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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폐범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9
앙드레 지드 지음, 원윤수 옮김 / 민음사 / 2010년 7월
평점 :
"여기에 10프랑짜리 가자 금화가 하나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실제로는 2수의 값어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위폐라는 것을 알아내기 전까지는 프랑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르네 지라르는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주체가 자신의 욕망이 아닌 중개자의 욕망을 호방한다는 <삼각형의 욕망>으로 많은 소설들을 분석한다. 이는 단지 특수한 몇몇 이들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인간형의 형성과정을 보여주며 많은 근대소설에 등장하는 허위의식에 물든 속물들과 거짓된 인간관계를 조명하는 나침반 역할을 한다.
[위폐범들]의 등장인물들 역시 이러한 거짓된 허위의식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지드는 이를 실제의 가치를 지니지 못한 위폐에 대한 욕망에 비유한다. 이를 좀더 확장시키면 화폐가 지닌 가치라는 것 자체에 의문이 든다.
과거에 우리는 1,000원의 돈으로 충분히 과자를 살 수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1,000원으로는 과자 하나를 사기도 어렵다. 쵸코파이는 러시아에서나 한국에서나 같은 맛을 가지지만 원화는 외국으로 나가면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덧붙여 위폐라 해도 그것이 위폐라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되기 전까지는 위폐는 충분히 화폐의 역할을 하며 유통될 수 있다.
화폐가 스스로 항구적이고 자생적인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는 것, 사회적인 약속에 의해서 변동되는 가치만을 지닌다는 것은 화폐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결국 모든 화폐는 위폐적 성격을 가지며, 모든 인간은 위폐범들인 것이다. (읽어보지 못했으나 [타고난 거짓말장이들]이라는 책에서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적든 많든 거짓말은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듯이.) 이를 다시 소설로 옮겨와 적용시키면 위폐범들의 왜 방황하고 무엇을 고민하는지도 어느정도 감이 잡힌다.
"마치 누구나 조금은 진심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연극을 하는게 아니기나 한듯. 이 친구야, 인생은 희극에 불과한 거야!"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파사방, 릴리앙, 뱅상, 조르쥬처럼 위폐를 화폐와 동등하게 취급하고 이를 이용해 인생을 즐기는 이들. 이들에게 진실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기에 그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무의미하고 불필요하며 우스운 일이다. 이들에게는 현재만이 존재하며 모든 것이 말장난이고 어떤 심각한 일이든 비웃어버리는 것이 재치있고 세련된 태도로 여겨진다.
그리고 반대편에 에드와르, 베르나르, 올리비에등의 다른 위폐범들이 있다. 이들에게는 자신이 가진 화폐가 위폐인지의 여부가 가장 큰 고민거리이다. 그래서 이들은 끊임없이 방황하고 회의하고 질문하며 진실된 가치를 찾는다. 그런 모든 노력이 의식적이었건 무의식적이었건, 너무나 순수해서였건 허세나 질투에 의해서였든 결국 진실이 아닌 허위였다는 사실에, 인간은 본질적으로 위폐범이라는 사실에 이들은 또 끊임없이 절망한다.
사랑하는 이에게 오히려 수줍음과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진심을 전달하지 못하고 호의를 베푼 것이 오히려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고 선의에 의한 행동이 파국으로 귀결되는 등 허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부조리한 결과를 낳곤 한다. 용기와 기력을 잃고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이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마저 부정하기도 한다.
"하느님이 즐긴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알아. 하느님이 우리에게 시키는 일을 우리 뜻대로 하고 싶어서 한 것처럼 믿게 하고 하느님은 재미있어 한단 말이야."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언행이 완전한 진실에 도달할 수 없고 자유의지에 의한 것도 아니라면, 즉 우리의 모든 언행의 동력이 타인에의 질투, 허위의식, 또는 허영심에 의한 모방에 불과하다면 우리에게 삶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일까? 그저 모든 가치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냉소하며 현재를 즐기거나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는 게 나은 것일까?
여기 집으로 돌아온 탕아가 있다. 집에서는 그를 환대하고 동생은 그를 질투한다. 그리고 동생이 탕아가 거쳐온 죄악의 길을 떠나려 할 때 탕아는 그를 말리지 못한다. 진실에 도달하려면 오욕의 길을 거쳐야 함을 알기 때문이다.
지드의 소설 [탕아 돌아오다]에 나오는 탕아는 [위폐범들]의 베르나르를 연상시킨다.
자신의 작품까지 믿지 못하고 끊임없이 다른 길을 모색하는 에드와르, 모든 것에 반항하다가 결국은 자신의 반항에 반항하며 길을 찾는 베르나르, 너무도 섬세하고 순수해 오히려 쉽게 악덕에 빠지기도 하는 올리비에 등 작가가 선호하는 인간형은 분명하다.
작가가 파사방,뱅상,조르쥬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이들이 허위로 가득 차 있어서라기 보다는 이들이 자기확신에 빠져 그 속에 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애정을 보이는 이들도 허영심과 질투로 인해 무분별한 실수를 범하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나 그러면서도 이들은 부단히 더듬거리며 탐색을 계속한다. 베르나르가 무정부주의적 기질을 탕진하게 된 것은 자유의 남용을 경험했기 때문이며 에드와르와 올리비에가 서로의 마음에 진실하게 된 것은 서로를 떠나 다른 사람과 맺어졌던 과거 때문이다. 에드와르는 자신이 썼던 소설들을 부정한 후에야 새로운 소설에 착수한다.
"인간 존재에서 일관성은 허영에 의한 집착과 자연스러움을 희생해서 성취되는 것이다. 인간은 바탕이 너그럽고 능력이 풍요할수록 변하기 쉽고, 과거로 하여금 미래를 결정짓게 하려고 하지 않는 법이다."
금욕적이고 얌전해 보이는 지드 소설의 주인공들은 늘 거부할 수 없는 악덕에 이끌려 방황한 후에야 제 자리를 찾아가고 지드가 높이 평가하고 애정을 기울이는 것은 결과가 아닌 그들의 방황이다. 지드는 스스로를 확신하는 이들을 믿지 않는다.
소설의 큰 줄기가 베르나르와 올리비에라는 두 젊은 친구를 따라간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청춘 소설로도 보이고 성장 소설로도 보인다. 물론 이들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인생을 깨우치는 뻔한 수순을 밟는 것은 아니다. 기득권과 확신으로 굳어버린 기성세대뿐 아니라 허영심과 냉소로 지탱되는 속물들의 사교계, 어른들을 모방하고 그들만의 위계질서와 룰로 지배되는 어린아이들의 세계까지 허위로 이루어진 세계는 연령과 상관없이 도처에 존재한다. 이들에게 잠식되지 않기 위해서는 구덩이에 빠지고, 상처입고, 벽에 부딪히고 때로는 조소와 손가락질에 시달리면서도 어느 곳에도 머물지 않고 부유하는 것이다.
"규칙없이 사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남이 주는 규칙도 원하지 않는다면 대체 어떻게 규칙을 세워야 할 것인가?"
타인의 규칙이 아닌 너 자신만의 규칙을 만들어라. 이것이 지드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일관되게 주장하는 요구이다. 당대 프랑스의 젊은이들은 지드의 열정과 쾌락으로 가득차 있으면서도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 이러한 목소리에 열광했다. 과연 오늘날에도 지드의 목소리가 울림을 가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