이지에서 작가는 말합니다.
‘결국 내가 삶에서 ’찢어진 페이지‘를 쓰고 싶어 한다는 것을...
‘유년’이라는, 벗을 수 없는 옷에 입은 채 커버린 사람 곁에 서 있고 싶다.‘라고요.
저는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다시 앞장의 나뭇잎 그림을 한참동안 들여다보았어요.
섬세하고 예민한 여름의 시선을 닮은 잎맥의
진하고 연한, 길고 짧은 선들을 가만히 어루만지다
어쩌면 내 안에 여전히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여름과 루비가 애틋해서 꼬옥 안아주고 싶었어요.
선선한 가을밤,
<여름과 루비>를 만나보시는건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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