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R. 에비슨 - 한국 최초의 의사를 만든 의사 샘터 솔방울 인물 12
고진숙 지음, 안재선 그림 / 샘터사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샘터솔방울 인물] 시리즈를 읽은 것은 이번이 세 번째이다. 간송 전형필, 고고학자 손보기에 이어 만나게 된 인물은 [한국 최초의 의사를 만든 의사 올리버 R.에비슨]이었다.
솔방울 시리즈의 책들이 워낙 알려지지 않은 우리 사회의 숨은 보배같은 분들을 찾아서 소개하기 때문에 누군지 모르는 것이 이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올리버,,,,누구? 정말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한국 최초의 의사를 만든 의사'라는 부제를 봤을 때는 분명 우리나라와 연관이 깊은 인물인데 너무 생소한 이름에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구한말에 우리나라에 선교사가 많이 들어와서 교육과 의료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의 연세대학교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세운 '언더우드' 정도나 학교 다닐 때 국사 시간에 배워서 겨우 알까,,,'에비슨'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한국 최초의 의사를 만든 의사'라는 부제가 말해주는 그의 주된 활동에 '글쎄,,, 의사를 길러낸 교수가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최초'라는 것이 의미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의학을 배워 의사가 되고, 제자를 길러내 의사로 만들어내는 일은 어쩌면 당연하고, 평범해 보였던 것이다.
이런 의심을 가지고, 그럼에도 솔방울인물시리즈에서는 처음 나오는 외국인이니 만큼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책장을 넘기며 읽어 내려갔다.
 
첫 장을 막 넘기는데,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올리버 R. 에비슨의 운영 방침'이 그것인데, 범상치 않은 운영방침이 약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지만 그가 어떤 신념과 철학으로 병원을 운영하고, 환자를 대하는 지 그의 인물 됨됨이를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런 궁금함을 잔뜩 안고 페이지를 넘기니 박형우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동은의학박물관장의 추천사가 보인다. 그리고 간략하게 나마 올리버 R. 에비슨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소개를 해준다.
 
"의사이자 교육자였던 올리버 R. 에비슨은 캐나다 토론토에서의 부와 명예가 보장된 자리를 과감하게 버리고, 가난하고 병들어 있던 조선에서 42년을 지내며 한국의 서양 의학과 고등 교육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의 96년 일생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았던 곳이 바로 한국이었지요.
그리고 1935년 12월, 올리버 R. 에비슨이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한국을 떠나던 날, 기차역 플랫폼에는 약 8백여 명의 사람들이 나와 그를 배웅했습니다. 도대체 올리버 R. 에비슨은 어떤 인물이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요?
제중원의 책임자이자 고종의 시의이며, 한국 최초의 콜레라 방역 사업의 책임자이자, 한국 최초의 현대식 병원인 세브란스병원을 설립한 사람.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 병원 의학교 교장을 겸직하며 오늘날 연세대학교의 기틀을 마련하고, 한국 최초의 면허 의사 7명을 길러 해 낸 사람. 올리버 R. 에버슨은 이처럼 훌륭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지요." --- 9p 추천사 中
 
이 부분을 읽을 때 만해도 우리 나라에 와서 앞선 기술을 가진 서양 의학과 학문을 전해주었던 인물이구나. 그리고 고국에서의 편안한 생활을 뒤로 하고, 가난한 나라에 와서 헌신을 했었구나 정도의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책을 읽어 내려가면 갈수록 그가 한국이라는 불모지에서 하나의 밀알을 싹트게 했던 과정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으며 긴 여정이었는지 마음을 졸이고 몰입하면서 읽게 된다. 뭉쳐진 눈덩이가 굴러가면서 커지기는 쉬워도 처음에 단단히 뭉치는 과정은 힘든 것처럼, 아무 것도 없는 제로 상태에서, 심지어 자금도, 인식도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신념 하나로 일궈 낸 결과는 그야말로 놀랍기 그지 없었다.
 
어려서부터 무엇이든 열심히 배우고, 최선을 다했던 그는 열악한 약방 수습생에서 최고의 부와 명예를 누리는 의사, 그리고 의과대학 교수의 자리까지 올랐다. 물론 재능과 능력도 중요하지만 배우고자 하는 열망과 주변의 조건에 개의치 않고, 열과 성의를 다했기에 가능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화려하고 편안한 미래가 보장된 캐나다의 생활을 접고, 에비슨은 돌연 동양의 작고 가난한 나라 '조선'으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언더우드'와 만남이 그의 나머지 인생의 방향을 바꿔버린 것이다.
 
"지금 조선에는 의술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이들을 위해 세워진 왕립 병원도 담당 의사이던 헤론이 최근에 세상을 떠나면서 빈 병원이나 다름없게 되었습니다."
...중략 ...
"우리가 도움을 준다면, 조선의 어린아이들을 죽음의 위험에서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p43
 
의과대학 후배였던 언더우드에게 들은 조선의 의료 현실과 그의 간곡한 부탁은 결국 에비슨을 조선으로 떠나게 한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그의 남다른 철학이었다. 한 끼의 식사를 주는 것은 당장의 배고픔을 면하게 해주고, 생명을 연장 시킬 수는 있지만 때가 되면 또다시 도움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스스로 먹을 것을 찾고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면 시간이 지나도 도움은 필요 없을 것이다. 에비슨은 이러한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에비슨은 왕립 병원을 채울 한 명의 의사가 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토록 의사가 필요하다면, 낯선 땅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의사가 가는 것보다 의학교를 만들어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편이 현명하지 않은가?'  ---p44
 
캐나다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온 경험이 있는 에비슨이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조선에 서양 의학이라는 인식이 생기기도 전이니 사상, 언어, 문화가 판이한 곳에서 서양 의학교를 세워 조선인 의사를 키워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마 그때는 몰랐을 것이다.
 

 조선인 '의사'를 키우겠다는 결심을 하며 조선의 한성에 발을 내디딘 에비슨은 말이 좋아 왕립 병원이지 낙후된 의료 시설에 약품도 거의 갖춰져 있지 않은 단층짜리 건물 달랑 한 채가 고작인 '제중원'의 책임자를 맡게 된다. 처음 그가 품었던 꿈에 비해 현실은 너무나도 열악했다.
 
'하지만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나는 왜 조선에 들어왔는가?'
에비슨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곳은 앞으로 그가 일할 곳이었습니다. ---p51
 
스스로에게 던지는 이 질문이 바로, 에비슨이 아무리 힘든 역경이 생겨도, 아무리 시간이 지연되어도 포기하지 않고, 한발 한발 나아가 끝내 원하는 목표를 이루어낼 수 있었던 힘이었을 것이다.
 
실망감도 잠시 에비슨은 썩은 관리들 때문에 더 열악해지던 제중원을 사업수완을 발휘하여 백성들이 더 많이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가 하면,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던 콜레라의 방역을 확대해 피해를 최소화하는데에 기여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콜레라는 쥐가 발을 통해 환자 몸속으로 들어간 뒤 배 쪽으로 올라가면서 갉아 먹는다고 여겨 집집마다 고양이 그림을 붙여 놓을 정도로 세균과 질병에 대해서는 무지하던 때였다. 사람 목숨을 앗아갈 정도의 위력을 가진 콜레라를 끓인 음식을 먹고 청결하게만 하는 것으로도 예방가능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쉽게 믿을 수 있었을까?
그럼에도 에비슨은 포기하지 않았다. 에비슨은 굉장한 전략가였다. 어쩌면 결코 이뤄낼 수 없을 것 같았던 모든 일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열정 못지않은 그의 뛰어난 전략이 있었기에 가능했었을 것이다.
콜레라 방역에 있어 그가 주목한 것은 바로 '한글'이었다. 세종대왕이 자신의 정책을 백성들에게 보다 쉽게 전파하기 위해 글자를 만들어 보급했던 그 '한글'의 위력을 400년 후 외국에서 날라 온 외국인이 알아보았던 것이다. 전략은 대성공하여 한 번 발병하면 40만 명의 사망자를 내던 콜레라의 피해를 만 명 정도로 최소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노력한 결과 국가에 '백정'에 대한 신분 철폐를 요구하고 답을 얻어낼 만큼 그의 영향력은 커져 갔다. 이렇게 한발 한발 전진하던 에비슨은 드디어 처음에 조선에 오면서 생각했던 일을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한다.
 
"조선인을 의사로 키운다고요? 그건 절대 불가능합니다."
 
반발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렇다고 포기할 그도 아니다.
 
"우리도 처음부터 의사였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조선 사람들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훌륭한 의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에비슨은 몇 년이 걸리든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르든 철저하게 교육받고 훈련받은 의사를 만들고 싶었습니다.---p97
 
그리고 마침내 5명의 학생을 모아 의학교 수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벽에 부딪치게 된다. 바로 '언어' 문제였다. 에비슨과 겨우 말이 통할 만큼의 영어 실력을 가진 이들이 영어로 된 원서를 공부하는 것은 거의 공포에 가까웠다. 점점 하얗게 질려가는 학생들을 보면서 에비슨은 다시 고민에 빠진다.
 
그리고 다시 주목한 것이 바로 '한글'이었다.
 
"이 교과서는 한글로 만들 것이네. 그리고 그것으로 조선 사람들이 공부할 것이네. 한글 교과서는 조선이 스스로의 힘으로 의학 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일세."
 
에비슨은 훗날 제자가 된 한자와 영어 실력을 두루 갖춘 김필순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결국 길고 긴 노력 끝에 1906년, 마침내 국내 최초 우리말 해부학 교과서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나라 의학생들에게 한줄기 빛과 같았습니다.
'수십 년이 걸릴 거라던 의학 수업을 앞당겨 놓은 힘.'
그것이 한글 교과서의 위력이었습니다. 모든 문명을 받아들이는 가장 훌륭한 도구가 언어라는 것을 이해한 에비슨의 뛰어난 혜안이 낳은 또 하나의 기적이었습니다." ---p107~108
 

그 이후 돈 한 푼 없이 시작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병원인 '세브란스 병원'을 건립해내는가 하면 남녀의 내외가 뿌리깊던 당시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간호사 2명을 배출해내기도 했다.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인가 싶겠지만 남자 환자들을 돌볼 수 있는 일을 하기로 결정한다는 것은 당시만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그 첫걸음에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그가 설립한 의학교는 7년 간의 긴 여정을 마치고 7명의 졸업생 배출을 앞두게 되었다. 에비슨은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든 과정을 보내온 제자들에게 국가에서 공인한 의사 면허를 주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는 일제 강점기였다. 에비슨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통감부가 이를 수락할 지는 미지수였다. 그러나 에비슨은 잠시 고개를 숙이기로 결심한다.
 
"나 한 사람이 머리를 숙인다면, 조선 사람들은 서양식 의사 7명을 얻게 될 것이오." ---p147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알았던 에비슨은 통감부를 찾아가 정중히 부탁을 했고, 1908년 6월 3일 마침내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 7명에게 개업을 할 수 있는 의사 면허가 발급되게 되었다. 
 
 
졸업식 전날, 에비슨은 제자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할 지를 물었다. 이 질문에 제자들은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고 한다. 
 
"예전에 저희들은 생활에 쪼들리다 보니 언제 의사가 되어 돈을 벌 수 있을까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저희가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교장 선생님 덕분이며, 그에 보답하는 길은 여기 병원에 남아 후배들을 가르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에비슨은 가슴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용솟음쳐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오! 내가 그동안 키운 사람들이 7명의 의사인 줄 알았더니 그것이 아니었구나. 참다운 인격자들이 만들어졌구나!'
 
그것은 에비슨이 낯선 땅 조선에 들어와 심은 한 알의 밀알이 남긴 결과였습니다.  
--중략-- 
그 후 7명의 졸업생들은 조선 사람들의 건강을 돌보고 조선인 의사를 키워 내는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고, 모두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습니다." ---p153
 
이 부분을 읽을 때면 이제 그는 더이상 외국인이 아니었다. 다른 학문과는 달리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일이기에 더 많은 시간이 걸리고, 언어와 교육이 다르기에 장벽은 더 높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그 힘든 과정을 이끌어오면서 '의사란 무엇인가?' '의사는 어떤 마음으로 환자를 대해야 하는가?'라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긴 시간 생활고에 시달렸으면서도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 보았던 제자들에게 '의사'가 결코 생업의 수단이 될 수 없었음은 당연한 것일 것이다. 제자들 모두 후배를 양성하거나 나라를 위해 독립 운동을 하게 된 것도 모두 이러한 스승의 보이지 않는 가르침의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은 둘째가
 
"엄마, 무슨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일을 했어?"
 
라며 놀라워한다.
 
그렇다. 42년 동안 정말 한 사람이 해냈다고 하기에 믿기지 않을 정도의 굵직한 일들을 많이도 해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큰 일을 꼽으라고 하면 단연코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진정한 의사'를 키워낸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부제가 왜 '한국 최초의 의사를 만든 의사'였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고, 공감을 하면서 고개가 저절로 끄떡여졌다.
 
그가 없었다면 우리나라 의술은 한참 뒤쳐졌을 지도 모른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사명감 하나로 힘든 과정을 묵묵히 이겨내 준 에비슨에게 진심으로 감사와 존경을 표하고 싶다.
 
책을 읽은 아이가 다시 묻는다.
 
"그런데 왜 이 사람은 역사책에 안 나와?"
"..."
 
이제라도 세상에 소개되어 이렇게 한 사람, 두 사람의 가슴에 울림을 주고, 감사의 마음을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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