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자의 야간열차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8
다와다 요코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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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의야간열차 #다와다요코 #문학동네 #북스타그램 #책스타그램

아주 독특하게도 독일로 이주한 일본인 작가의 독일어 소설, 이주할 때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독일로 넘어간 경험이 그녀의 큰 문학적 자산이라고 한다. 이 소설 제목 역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야간열차, 게다가 '용의자'와 '야간열차'의 일본어 발음이 비슷하다는 점이나 책장 곳곳의 유럽 풍경 속 동양적인 속담과 묘사들까지 일본과 독일 사이 어딘가를 부유하는 작가의 정신세계를 짐작케 한다.

모국어의 세상을 떠나 후천적으로 노력한 외국어로만 통하는 세상으로 이주한 사람, 특히나 언어를 섬세하게 다뤄야 하는 작가라는 건 어떤 느낌일까. 몽롱한 정신으로 야간열차를 타고 덜컹거리며 낯선 지명들을 거쳐 낯선 사람과 소음에 시달리는 삶, 대화란 것도 그저 표피만 훑는 부정확한 이야기뿐 깊고 길게 이어지지도 못한다. 게다가 삶의 공간으로 표현된 열차란 건 비행기와 비교해 곧잘 파업과 고장과 스케줄 오류로 혼란에 빠지곤 하는 빈티지의 산물. 상큼한 직선이 아니라 이리저리 더듬고 구겨지며 겨우겨우 도착점에 가닿는 듯하다는 게 그녀의 마음이려나. 지치기도, 피곤하기도 하겠다.

재미있게도 작중 화자는 '당신'이다. 당신은 기차표를 샀고, 당신은 커피를 마셨다, 이런 식이다. 자신에 대해 묘사하고 있음이 분명함에도 시종일관 스스로를 한발 뒤에서 거리를 둔채 관찰하는 듯한 태도, 그건 자신의 '나와바리'가 아닌 곳을 장기체류하는 여행자의 자신없음, 혹은 다소 무책임한 홀가분함의 반향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지치고 피곤한 타지생활임에도 그만큼 힘빼고 긴 여행인 양 다니고 있다는 자세인 걸까. 어차피 삶은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하는 긴 여행이라니 그 과정을 기차여행으로 응축시킨 작품속에서 굳이 무거운 생활인일 필요는 없겠다. 그게 굳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비애일 필요 역시 없겠고.

그러고 보면 꼭 이 작가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욜로, 메멘토모리, 한번뿐인 삶의 유한성과 무가치함을 짚는 단어들이 그 어느 때보다 방랑하는 삶을 소환하는 때다. 디지털노마드니 니트족이니 워라벨이니 하는 건 그렇게 무거움과 비애 사이에서 여행하듯 경쾌하게 줄타기를 해보려는 각자의 자구책인 게다. 야간열차와 그 안에 실린 삶들은 그렇게 너와 나의 기차역을 지나 마지막 챕터 제목처럼 '어디에도 없는 마을'을 향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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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6
알베르 카뮈 지음, 이기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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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 #이방인 #문학동네 #책스타그램

뫼르소가 독방에서 우연히 찾아낸 신문조각 속 사건 기사가 눈에 밟혔다. 이는 마치 이방인 전체 이야기의 모티프와 같은 소설 속 소설로 읽히기도 한다. 문장 하나와 하나 사이에 무려 25년이 점프하는가 하면, 한 문장으로 살해하고 돈을 털고 시체를 유기하는 내용을 욱여넣었다. 무엇보다도 '장난삼아' 행한 일 하나 때문에 이 모든 비극이 초래되었다는 대담한 함축, 그건 꼭 '태양 때문에' 총을 발사했다는 뫼르소의 이야기 중 한 버전과 같다.

이방인, 혹은 이인의 1부와 2부는 뫼르소가 겪은 같은 사건을 다른 시각으로, 다른 호흡으로 다룬 두가지 버전이라 해도 될 거다. 불연속적이고 혼란스러우며 쉼없이 변화하는 감정선을 따른 뫼르소의 내면을 투명하고 객관적으로 묘사한 게 1부라면, 그 결과값인 행동간의 인과와 논리를 상식과 당위에 맞게 부여하는 것이 2부. 어머니의 죽음과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시고 바다 수영을 하거나 연애를 시작한 등의 개별 사건들이 '그리고'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의 고리로 엮여 스토리를 만든다. 그게 인간이 타인과 사건을 이해하고 판단하며 단죄하는 유일한 접근법이다.

2부에선 사실상 뫼르소란 사람이 존재하는 대신 사람들이 재구성한 스토리만 존재한다면, 엄밀하게 1부는 스토리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뫼르소의 내면에 대한 자동기술과 뚝뚝 끊어지는 사변들. 인과와 선후가 명료하지 않고, 뫼르소는 시종일관 자신은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하고 구별짓지도 못한다는 점을 감지한다.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인 그에게 삶은 그저 어제와 내일 사이의 감각일 뿐. 그게 뫼르소가 이방인이란 의미, 사람이 사람에게 이방인이란 의미일지 모른다. 그런 뿌옇고 몽롱한 혼돈 속에서 타인을, 사람을 이해하려거나 보다 실제에 가깝게 묘사하려는 사람은 법정에 나선 그의 친우들과 같이 외마디 감탄사나 눈빛 밖엔 가진 게 없다.

한편으론 사실 같지가 않지만, 또 한편으론 당연지사였다는 게 뫼르소가 이 신문기사에 대해 내린 결론. 그리고 조금은 당해도 싸다고 생각했단 건, 어쩌면 그 시간과 인과를 넘나들고 구축하는 문장과 문장 사이를 뛰어다니는 삶에 대한 두려움을 표한 걸까. 알 수 없다. 그의 감정과 문장 사이, 문장을 사이에 둔 나와 그 역시 그만큼의 거리가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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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1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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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의 신ㅡ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순교, 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굉장히 사람을 숙연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누군가의 죽음이 여하간에 대의를 위한 죽음으로 포장되는 순간, '순교'로 불리우는 순간 더이상 그 죽음의 전후 맥락을 따지거나 정확한 팩트를 판별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 되고 만다. 심지어는, 그렇게 죽어간 사람이 어떠한 고민과 생각을 거쳤고 어떤 죽음을 맞았는지조차도.

고은 시인 이전에 한국계 작가가 이미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른 적이 있었는지는 몰랐다. 김은국이란 작가, 함경도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한국전쟁때 해병대 근무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그의 프로필이나 이 책의 심상찮은 제목 '순교자'를 보고 처음에는 꽤나 거부감이 생겼더랬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기독교도의 시각으로 본 미국, 남한 만세 이야기인가 했다.

'그래, 언제 이 병신같은 전쟁놀이를 그만둔다지?'
'전쟁은 천지창조 이후 계속되어온 거 아닙니까?'

아니었다. 그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이 전쟁 역시 짐승같은 국가들과 썩은 정치인들 사이의 눈먼 권력 투쟁이 빚어낸 구역질나는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미 죽었고 앞으로 죽어갈 수많은 사람들은 정말이지 개죽음이며, 무고한 제물로 희생된 것이며 냉혹하고 치밀하게 계산된 국제 정치 무대에 꼼짝없이 붙들린 죄없는 볼모들이다'라는 거다.

한국전쟁에 대해 이토록 냉정한 평가, 그리고 뜨거운 평가는 꽤나 인상적이다. 그렇지만 더욱 강렬한 건 정작 이 다음이다. 그러한 배경 하에서, 주인공 이 대위는 갈등하고 있다. 빨갱이들에게 죽은 열두명의 목사와 살아남은 두명의 목사, 그 생사의 스토리에 얽힌 진실이 무엇이던간에 '순교'의 금칠을 하려는 군대와 기독교인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다.

'목사들의 신성한 복장 밑에 더러운 속옷이 숨겨져 있었다고 폭로하기보다는 열두 명 순교자들의 영광을 드러내어 보이는 것이 자네들 기독교에 더 큰 봉사가 되지 않는가?'

그런 금칠을 단순히 사기극이라고 치부할 건 아니다. 군인은 지켜야할 국가와 그 명분이 있는 거고 목사도 또한 지켜야할 교회와 교회의 명예가 있는 거니까, 전면전의 상황에서 그런 둘의 이해 관계나 목적은 굉장히 단단하고 뚜렷하며 현실적이다. 거기에 대고 진실은 모두가 알아야 한다느니, 순교자는 하나님의 뜻에 봉사하는 거지 인간의 일시적 필요로 만들어져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 물론 옳지만 다소 한가한 소리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열두명의 목사가 끝까지 종교적 신념과 신앙을 지키며 죽었건 아니면 서로 헐뜯으며 살려달라고 애걸하다 죽었건, '목사들의 신성한 복장 밑에 더러운 속옷이 숨겨져 있었다고 폭로하기보다는 열두 명 순교자들의 영광을 드러내어 보이는 것이 자네들 기독교에 더 큰 봉사가 되지 않는가?'하는 대령의 말에 군종목사가 입을 닫고 마는 게 딱 그런 논박의 한계다. 탈영병 백명을 백명의 영웅으로 둔갑시키는 것과 신앙의 영웅을 만드는 게 다를 바 없다는 것. 조직 보위와 프로파간다의 논리다.

'신성하게 미친 가련한 젊은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조롱과 미움의 대상이 되고 로마 병정의 창끝에 온 몸을 찔리고, 적들의 시선 앞에서 그를 구해줄 기적 하나 없이 무력하게 헐떡이고 땀을 흘리고 피를 쏟고 있는 젊은이, 신의 아들이라는 사람의 그 가련한 육신의 절규'를 구원의 동화로 만드는 것. 그런 동화에 몸을 던지는 사람들을 경멸할 텐가, 사랑할 텐가. '

그런데 이렇게 치열한 세속의 고민에서 작가는 한발 더 내딛는다. 종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종교와 신앙의 역할에 대한 질문, 특히 전쟁과 인생에 지쳐있는 그야말로 절망적 상황에 빠진 사람들에게 그러한 '동화'를 주어 위로하는 종교에 대한 폭넓고 깊은, 극한까지 밀고 들어가는 고민인 거다. 고난에 시달리고 고문당하는 불쌍한 사람들, 그들의 비참한 생에 달콤한 환상을 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을 줘야 하는가.

이 대위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그들을 잘 보살펴주시고 국가는 그들의 운명을 진지하게 걱정해주고 있으니 만사 괜찮아질 거라고' 말하는 모든 고상한 거짓말, 국민의 이름으로 국민을 위한다며 저질러지는 이 모든 것들이 역겹게만 느껴진다. 그는 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동정하면서도 종교나 신이 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 거다. 하여 계속 묻는다. "목사님의 신ㅡ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그와 다른 축으로 모여선 사람들, 신목사와 박 대위는 그저 이해하고 동정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고 진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의 삶을 의미있게 하고 고난을 값진 것으로 해줄 그 어떤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가련하고 유약한 사람들이라는 거다. 죽음의 공포앞에서 자신의 신과 신앙을 모두 의심하고 무너졌던 열두명의 목사가 '순교자'로 불리워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라는 거다. 정의에 대한 약속, 신에 대한 약속 없이는 모두 무너질 테니까.

'우리가 지금 여기서 당하는 고통은 고통일 뿐, 거기에는 우리가 이승 너머에서 찾아낼 어떤 정의로움도 없습니다.'

작가는 두 가지 입장을 첨예하게 밀고 나간다. 수백만명이 죽어가는 한국전쟁의 와중이라는 혼란하고 부조리한 상황 한복판에서, 아무런 희망과 약속을 얻을 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근대의 낙관주의처럼 모두가 차갑고 냉엄한 현실 앞에서 당당하진 못하더라도 괴로운 진실을 떠안고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입장과 불의하고 무의미한 삶을 견디지 못해 무너져버리고 말거라며 '환상'을 쥐어준다면 그것자체가 희망 아니겠냐는 입장, 그 두 입장은 끝까지 머리맞대어 고뇌하며 이리저리 약점을 찾아 타격하며 투쟁한다.

사실 한국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 아니어도, 사람들은 종종 자문하곤 한다. 이걸 지금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내 삶은 어딜 향하고 있을까, 죽고 나면 다 끝나는 건가. '죽음'이나 '사후'에 대한 그런 숱한 질문은 더러는 사회적인 터부가 되어 자물쇠가 채워져 관리되고, 개인적으로도 애써 힘내보자는 자기계발류의 이야기나 생에 대한 이야기로 집요하게 돌려버리곤 하는 거다.

그런 걸 보면 인간은, 끝내 스스로 삶과 죽음, 영원한 소멸과 사라짐을 긍정할 수 없는 걸까.

'교인들은 이 무의미한 세계에서 그들의 생을 지속시키는 그 무언가를 갖고 있어. 한데 우리에겐 그게 없지. 그들이 가진 그것을 우리가 꼭 동화라고 불러야 할까.'

소설에선 신 목사가 그런 '경지'에 이른 거 같다. '스스로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람. 죽음 이후엔 아무것도 없다는 공포와 두려움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스스로 그 십자가를 짊어질 수 없는 사람들을 삶에서 보호하는 거다. 그들을 위해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지켜주는 목자.

소설 제목인 '순교자'는 이제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신을 위해 봉사하고 목숨까지 바친 사람이 아니라, 신을 믿는 사람과 삶에 의미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사람인 거다. 그건 어쩌면 매트릭스 식으로 말하자면, 빨간 알약을 먹어버리고도 이 세계에 남아있는 존재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깨닫고도 아직 피안으로 넘어가지 않은 채 중생을 계도하는 존재, 보디사트바(보살)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난 궁금하다. 이 대위도 궁금했던 거다.

'국외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애초에 신을 믿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에 기댈 수 있을까. 신으로 엮인 목자와 양떼의 관계가 아니라, 신의 개입없는 개인과 개인이라면.

분명 그건 더욱더 힘든 싸움일 거다. 십자가뿐 아니라 온갖 기도와 염불과 예배 소리로 가득한 땅에 살면서 그런 '종교'라는 마약에 취하지 않고 눈 똑바로 뜨고 아연하게 짖쳐들어오는 온갖 희로애락과 불행들을 맞닥뜨리고 온전히 감내하려면. '순교자'에 기대어 삶의 의미를 보증받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회의와 두려움 속에서 한치 앞도 알 수 없고 의미조차 알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가야 하니까. 신 없이 살아간단 건 그런 거다.

* 굉장히 인상깊었던 대목 하나. 이 작품과 이 작가가 한국 사회에서 잊혀진 이유 아닐까.

기독교에 대한 굉장히 전향적이랄까 혁신적인 해석, 그리고 기독교 교리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이랄까 새로운 시각이란 것들을 품기에는 한국사회가 너무. 여전히.

"난 평생 신을 찾아 헤매었소..그러나 내가 찾아낸 건 고통받는 인간...무정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뿐이었소."
"그리고 죽음의 다음은?"
"아무것도 없소! 아무것도!"

..."우린 그들에게 빛을 보여주어야 해요. 영광과 환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고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확신을 주어야 합니다."
"희망이라는 환상을 준단 말입니까? 무덤 이후의, 죽음 이후에 대한 환상을 주란 말입니까?"
"그렇소! 그들은 인간이기 때문이오. 절망은 이 피곤한 생의 질병이오. 무의미한 고난으로 가득 찬 이 삶의 질병입니다."

..."목사님은요? 당신의 절망은 어떡하고 말입니까?"
"그건 나 자신의 십자가요. 그 십자가는 나 혼자서 짊어져야 하오"
"다른 사람들은?"
"많은 이들이 다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건 아니잖소? 그들은 십자가를 질 수 없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그리스도가 필요한 사람들이오. 우린 그들에게 그들의 그리스도와 그들의 유다를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육체의 부활도?"
"그렇소, 육체의 부활도!"
"하나님의 영원한 천국도?"
"그렇소, 그 천국도!"
"정의는?"
"물론이오. 정의, 얼마나 그리운 이름이오? 그렇소. 정의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궁극적인 정의를 주어야 하오."
"목사님은?"
"계속 괴로워해야겠지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얼마 동안이나? 얼마 동안이나 괴로워해야 하는 겁니까?"
"죽을 때까지,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없을 때까지!"

그렇다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떻게 내려져야 하는 걸까.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가기로 한 목사가 여전히 말로 답하기를 거부하는 그 질문.

"목사님의 신ㅡ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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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보는 고대사 - 민족과 국가의 경계 너머 한반도 고대사 이야기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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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북한을 충분히 이길 수 있으니 군사적 압박을 가하자는 전쟁 불사론은 바로 이런 네오콘식 선제 정밀 타격과 전쟁 수행을 통해 무력으로 김정일 정권을 붕괴시키자는 주장의 판박이다.
일부 국내 호전론자들은 만일 미군이 결심만 하면 북한 수복은 물론이고 만주까지 치고 올라가 잃어버린 고토를 회복할 수 있다는 황당한 주장까지 펼친다."
- 시사인 11.29일자, 한반도 전쟁 시뮬레이션 해봤더니…하루만에 240만명 사상 중.

정말 황당한 주장이다. 당장 황당한 건 '잃어버린 고토'라는 단어에서 배어나오는 재미없고 칙칙한 열혈 우국지사틱한 마인드고, 또 그들이 잃어버린 고토라는 '우리땅' 만주에서 비롯하는 낯설고 생경한 어감이다. 수백만명이 죽고 다치는 전쟁을 무슨 땅따먹기놀이처럼 생각하는 무식한 야만성이나 미군이 미국 국익의 고려없이 무조건 우리편이라는 유아적 사고에 멈춰있다는 따위, 지엽적인 문제는 넘어가기로 하자.

대체 어떤 또라이들이 저런 주장을 하나 싶다. 그런데 사실 그들이 발딛고 선 논리랄까, 마인드의 문제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유롭지 못하단 게 문제다. 사실 이미 드라마니 영화니 잡서들을 통해 가공의 역사와 특정한 시각이 알게 모르게 친숙해져 버린 건 아닐까 걱정스러울 정도다. 주몽이니 근초고왕이니, 고대사를 다룬 드라마들이나 조선의 세종을 다룬 영화('신기전'이었던가), 심지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따위 쓰레기까지, 조금만 더 진지해지면 저런 황당한 주장을 펼치는 또라이와 같아질 정도로 접근해왔다.

그들은 단순하게도 오늘날 나라와 나라 사이를 구획하는 경계선이 단단하듯 수천년전에도 똑같이 명확한 국경선이 그어졌을 거라고 상상한다. 아니, 그렇지 않다는 거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정립했다는 시기에조차 각 고대국가는 도읍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정 권역의 개념이었지 국가간 경계선을 그을 정도로 안정적이고 확정된 근대적 '영토'를 갖지는 않았다. 예컨대 고조선이 만주 일정지역에 영향을 행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신채호가 말한 것처럼 '정복 왕조'로서 파악되거나 단군을 '정복자'로 묘사할 만한 정도의 것이 아니라 일정 지역에서 공물을 거두는 정도였다는 거다.

게다가 어느 한때, 잠시동안 '만주'를 영향력 하에 두었다고 해서 '원래 우리민족, 우리나라 땅'이라고 하는 게 말이 되나. 그 이전이후의 다른 점유자들은 강탈자인 건가. 팔레스타인 땅을 두고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벌이는 강탈과 똑같은 논리인 셈이다. 물론 '만주'에 대한 고토회복의 열망은 좀더 근대의 기록에 근거한다고 반박할 거다. 백두산 정계비에 쓰인 조선-청 간의 영토획정 결과 간도지역이 조선에 속한다는 건데, 글쎄, 청과 조선이 모두 망했고 백년이 넘은 지금 상황에서 그걸 주장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한국이 독도를 실효적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중국이 지배하고 있는 땅이다.

두번째로, 오늘날 그어진 국경선 내에 꾸깃꾸깃 살고 있는 사람들이 수천년 전부터 동일한 민족을 이룬 채 살아왔다고 착각한다는 점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주민들은 서로를 한민족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거라는 착각인데, 덕분에 당나라를 끌어들여 '통일'을 이룬 신라의 김유신과 김춘추는 거의 '민족반역자' 수준의 비난을 받아온 거다. '조선일천년래 제일사건'이라며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을 애통해 했던 신채호의 입장은 이후 남북한을막론하고 이 사건을 보는 기본적인 시각이나 멘탈리티로 굳어진 셈이다.

그렇지만 과연 그랬을까. 그때의 '우리'라는 관념이 지금처럼 국가나 민족단위로 단단하게 있었을지도 의문이고, 동일 언어를 쓰는 한민족, 혹은 단군의 자손이라는 '삼한일통'의 정신이 뚜렷이 드러나는지는 더욱 회의적이다. 국가가 구성원을 통제하는 수단이나 정도가 근대국가에 비해 훨씬 미미했던 그때, 사람들은 씨족이나 가문 정도에서 가장 크고 확실한 정체성을 얻지 않았을까. 설혹 신라인, 백제인으로 스스로를 규정한다 해도 그들이 '뙤놈'과 '왜놈' 사이에서 '우리민족'을 의식했다는 건 소설에 가깝다. 동일 언어를 썼으니 말도 잘 통했을 거라는 막연한 상상도 서로 국서가 불통하더라는 사실 앞에 무너진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일본 혹은 다른 타국을 의식하는 방식이다. 일본에 대해서는 근대의 아픔만큼 과거에는 우리가 우월했음을 강변하는 식으로 대처하고, 중국에 대해서는 과거의 조공으로 맺어진 사대관계를 얼버무리는 대신 '만주'를 회복해 우리가 중심이 되겠다는 식으로 대응한다. 특히 일본에 대해서는 고대 한국으로부터의 일방적인 문화전파만이 있었는데 배은망덕하게도 한반도를 호시탐탐 노려왔다는 아주 간편하고 단순한 전제가 늘 깔려 있다.

일부 민족사학자들은 일본을 아예 백제 유민이 건설하고 이후 쭉 천황계보를 이어오고 있는 형제의 나라라고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백제의 일본'이라 해도 그런 전제가 달라지진 않는다. 아무런 문화도 없던 섬나라의 원숭이들에게 문화를 전파하는 선진국의 이미지, 그리고 그런 은인의 나라를 욕보이고 덥썩 집어삼킬 생각에만 골몰하고 있는 양아치 원숭이의 이미지.

역사를 조금만 보면, 오히려 한반도와 왜국 간의 긴밀한 문화 교류-일방적 전파가 아니라-의 사례들이 수천년동안 발견될 뿐 아니라 왜국은 중요한 외교적 파트너로 존중되었단 거다.

사대교린 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중국의 문화적 역량과 군사적 역량을 앞세워 구축한 천하질서는 당대 외교질서의 문법이었을 뿐이다. 오늘날 미국이 구축한 세계질서 하에서 다른 국가들이 자리매김하고 각개약진하며 미국의 문화적 군사적 역량을 제공받듯, 당대 중국의 문화를 교류하고 천하질서 하에서 상석을 차지하는 경쟁이 벌어진 셈이다. 그건 국가의 실리를 위한 외교정책이었을 뿐, 그 어디에도 근대적 의미로의 '예속'이나 '식민'의 굴욕을 떠올려야 할 구석은 찾을 수 없는 거다.

결국 '거꾸로 읽는 고대사'를 읽으면서 계속 부딪히는 건 '민족사관'의 문제 그 자체다. '우리 대한민국', 혹은 '우리 한민족'이 먼옛날 언젠가 만주벌판을 호령하며 '뙤놈'과 '왜놈' 따위는 가뿐히 무찌르고 군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최고였다는 유치찬란한 환상, 그리고 그 '우리'는 수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변함없어서 가히 개인의 목숨 따위보다 훨씬 지고하고 신성한 집단, 민족공동체라는 구라. 박노자가 줄기차게 하는 이야기는 굉장히 심플하고 기본적이다. 민족사관의 거품을 빼자. 민족사관이 편의적으로 취사선택해 부풀린 몇 개의 사실들만 말고, 균형을 잡고 보자는 거다.

신채호가 고대사를 읽어내던 시대는 지금의 시대와 다르다. 달라야 한다. 근대국가로의 경쟁적인 변신이 이루어지던 와중,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를 침탈하는 등 야만적이고 가차없는 힘의 논리가 극강하던 시절에야, 뒤늦게라도 '한민족'을 만들어내고 하나로 규합해서 근대민족국가를 만들 필요가 '민족사관'을 만들어냈던 거다. 언제고 국제사회는 냉엄한 현실 논리, 힘의 논리로 움직인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존재했던 평화와 공존의 시기에서 눈돌려서는 안 될 일이다.

일본을 늘 한결같이 악하고 못 믿을 존재로 규정짓는 역사를 공부한 사람과, 때로는 굉장히 갈등하기도 했지만 또 때로는 생각 이상으로 긴밀하고 절실하게 상호 교류해온 나라로 공부한 사람, 그 인식의 차이는 어쩌면 이후 한국 사회가 얼마나 다채롭고 성숙할 수 있을지 열쇠가 될지 모른다. '한민족'이라는 집단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생성되고 변화되어 왔는지 그 임의성을 알게 된다면 사람들은 비로소 근대인으로, 주체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P.S. 박노자는 이 책에서 한사군이 존재했다 말한다. 한사군이 존재했는지에 대해서는 감정적인 불쾌감과 민족적 '책무감'이 더해 가타부타 말이 많지만, 박노자는 정작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탄탄히 대는 데에는 힘을 쏟지 않는다. 그는 한사군의 존재 여부보다 그 존재에 대해 일단 거부하고 보는 한국 사학계의 멘탈리티 혹은 태도를 한번 따져보길 바라는 거다. 한사군이 있었다고 해도 일제 시대처럼 총독부를 설치하고 식민화한 게 아니라, 그저 중국계 유민들의 부락 정도였을 거라는 게 그의 추측이다. 우리 시대에 우리가 현재 아는 것에 빗대어 상상하는 게 위험하다는 걸 잘 보여주는 좋은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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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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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그런 책들이 있다. 제목을 워낙 많이 들었거나 그 핵심 아이디어라며 쉽사리 인용되는 한두가지 개념에 워낙 익숙해진 탓에 미처 읽기도 전에 이미 읽었다고 착각하고 마는 책. 예컨대 '빅브라더'같은 단어가 그런 착각을 일으킨다. 하루키의 1Q84를 두고 '아이큐84(IQ84)'라며 이상하게 읽어대는 어떤 문학평론가를 조소하다가, 그러고 보니 나 역시도 하루키가 1Q84라며 비튼 제목의 원전 격이랄 조지 오웰의 '1984'를 여태 읽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정말정말 굉장히 멋진 책이다. 하루키를 무지 좋아라 하지만, 그의 1Q84는 조지 오웰의 1984과 매우 '다르다.' 그리고 아마 2984년쯤에도 살아남아 찬사를 받을 작품은 조지 오웰의 1984일 거라는 데 걸겠다. 물론 두 작품은 제목 빼고는 별로 주제도, 내용도 겹치지 않으니 굳이 두 작품을 비교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래도 굳이 1Q84를 제목으로 내건 하루키가 1984의 문학적 성취를 의식하고 호승심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거다)

뭐랄까, 두 번째 이 책을 다시 읽었을 때 불현듯 마오쩌둥의 '영구혁명론'이 떠올랐다. 사회주의가 성취되기 위해서는 한번의 혁명, 한번의 전복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애써 이뤄낸 성취가 무위로 돌아가거나 후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모든 분야에 걸쳐 근본적인 변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게 그 '영구혁명론'의 대강인데,이 책에서 그려지는 1984년의 세상은 그런 영구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세상인 거다. 다만 그 혁명은 위로부터의 혁명, 그러니까 기득권층, 더 적나라하게는 지배계급의 '영구혁명'이라는 점이 결정적인 차이겠다.

1984년의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권력, '빅브라더'는 역사의 흐름을 이해했다, 혹은 이해했다고 믿는다. 권력을 쥔 상층계급에 대항해서 자유와 평등, 정의 따위의 수식을 내건 중간계급이 하층계급을 끌어들여 그들을 전복시킨다. 그리고 중간계급은 상층계급으로 자리이동하고 다시 새로운 중간계급이 생성되어 다시 이 과정을 반복한다는 식의, 커다란 순환을 무한반복한다는 것이다. 이제 권력은 그 역사의 흐름을 이해했으니 그 지식을 활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영구히 보유하려 한다. 중간계급이 성장하기 위해서 집적되어야 하는 부를 족족 소진시키고, 중간계급을 각성시키기 위한 지식을 황폐화시키겠다는 황당하지만 살벌한 전략. 그게 지배계급의, 지배계급을 위한, 지배계급에 의한 '영구혁명'의 목표다.

듣기엔 우습지만 그 결과는 참담하다. 온 인류를 먹여살리고 노동에서 해방시킬 수 있을 만큼 경이로운 수준에오른 생산력은 주변국과의 쉼없는 전쟁을 위한 총과 대포를 위해 소모된다. 현재의 세상을 비교하고 평가하기위한 나침반이자 전거로서 기능해야 할 과거의 역사, 과거의 지식은 매시간 새롭게 씌여진다. 늘 전시체제 하에서 동원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제 전쟁이 없던 시기를 기억하지 못하며, 배급되는 신발과 면도날의 질과 양이 불과 일년 전에 비해서도 양호해졌는지를 따지지 못한다. 그들은 전쟁의 광기에 불현듯 휩싸이면 빅브라더를 위해 만세를 부르며, 집안 화장실마저 감시하는 사상경찰 하에서 억지웃음을 지을 뿐이다.

권력이 자원을 무익하고 비생산적인 쪽으로 소모해버리고 적극적으로 이데올로기를 동원해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건 2010년 지구에서는 이미 익숙해져 버린 풍경이다. 한국만 해도, 온 국민을 먹여살리고 북녁의 주민들까지 먹여살릴 수 있을만큼의 풍요한 자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굳이 희소하게 만들어 버린다. 전쟁무기를 구매하고 국외와의 불공정한 경쟁에 노출시키며 4대강 같은 무익한 사업에 쏟아부으며 '소모'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옹호하기 위한 논리와 이데올로기를 만들기에도 게으르지 않다. 권력과 언론간 '반복과 차용'의 근친교배를 통해 사실로 굳어져버리고 마는 정치적 프로파간다들. 천안함 사태가 그렇고, G20가 그렇고, 사대강 사업이 그렇고, FTA옹호론이 그렇다. 그 와중에 국내이슈를 덮어버리는 애국 마케팅도 절묘하다.

조지 오웰의 상상력은, 그렇지만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괜히 그를 '디스토피아'의 무시무시한 재현자로이야기하는 게 아닌 거다. 이들, '빅브라더'를 전면에 내세운 채 역사의 수레바퀴를 멈춰버리려는 이들은 사회를 통제하고 구조를 고착화시키려 안간힘을 쓸 뿐만 아니라 아예 인간의 사고 자체를 개조하려 든다. 기계에서 자동으로 배열된 몇가지 단어로 짜맞춰진 시와 노래만을 유포하고, '섹스를 더럽게 변질시켜' 억압된 성욕을 전투적인 증오심과 지도자 숭배로 전환시키는 거다.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사고능력을 둔화시키고 제거하기 위해서 언어 그 자체를 새롭게 정리한다. 어휘를 계속 줄이고 줄여서 생각의 폭을 좁히고, 결국에는 생각할 필요도 없는 기계인간을 만드는 것이 빅브라더가 생각하는 혁명의 완수.

빅브라더의 생각대로 될까.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는 다양한 동사와 형용사들, 깊은 사고와 반성을 가능케 하는관념어들이 없어지면, 정말 인간이 변화할까. 그리고 신발깔창처럼 제작되는 노래와 시들이 재래의 예술을 대체하면 인간의 문화는 황폐해지고 말까. 성욕을 억압하면 인간들이 까칠해져버려서 전투적으로 변하고 전시상태의 비인간성을 흔쾌히 받아들이게 되는 걸까. 전통적 가정을 하나의 상호 감시단위로 변화시킬 정도의 강력한 감시와 통제라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수락할 수 밖에 없게 될까.

모르겠지만, 조지 오웰은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고 말한다. 이미 그의 주인공 윈스턴조차 찢겨진 시체의 팔목을 무심히 발로 차내어 버릴만큼 황폐해졌고, 자신을 미행하는 사람을 곡괭이로 살해하고 말겠다 다짐할 만큼 살벌하다. 결국 지독한 고문과 자기 부정을 거쳐 윈스턴이 빅브라더를 사랑한다 고백하는 최후의 순간에 이르면, 오웰의 예측은 옳은 것이었다고 동의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고 마는 거다. 이런 상황이라면, 이런 상황에까지 몰리면 인간은 멸종하고 말겠구나, 역사는 멈추고 말겠구나, 기껍지는 않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거다.

그게 단순히 조지 오웰의 '사고 실험'이었으면 좋겠다. 아직 어떤 권력도 빅브라더만큼 철저하게 국민들을 통제한 바 없으며, 언어를 조직적으로 퇴화시키는 건 고사하고 문화와 사생활과 사고방식을 규율하고 억압한 적은 없다고 믿고 싶다. 그렇지만 불길하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인간 신체에 대한 구속력-생체권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해졌고, 국가와 자본주의의 동학 내에서 대중문화는 스스로 천박해진지 오래다. 전신을 스캐닝하고 개인정보와 생체정보를 집적하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란 너무 쉬워졌다. 민주주의의 이름을 팔아 하향평준화를 강제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자기 성찰과 반성적 사고를 단련하기 위한 시간은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이슈들에 선점당한다고 느낀다면, 너무 시니컬한 건가.

다행히 아직은 그렇게까지 위태롭지 않다고 해도, 조지 오웰의 이 암울하고 염세적인 이야기는 여전히 값지다.자연스런 흥망성쇠의 역사 흐름을 멈춘 채 현재의 지위와 특권을 영원히 장악하겠다는 그들 권력자들의 욕심은, 조지 오웰이 그 결과로 그려낸 세상은 낯설지언정, 그 욕심 자체는 지독히도 진부하고 익숙한 거다. 그들은 언제고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라며, 그들을 위해 유리한 시각으로 세상을 보기를 강권한다. 너무도 익숙한 이야기 아닌가. 4대강은 운하가 아니고, FTA는 모두에게 유리하며, 아랍인은 테러리스트이고, 미국은 영원한 우방이자 세계경찰이고, 그리고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란 이야기.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다. 2+2=5, 라디오헤드의 이노래가 1984의 이 대목에서 비롯한 건 아닐까. 이제 끔찍해질 거야, 도망칠 곳은 없어. 비명을 지르고 고함을 쳐도 이제 너무 늦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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