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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자 선언 - 판사 문유석의 일상유감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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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혼란스러웠다. 내가 꼰대와 꼰대질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가. 보통 꼰대는 어느 정도 긁어모아둔 사회적 평판과 지위를 단단한 바탕으로 날 올려다보는 이들에 대한 훈수를 일컬음이다. 왠지 온갖 사회명망가와도 살짝 결이 다른 판사영감이 쓴 이 책도 별반 다르진 않다. 내가 살아봤는데, 로 시작하지 않고 내가 살아보고 있는데, 로 열려있다는 점과 올려다보는 이를 의식하는 게 아니라 가능한 어깨겯고 눈높이를 맞추려 노력한다는 점 빼고는.
그게 근본적으로 다른 류의 메시지를 만들어낸 지점인지도 모른다. 캡쳐한 부분처럼 가차없는 자기반성을 계속하고, 내가 곧 이 사회 상식과 평균 지점에 안착한 사람일 거라는 근거없는 편견을 부셔나가려 노력하는 사람의 글. 사실 누구나 자기는 평범하고 보통의 '일반인'이라 여기지만 어디 그렇던가. 그 회의되지 않은 자기중심성이 그대로 이념 이전의 전근대성, 비합리와 불통과 독단이 빚어내는 풍경은 도처에 존재한다. 그건 또한 내 주변은 온통 논쟁할 여지없는 비정치의 영역인 양 착각하게 만드는 온상이기도 하다. 정치는 뭔가 특별한 영역, 특수한 주제에 대한 이야기여야 한다는 환타지.
그러고 보면 이 책에 묶인 그의 칼럼들은 하나하나 굉장히 정치적이다. 제목부터가 개인주의자선언이니, 맑스의 공산당 선언을 염두에 두고 쓴 제목이렸다. 그렇지만 생각거리들은, 선언의 세부 항목들은 훨씬 디테일하고 일상적이다. 회사 생활, 데이트, 가족 문제 등 살아가며 매일 부딪히는 일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지점을 제공하며 그것이 실제의 삶을 바꿀 거라는 신념을 설득력있게 제시한다. 그저 거대한 담론과 근본적인 해결책만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 아니라, 꼬인 실타래처럼 복잡하고 중층적인 문제를 조금이라도 풀어서 개선하는 것이 더 대담한 한걸음 아니겠냐는 이야기.
다소 원칙적이거나 이상적으로만 느껴지는 부분들과 이견이 존재하는 부분도 없지 않으나, 개인적으로 가장 와닿은 건 팩트 체크의 엄정함이 강조되는 부분들이었다. 문제 해결을 위한 전단계로 누구나 생각하지만 생각보다 허술하게 넘어가는 게 대부분이다. 얼마나 다양한 각도에서 심도있게 관찰하는지에 따라 해법은 얼마든지 바뀌기 마련이니까, 근본적으로 신과 같은 전지적인 시점의 사실 확인은 불가능하다고 해도 노력해야 한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겠다.
그러거 보면 이 판사영감, 그저 얌전하게 귀퉁이에 선 채 사회와는 유리된 채 고고한 노블리스나 금수저라 생각했었는데 꽤나 매력적이다. 그건 아마도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 역시 엄정하게 팩트를 체크하려 들면서 계속 본인의 자세와 마인드를 바꾸려고 노력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설렁설렁 이삼십대를 거치며 해치운 팩트 체크에 기대어 삶은 이런 거야, 정답나왔어, 라며 뻐기는 꼰대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와중에 이렇게 말랑말랑하고 통찰력있는 아저씨는 얼마나 소중한지. 이런 꼰대라면 그래도 귀담아 들어보는 척까진 해줄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