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일곱째를 낳았어요 샘터어린이문고 41
김여운 지음, 이수진 그림 / 샘터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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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게 자판을 놀리고 있는 내 옆에 초등학교 5학년인 둘째가 슬쩍 다가온다. 그리고 무료한 듯 뒤척이다 책상 한 켠에 쌓아둔 책더미 속에서 책 한 권을 쓱 빼가더니 뒹굴거리며 읽기 시작한다.
 
"키득 키득.... "
 
워낙 감정 표현을 잘하는 아이라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그마음 그대로 표현한다. 정신없이 일에 빠져 있는데 몇 장을 넘겨 읽다가,
 
"엄마, 이 책 재미있어!"
 
그런다.
 
"인쇄소집 아빠가 딸이 여섯인데 딸을 많이 나을 줄 알고 이름을 미리 지어뒀대. 이름이 '동서남북가나다' 순서로 동희, 서희, 남희,,,, 이렇게 희'자를 붙여서. 북만 '북희'가 이상해서 '복희'라고 지었대. 웃기지. 킥킥"
 
한참 바쁘게 몰두하다 멈칫하고 들으니 신선하고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책을 읽지 못하고, 제목과 표지만 보았던 터라 도대체 어떤 얘기가 들어 있을 지 감이 잡히지 않았었다. 바쁜 일 끝내고 얼른 읽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둘째가 선수를 치더니 더 궁금하게 만들어 버린다. 
 
책장을 펴고 읽어 내려 가는데 좀처럼 잘 안 읽히다. 상상력 부족은 여지없이 책장을 넘기는데 벽에 부딪치게 한다. 정경과 상황 묘사가 구체적이어서 장면을 상상하면서 읽어 내려가려니 어린이책임에도 속도가 더디게 난다. 인쇄소 풍경, 가족들의 모습, 마을의 모습....
70년대 쯤 되는 도시 외곽의 마을에서 내리 여섯 딸을 낳은 인쇄소집 사장 용팔이 이제 막 세상에 나올 일곱 째를 기다리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예상되는 것처럼 일곱 째는 역시 '딸'이다.
 
여기까지 읽으면 TV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아선호 차별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물론 사건 발단의 배경은 거기서 출발하지만, 진짜 사건은 용팔의 친구가 건넨 어려운 부탁에서 비롯된다. 딸이지만 자식복 많은 용팔과는 달리 아이들 학교의 선생님이자 용팔의 손윗 친구인 여운봉 선생님은 슬하에 자식이 없다. 인력으로는 할 수 없어 안타까운 것은 딸만 내리 낳는 용팔이나 아이를 애타게 기다려도 생기지 않는 여운봉 선생님이나 매한가지 일 것이다. 그들 뿐이 아니다. 동네 식당 할머니의 사돈 동네 사는 이는 '아들'만 여섯이란다. 그 집은 일곱째는 반드시 '딸'이어야 한단다. 모두 안타까운 사연이지만 그들이 직접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단지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밖에는.
 
그럼에도 그들은 인간의 힘으로 그 '운명'을 바꿔보려 한다. 사실 용팔은 딸이라 실망해서라기 보다 자식이 주는 행복을 느껴보지 못한 친구의 아픔에 대한 마음이 더 컸을 것이다. 그리고 실망감으로 거나하게 먹은 술이 그 동정심을 현실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여기까지 읽고 나니 생각했던 것보다 꽤나 무거운 주제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쉽게 볼 수 없는 칠공주의 알콩달콩한 얘기일 것이라 예상하며 가볍게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점점 무거운 돌덩어리가 가슴을 내리 누르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둘째 서희. '차진데기'라는 별명 그대로 빼앗긴 동생을 되찾아 오기 위해서 어린 아이다우면서도 야무진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언니의 지휘하에 대동단결하여 아빠가 바꾼 일곱 째의 '운명'을 다시 바꾸려 한다.
 
 
처음에는 재미있게 느꼈지만 생각해보면 '동서남북가나다....' 이름에는 '나'와 관련된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단지 아빠가 많은 딸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지은 순서에 불과한 것이다. 그 속에서 무지개처럼 각기 드러나는 개성이란 없다. 그들은 아들을 비껴서 어쩌다 태어난 여러 딸들 중에 하나일 뿐이다.
 
이러한 가족 중심의 가치관에 작가는 과감히 반기를 든다. 여섯 딸의 각기 뚜렷한 장점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각기 꿈틀대는 특성과 개성이 있음을 작가는 책 곳곳에서 밝히고 있다. 특히 손이 많이 가는 인쇄소 일을 돕는 딸들의 장기를 일일이 열거할 때는 무리 속에서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서로 다른 특성들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동희는 조판을 곧잘 해요. 조판은 활자와 공목, 괘선을 넣어 서식과 똑같은 판을 짜는 거예요. 인쇄 일을 오래한 기술자가 하는 일인데 눈썰미가 있는 동희는 곁눈질 3년 만에 일류 기술자 못지않게 솜씨가 좋아졌어요.
둘째 서희는 채자와 입자를 잘합니다. 채자는 인쇄에 필요한 활자를 골라내는 일이고 입자는 활자를 제자리에 꽂는 일을 말해요. 워낙 책 읽는 걸 좋아하다 보니 글자랑 친한가 봐요. 활자판의 촘촘한 칸에 있는 수많은 글자가 어디에 있는지 다 외워요. 수십 개의 활자도 제자리에 금세 뚝딱 꽂아 넣는답니다.
셋째 남희는 해판을 잘해요. 조판을 하고 인쇄를 마치고 나면 활자와 공목, 괘선을 해체하는 걸 해판이라고 해요. 꼼꼼하고 정확한 남희는 각각의 규격에 맞추어 제자리에 딱딱 정리해 넣지요.
넷째 복희는 어린 동생들 데리고 노는 걸 잘해요. 언니들이 가게 일을 도울 때 훼방 놓지 않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일이지요." ---p.29~30
 
 
일곱번 째 딸을 낳은 일과 맞물려 예상치 못하게 발생한 사건. 그리고 일곱빛깔 무지개처럼 각기 다른 개성과 장기로 해결해나가는 모습을 통해 작가는 일곱 명의 인쇄소집 딸이 아니라 각각이 세상의 둘도 없는 소중한 '존재'임을 역설하고 있다.
 
딸 셋 중의 셋째....나 역시 딸만 있는 집의 딸로 주위의 아쉬운 소리를 귀가 따갑도록 듣고 자랐다. 그리고 지금은 두 딸의 엄마가 됐다. 지금은 인식이 많이 바뀌어 주위의 아쉬운 소리를 거의 듣지 않는다. 아이들에게는 당연히 잘못된 출생이라는 멍에도 없다. 단지 자매일 뿐이고, 남자 형제가 없을 뿐이다. 잊고 있던 상처가 건드려지는 것 같은 씁쓸한 아픔을 느끼는 나와는 달리 둘째의 모습은 해맑기만 하다. 물론 슬픔이야 느꼈겠지만 이내 아이들 특유의 장난스럽고 유쾌한 모습으로 감정이 옮아간 듯 하다. 환영받지 못한 막내의 슬픈 출생에 대한 공감은 오롯이 내 몫인 듯 싶다.
 
책의 말미에 실린 '글쓴이의 말'을 보니 역시 여덟 남매의 둘째인 저자 자신의 이야기가 기반이다. 마지막에 그럼에도 씩씩하게 일어서는 아빠의 모습이 짠했는데, 극중 인물과 동일인은 아닐 지라도 실제에서는 막내 아들을 보신 것 같아 많이 기쁘셨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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