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않으면 - 앙드레 지드 젊은날의 자서전
앙드레 지드 지음, 권은미 옮김 / 나남출판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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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중재자들과 예술가들이 배출되는 건 이중교배의 산물들, 즉 그 안에 서로 대립되는 요구들이 공존한 채 서서히 중화되는 가운데 성장해가는 그런 산물들 속에서이다.”

 

앙드레 지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번역본이 나와 있는 프랑스 작가 중 한 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막상 도서관에서 지드의 이름을 검색해 보면 대부분이 「좁은 문」의 여러 판본이고 간간히 「전원교향악」이 섞여있을 뿐, 「배덕자」나 「지상의 양식」등 그의 다른 작품들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아마도 「좁은 문」과 「전원교향악」의 경우 그 종교적이고 금욕적인 분위기 때문에 윤리적으로 건강한 작품으로 지목되어 청소년 교양도서 등으로 널리 읽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지드의 작품들이 그의 말을 빌자면 〈이중교배의 산물들〉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는 지드의 반쪽만 읽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즐겨 읽는 지드의 소설에서 종교적 주제가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지드가 종교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품고 천착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이는 지드의 소설을 기독교적 윤리가 아닌 새로운 윤리관, 신이 떠난 뒤의 신이 없는 율법을 구현하기 위한 작업이라고까지 말한다. 실제로 늘 ‘성서에서 도덕적 양식과 충고를 끌어’냈던 지드가 천상이 아닌 지상에서, 아프리카의 태양과 아무 ‘저의도 회한도 없이’ 쾌락을 추구하는 본능 속에서 새로운 양식을 찾아냈을 때 이 〈지상의 양식〉은 새로운 사회, 새로운 윤리를 갈망하던 당대의 젊은이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어떤 하나님의 이름으로, 어떤 이상의 이름으로, 당신들은 내가 나의 본성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금지한단 말인가? 그리고 내가 고스란히 내 본성을 따른다면 그 본성은 도대체 날 어디로 끌고 갈 것인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저명한 작가였지만 사후 그의 대부분의 소설이 바티칸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었다는 사실은 지드의 소설이 종교적 금욕주의에 입각하거나 기존의 윤리도덕을 고수하는 보수주의와는 오히려 반대의 입장에 있음을 보여준다.이 책은 그러한 지드 소설의 뼈대를 이루는 두가지 중심축, 종교적 경건함과 본성에 충실한 삶의 추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지드 자신의 육성으로 들려주고 있다.

 

지드가 60여세에 집필한 이 자서전은 그의 일대기를 다룬 것은 아니다. 대신 어둡고 불행했던 유년기와 학창시절을 거쳐 인생의 전환점이 된 아프리카 여행에서 돌아와 사촌누이와 결혼하기까지 지드의 젊은 날까지만 다루고 있다. 지드가 이 책을 집필한 목적이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회고하기보다 자신의 두가지 상반된 사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볼 때 그의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는 이미 이 시기에 모두 일어났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잘 표현되어 있듯이 보통 우리의 사회는 본능에 충실한 세상과 예의와 규범으로 위장한 세상, 둘로 나누어져 있다. 우리는 매일같이 이 두 세상을 오가면서 살지만 그 차이를 거의 느끼지 못한다. 이 대조되는 두 세상의 차이를 극명하게 느끼는 이들은 다른 세상으로 건너갈 때 재빨리 가면을 바꿔쓰지 못하고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이런 민감한 인간들이 부조리함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글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 소설 속에서는 우리가 당연한 듯 지나쳤던 두 세상이 극명하게 대조되어 묘사되곤 한다. 지드 역시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라는 대립되는 두 세상의 차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그는 이를 신의 선조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자신의 모슨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늘 상반되는 두 세상의 충돌의 소산이라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그의 삶을 분리시키고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인이 이미 숙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다소 과대망상에 가까운 피해의식이 지드의 정신과 육체를 사로잡고 있는데 이는 그를 극도의 신경과민에 시달리게 하는 동시에 자신은 ‘남과는 다른’ 인간, 무언가를 구현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부여해 그가 작가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되어 준다.

“의무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형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런 획일성이란 자연이 거부한다. 각 존재는, 아니면 적어도 선택받은 자들은 이 지상에서 어떤 역할을, 그 어떤 것과도 닮지 않은 바로 그 자신의 역할을 해야한다. 어떤 공통된 규율에 순종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은 배반이다.”

 

지드의 삶에서는 늘 두가지 상반되는 사건, 배경, 요소들이 끊임없이 반복되는데 그 중에서도 그의 삶을 결정짓는 가장 큰 두가지 사건은 사촌누이 마들렌에 대한 사랑과 아프리카 여행에서 얻은 쾌락의 경험들이다. 지드의 병적인 예민함은 자주 상황을 극단으로 몰고가곤 하는데 이 두가지 사건에 대한 그의 반응 또한 그렇다. 조숙하고 침착한,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사촌누이에 대한 아가페적 사랑은 그들의 결혼생활에서 육체관계를 거세시키고 아이러니하게도 파국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사랑과 분리된 지드의 육체적 욕망은 아프리카의 젊고 뜨거운 야성으로 향한다. 종교와 제도권의 윤리체계에 억눌려 있던 지드가 아프리카에서 발견한 것은 여행에서 돌아오면 잊어버릴 단순한 쾌락이 아니다. 그는 지중해의 뜨거운 태양과 위장하지 않은 본능의 발산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다시 태어난다.

“이제야 나는 정상적인 내 상태를 찾았다. 여긴 더 이상 강요도, 서두름도, 의심쩍은 것도 없다. 내가 간직한 기억 속에는 더 이상 잿빛나는 것도 없다. 나의 기쁨은 한없이 컸으며 사랑이 같이 어우러졌다 하더라도 그보다 더 충만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기쁨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거기다 사랑을 언급한단 말인가? 어떻게 내 육체적 욕망이 내 마음을 좌지우지하게 내버려둔단 말인가? 나의 쾌락은 아무런 저의도 없었으며 또 어떤 회한도 남기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야성적이고 불같이 뜨거운, 관능적이고도 음험한 그 작고 완벽한 육체를 벌거벗은 내 가슴에 껴안았을 때의 그 황홀경은 그렇다면 무엇이라 불러야 할 것인가?”

이때부터 그는 의례적으로 주어지던 윤리체계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지드는 단순히 기존에 주어지던 것을 거부하거나 반발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도덕을 구현하려 한다.

“내 속에서 새로운 내 율법의 서판을 막 발견하던 그 순간에 말이다. 규율로부터 나 자신이 해방되는 것으론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열광을 합법화하고자, 내 광기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나섰던 것이다.”

인간은 사회에서 주어진 역할이 아닌 자기의 본성을 찾아나서야 하며 그래서 인간은 안주가 아닌 방황과 탐색에서 삶의 의의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지드는 ‘더이상 내가 그것에 대해 대항해 무장하지 않게 되었기에 더 이상 유혹이라 부르지도 않게 된 그것에 대해 저항했던 내 태도 속에 감춰져 있던 모든 오만함을’ 고백하고 던져 버린다.

 

주위 사람들이 출간을 만류했을 정도로 이 자서전은 지드 자신의 충격적이고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수도 있는 과거를 솔직하게 고백한다. 이를 질투심과 분노로 자신의 편지를 태워버린 아내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너무 유치한 일이다. 아마 지드는 보통 사람들이라면 숨기고 싶었을 치부들에 의해 자신의 작품과 사상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모든 소설작품에 작가가 투영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지드의 경우 그의 작품 자체가 삶이고 그의 삶 자체가 작품이라고 할 정도로 지드의 소설들은 결국 자기 자신을 찾는 여행이었고 지드 스스로도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진흙탕에서 연꽆이 피듯 한 인간이 글을 쓰는데는 치욕과 좌절, 상처가 선행되어야 한다. 행복한 인간은 글을 쓰지 않는다. 치유와 탈출구가 필요한 이들만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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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폐범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9
앙드레 지드 지음, 원윤수 옮김 / 민음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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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10프랑짜리 가자 금화가 하나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실제로는 2수의 값어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위폐라는 것을 알아내기 전까지는 프랑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르네 지라르는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주체가 자신의 욕망이 아닌 중개자의 욕망을 호방한다는 <삼각형의 욕망>으로 많은 소설들을 분석한다. 이는 단지 특수한 몇몇 이들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인간형의 형성과정을 보여주며 많은 근대소설에 등장하는 허위의식에 물든 속물들과 거짓된 인간관계를 조명하는 나침반 역할을 한다. 
[위폐범들]의 등장인물들 역시 이러한 거짓된 허위의식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지드는 이를 실제의 가치를 지니지 못한 위폐에 대한 욕망에 비유한다. 이를 좀더 확장시키면 화폐가 지닌 가치라는 것 자체에 의문이 든다.
과거에 우리는 1,000원의 돈으로 충분히 과자를 살 수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1,000원으로는 과자 하나를 사기도 어렵다. 쵸코파이는 러시아에서나 한국에서나 같은 맛을 가지지만 원화는 외국으로 나가면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덧붙여 위폐라 해도 그것이 위폐라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되기 전까지는 위폐는 충분히 화폐의 역할을 하며 유통될 수 있다.
화폐가 스스로 항구적이고 자생적인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는 것, 사회적인 약속에 의해서 변동되는 가치만을 지닌다는 것은 화폐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결국 모든 화폐는 위폐적 성격을 가지며, 모든 인간은 위폐범들인 것이다. (읽어보지 못했으나 [타고난 거짓말장이들]이라는 책에서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적든 많든 거짓말은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듯이.) 이를 다시 소설로 옮겨와 적용시키면 위폐범들의 왜 방황하고 무엇을 고민하는지도 어느정도 감이 잡힌다.

"마치 누구나 조금은 진심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연극을 하는게 아니기나 한듯. 이 친구야, 인생은 희극에 불과한 거야!"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파사방, 릴리앙, 뱅상, 조르쥬처럼 위폐를 화폐와 동등하게 취급하고 이를 이용해 인생을 즐기는 이들. 이들에게 진실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기에 그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무의미하고 불필요하며 우스운 일이다. 이들에게는 현재만이 존재하며 모든 것이 말장난이고 어떤 심각한 일이든 비웃어버리는 것이 재치있고 세련된 태도로 여겨진다.
그리고 반대편에 에드와르, 베르나르, 올리비에등의 다른 위폐범들이 있다. 이들에게는 자신이 가진 화폐가 위폐인지의 여부가 가장 큰 고민거리이다. 그래서 이들은 끊임없이 방황하고 회의하고 질문하며 진실된 가치를 찾는다. 그런 모든 노력이 의식적이었건 무의식적이었건, 너무나 순수해서였건 허세나 질투에 의해서였든 결국 진실이 아닌 허위였다는 사실에, 인간은 본질적으로 위폐범이라는 사실에 이들은 또 끊임없이 절망한다.
사랑하는 이에게 오히려 수줍음과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진심을 전달하지 못하고  호의를 베푼 것이 오히려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고 선의에 의한 행동이 파국으로 귀결되는 등 허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부조리한 결과를 낳곤 한다. 용기와 기력을 잃고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이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마저 부정하기도 한다.
"하느님이 즐긴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알아. 하느님이 우리에게 시키는 일을 우리 뜻대로 하고 싶어서 한 것처럼 믿게 하고 하느님은 재미있어 한단 말이야."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언행이 완전한 진실에 도달할 수 없고 자유의지에 의한 것도 아니라면, 즉 우리의 모든 언행의 동력이 타인에의 질투, 허위의식, 또는 허영심에 의한 모방에 불과하다면 우리에게 삶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일까? 그저 모든 가치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냉소하며 현재를 즐기거나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는 게 나은 것일까?
여기 집으로 돌아온 탕아가 있다. 집에서는 그를 환대하고 동생은 그를 질투한다. 그리고 동생이 탕아가 거쳐온 죄악의 길을 떠나려 할 때 탕아는 그를 말리지 못한다. 진실에 도달하려면 오욕의 길을 거쳐야 함을 알기 때문이다.
지드의 소설 [탕아 돌아오다]에 나오는 탕아는 [위폐범들]의 베르나르를 연상시킨다.
자신의 작품까지 믿지 못하고 끊임없이 다른 길을 모색하는 에드와르, 모든 것에 반항하다가 결국은 자신의 반항에 반항하며 길을 찾는 베르나르, 너무도 섬세하고 순수해 오히려 쉽게 악덕에 빠지기도 하는 올리비에 등 작가가 선호하는 인간형은 분명하다.
작가가 파사방,뱅상,조르쥬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이들이 허위로 가득 차 있어서라기 보다는 이들이 자기확신에 빠져 그 속에 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애정을 보이는 이들도 허영심과 질투로 인해 무분별한 실수를 범하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나 그러면서도 이들은 부단히 더듬거리며 탐색을 계속한다. 베르나르가 무정부주의적 기질을 탕진하게 된 것은 자유의 남용을 경험했기 때문이며 에드와르와 올리비에가 서로의 마음에 진실하게 된 것은 서로를 떠나 다른 사람과 맺어졌던 과거 때문이다. 에드와르는 자신이 썼던 소설들을 부정한 후에야 새로운 소설에 착수한다.
"인간 존재에서 일관성은 허영에 의한 집착과 자연스러움을 희생해서 성취되는 것이다. 인간은 바탕이 너그럽고 능력이 풍요할수록 변하기 쉽고, 과거로 하여금 미래를 결정짓게 하려고 하지 않는 법이다."
금욕적이고 얌전해 보이는 지드 소설의 주인공들은 늘 거부할 수 없는 악덕에 이끌려 방황한 후에야 제 자리를 찾아가고 지드가 높이 평가하고 애정을 기울이는 것은 결과가 아닌 그들의 방황이다. 지드는 스스로를 확신하는 이들을 믿지 않는다.

소설의 큰 줄기가 베르나르와 올리비에라는 두 젊은 친구를 따라간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청춘 소설로도 보이고 성장 소설로도 보인다. 물론 이들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인생을 깨우치는 뻔한 수순을 밟는 것은 아니다. 기득권과 확신으로 굳어버린 기성세대뿐 아니라 허영심과 냉소로 지탱되는 속물들의 사교계, 어른들을 모방하고 그들만의 위계질서와 룰로 지배되는 어린아이들의 세계까지 허위로 이루어진 세계는 연령과 상관없이 도처에 존재한다. 이들에게 잠식되지 않기 위해서는 구덩이에 빠지고, 상처입고, 벽에 부딪히고 때로는 조소와 손가락질에 시달리면서도 어느 곳에도 머물지 않고 부유하는 것이다.
"규칙없이 사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남이 주는 규칙도 원하지 않는다면 대체 어떻게 규칙을 세워야 할 것인가?"
타인의 규칙이 아닌 너 자신만의 규칙을 만들어라. 이것이 지드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일관되게 주장하는 요구이다. 당대 프랑스의 젊은이들은 지드의 열정과 쾌락으로 가득차 있으면서도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 이러한 목소리에 열광했다. 과연 오늘날에도 지드의 목소리가 울림을 가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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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평전 - 실존과 구원의 글쓰기 서강인문정신 16
이주동 지음 / 소나무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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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만 우리를 깨물고 찌르는 책을 읽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읽은 책이 주먹질로 두개골을 깨우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단 말인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는 재앙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 같은, 모든 사람에게서 추방된 것 같은, 자살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들이다.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

 

프란츠 카프카는 아마도 전세계와 전시대를 통틀어 가장 특별하고 미스테리한 작가중 하나일 것이다. 그의 소설은 리얼리즘 소설도 아니고 SF나 판타지같은 공상과학 소설도 아니며 인간의 심리나 의식의 흐름을 쫓는 소설도 아니다. 배경이 되는 공간과 시간은 현실도, 가상도 아닌 그 중간 쯤에 걸쳐져 있다. 주인공들은 뚜렷한 캐릭터없이 익명의 인물처럼 처리되며 사건 중심으로 기술되나 기승전결도 클라이막스도 없이 같은 유형의 사건들이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카프카 소설의 중심소재는 시스템이다. 법의 시스템, 성의 시스템, 형벌기계의 시스템. 시스템의 힘은 어떤 개성있는 인물도보다 강력하게 이야기를 끌고나간다.

내가 처음 카프카를 접할 때는 카뮈, 싸르트르와 같은 실존주의 작가로 인식했었다. 그러나 지금 읽어보면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현대 자본주의, 혹은 관료제 사회의 모습이 너무도 적나라하게 소설 속에 구현되고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카프카가 집필한 당시에는 상징적인 비유, 혹은 상상의 세계로 보였던 것이 지금은 가장 현실에 가까운 사실적 묘사가 된 것이다. 더구나 카프카는 단순히 미래의 사회를 보고 온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관료제가, 또한 자본주의가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를 누구보다 적확하게 고발하고 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카프카의 생애를 훑어보면 드라마틱한 구석은 어디에도 없다. 동구의 유대인이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가부장적인 아버지에게 압박감을 느꼈던 인물을 찾아본다면 열 트럭은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에게 선고를 내리는 판관으로 아버지를 지목하고 자신이 이렇게 음울하고 부정적인 인간이 된 이유를 아버지에게서 찾는 그이지만 사실 그의 아버지는 다소의 엄격함과 난폭함을 지닌 보통의 권위주의적인 사업가이다. 어느 가정이나 가질 만한 문제점이 카프카의 가정에도 있었고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었으며 직장에서도 카프카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심지어는 몸이 약한 그가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온갖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과묵하고 소극적인 그였지만 막스 브로트와 같은 헌신적인 친구들이 있었고 의외로 좋아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작가로서도 소소한 커리어를 쌓았고 성실하고 타일을 배려할 줄 아는 그를 존경하며 따르는 청년들도 있었다.

말하자면, 문제는 카프카 본인이었다.

그가 바로 성문의 열쇠를 쥐고 있었거나 혹은 그 자신이 열쇠였던 것이다.

그의 생애에서 조금이라도 남과 다른 특이한 점을 찾는다면, 카프카 자신이 스스로 〈문학기계〉를 자처했다는 점이다.

"아마추어가 영감을 기다릴 때, 우리는 그저 일어나서 쓰러 간다."는 말이 있다. 롤랑 바르트는 작가의 필수 요소로서 주저함, 성실성, 절제력 등을 꼽은 적이 있다. 카프카에게 가장 중요한 것, 그가 살아야 하는 이유는 오직 〈글쓰기〉였다. 소설이 써지지 않을 때는 일기, 편지등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썼고 심지어 죽기 직전까지도 메모를 남겼다. 밥을 먹는 것, 잠을 자는 것, 직장에 다니는 것등 그 모든 것은 오직 글을 쓰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결혼도 아이도 오직 글쓰기에 자신을 온전히 바치면서 포기한 그였다.

시대오 국경의 한계를 무의미하게 만들고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개의치 않고 넘나드는 그의 놀라운 소설들 - 괴물들이 여기서 잉태되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시작된 끝없는 소송, 자신의 고용주이나 접근할 수 없는 성, 어느날 자신을 사회에서 삭제시킨 벌레로의 변신, 창조주를 처형하는 형벌기계...

결코 열리지 않는 성문이 사실은 그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듯이 카프카의 소설들은 부조리한 사회를 고발하는 동시에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혼돈을 짚어낸다.

아이러니한 것은, 자신의 생활과 욕망까지도 병적으로 절제한 그의 금욕주의적인 글쓰기에서 가장 경이롭고 창의적인 상상력의 발현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소설이 미완성으로 끝난 것은 그의 완벽주의적 성격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카프카는 자신의 존재를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없는 세상의 모든 향락에서 제외된 〈문학기계〉로 규정했고 문장 하나, 단어 하나도 허투루 쓰여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적당히 결론을 내어 이야기를 매듭짓는 것은 더욱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소송이 끝나지 않을 것을, 성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을 카프카는 이미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거짓 결말을 지어낼 수가 없었다. 살아있다는 것의 고통과 부조리함이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카프카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 현실을 허구로 포장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그의 기괴한 소설들은 가장 강력한 리얼리즘 소설이 되었다.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본 자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카프카 평전」은 가장 작가다운 작가의 유형이 어떠한지를 보여준다. 글쓰기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이다. 모든 이가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지만 직시하려 하지 않는다. 카프카는 그 상자 안으로 가장 깊이 들어가 진실을 감정없는 기중기처럼 꾸준히 건져 올린다. 그의 글쓰기에는 요령이 없다. 그래서 그는 삶의 진실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다.

「카프카 평전」에서 아무리 카프카의 생애를 세세히 기술해도 카프카의 소설을 이해하기란 나의 능력으로 역부족이다. 그저 나는 카프카의 소설이 현실을 가장 가깝게 묘사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낄 뿐이다. 내가 살아가며 겪는 온갖 어리둥절한 일들이 모두 끝없는 소송, 들어갈 수 없는 성의 연속임을 말이다.

또하나, 「카프카 평전」은 왜 카프카가 위대한 작가인지를 알게 해 준다. 자신의 전생을 오롯이 문학에 바친 이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 주었는지를.

"작가는 인류의 속죄양이다. 그는 인간에게 죄를 죄없이 양유하도록 허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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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이상호 기자 X파일
이상호 지음 / 동아시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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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탄압이 횡행하는 시대라 그런지 우연찮게 기자가 쓴 책 두 권을 연달아 읽게 됐다.

시사인의 고발전문기자이며 인기 시사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의 멤버인 주진우 기자의 『주기자 (부제:주진우의 정통시사활극)』과 MBC 시사프로그램에서 맹활약했던 이상호 기자의 『이상호기자 X파일 (부제:진실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이다.

주진우 기자의 책 『주기자』는 제목과 부제에서 풍기는 느낌 그대로 경쾌하다. BBK, 친일파, 대형교회등에서 자신이 취재한 온갖 부정부패들을 당시의 기사와 숨겨진 이야기들을 통해 고발하고 있다. 책을 읽다보면 통쾌하면서도 우리 사회를 소수의 거대 권력들이 장악하고 있으며 그 권력들이 또한 긴밀하게 얽혀 하나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씁쓸하게 깨닫게 된다. 저자는 자신이 학창시절부터 문제아였다고 밝히며 자신이 정의의 사도로 비치는 것을 경계한다. 자신은 당지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것을 참지 못하며 그 더러운 성격 때문에 짱돌을 드는 것 뿐이라고.

골리앗에 맞서 짱돌을 치켜든 다윗이 또 한명 있다. 그것도 골리앗 중의 골리앗, 삼성에 맞서서다. 『이상호의 X파일』은 삼성이 정치권, 법조계등에 엄청난 비자금을 뿌리며 국가권력을 좌지우지하는 내용이 적나라하게 담겨있던 도청테이프에 대한 이야기이다. 『주기자』와는 달리 이 책에서는 삼성 X파일 사건 자체보다는 이를 취재하고 방송에 이르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이 담겨 있다. 여기서 기자는 거대권력뿐만 아니라 그보다 어찌보면 더 무서운, 짱돌을 들고 맞서기도 난감한 조직 내의 권력에 부딪힌다. 기자의 정당한 보도를 가로막는 이 암울한 사건이 MB정부가 아닌 참여정부에서, 더구나 최문순 사장 재임 중의 MBC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 읽는 이를 더 참담하게 만든다. 거대권력과 맞장뜨는 기자는 애써 호기로와질 수 있지만 자신이 속한 조직 내에서 선후배, 동료들과 대치하며 기자의 사명과 인간적 도리 사이에서 갈등해야 하는 기자는 한없이 소외될 수밖에 없다. 육체도 정신도 피폐하게 만드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 “기자의 초심과 직업적 본능”만으로 버티는 이상호 기자의 사투는 눈물겹다.

내부고발자들에게 많은 부분 의존해야 하는 언론에서 자기 안의 내부고발자를 비난하고 배격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일일까. 한국이라는 땅에서 제대로 된 기자로 살려는 이는 왜 이렇게 많은 희생을 치러야만 하는 것일까.

기자가 사건을 쫓는 한편의 활극같은 이야기를 듣다보면 마치 이들은 조직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러 나서는 탐정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현실의 이들은 카산드라에 가깝다. 사람들은 이들의 말이 진실임을 알면서도 외면한다. 결국 진실을 밝히려는 이들이 의지할 곳은 여론 뿐이다. 세상이 아무리 썩었다고 해도 조금이라도 남은 성한 부분을 찾아내 성원해주는 것이 독자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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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뿌리
로맹 가리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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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그 어떤 것에도 상관없이, 오직 코끼리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한 남자가 있다. 혹자에게는 광인, 또 어떤 이에게는 영웅이라 불리는 남자. 확실한 것은 광기에 가까운 그의 열정은 주변인들까지 전염시킨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작가 로맹 가리의 장편소설 『하늘의 뿌리』는 오직 아프리카의 코끼리 보호 하나만을 위해 투쟁하는 모렐과 그의 동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들을 묶어주는 것은 수용소와 전쟁터등에서 겪은 극심한 모멸감과 절망감, 외로움의 경험이다. 거창한 인류애도 개인적인 사랑도 아닌 그저 이 세상에서 코끼리를 지키려는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으로 모인 이들은 아프리카의 자연을 개발하고 지배하려는 식민 정부와 재미로 코끼리를 사냥하는 밀렵꾼들과 대치한다. 그러나 이러한 선과 악의 뚜렷한 구도보다 더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은 아프리카를 문명화를 통해 독립시키려는 반정부군과의 충돌이다.

“자연이 먼저냐 인간이 먼저냐”라는 논쟁은 한국에서도 낯설지 않다. 지율스님이 천성산 터널 공사를 반대했을 때 그를 지지하는 목소리만큼 “사람보다 도롱뇽이 중요하냐”라는 비난의 목소리 또한 거셌다. 환경파괴가 극심해지면서 개발 위주의 정책을 보는 시선이 예전만큼 곱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아직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인간 중심의 사고이다. 코끼리로 대표되는 아프리가클 서구처럼 문명화시키겠다는 바이타리의 주장은 서구중심적 사고라는 맹점이 있긴 하나, 가난과 질병에서 신음하는 아프리카의 독립과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어느정도 자연의 희생이 불가피할지도 모른다. 문명의 폐해에 대해 우려를 표시하면서도 문명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쉽게 따를 이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저자는 이런 민감한 질문을 제기하면서도 구체적인 답변을 내놓지 않는다.모렐과 그의 동료들은 답답할 정도로 “우리의 목적은 코끼리 뿐”이란 말을 되풀이할 뿐이다. 주인공 ‘모렐’의 이름이 ‘moral(도덕적인,윤리적인)’을 연상시키듯이 로맹 가리는 여전히 근원적인 문제에 머물 뿐이다. 성급한 결론을 내리기보다 원칙적으로 신중하게 접근하는 저자의 태도는 현명해 보인다. 마치 사형제가 어느 정도의 죄에 어느 정도의 벌을 내려야 하는지, 그 형벌이 어떤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를 따지기 전에 ‘인간이 인간을 죽인다는 것’에 대한 원론적인 문제제기가 필요하듯이 로맹 가리는 인간이 자신의 존엄을 지키지 못할 정도의 극한에 처했을 때 아주 생뚱맞은 것 - 코끼리, 딱정벌레, 상상 속의 여인 -을 지키면서 인간성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한다.

초원 위를 내달리는 코끼리가 모두에게 위안을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코끼리의 질주에서 위안을 받고 생의 희망을 찾은 이가 코끼리를 위해 전 생을 바친다고 할 때 또 어느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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