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 것도 좋고 고양이도 좋다. 고양이에 대한 책을 읽는 건 더 좋다. 게다가 하루키. 그가 빚어내는 픽션이 유리오르골같은 섬세함과 정제된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가 전면에 나선 에세이는 방망이깎는 장인의 거친 손을 더듬어 잡는 듯한 생생함과 고집스러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 대한 약간의 애정만 있다면 다소 '빈티지'스러운 말장난이나 특유의 위트는 역시 하루키스러운 부분이라며 너그러워진다.
이번에도 그의 에세이는 가볍고 재미있다. 그리고 계속 읽힌다. 소설보다 에세이가 낫다고 느낄 때도 있다. 그의 에세이를 읽을 때마다 그랬던 것 같은데, 언제나 경이로운 사실이다. 전라로 집안일하는 주부라느니 모텔이름 고찰이라느니 고객불만 편지를 쓰는 법이라느니 살짝 외설적이거나 시답잖은 이야기만 늘어놓는 데다가, 왠지 자신없는 말투지만 근성있게 웅얼웅얼, 누구도 캐묻지 않은 것에 대한 소심한 변명이나 설명을 덧붙이는 궁시렁쟁이가 있을 뿐인데 말이다.
그 비밀은 아마도 드물게 그가 정색하며 쓰는 문장, 혹은 역시 쓰려다 말고 눙치되 감정을 흘려둔 문장들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남녀관계나 나이먹음에 대해 말하다 말고 문득, 역시 일반론은 그만두어야겠다고 슬쩍 넘어갈 때. 백화점의 장애인 안내문구를 놓고 그 이면의 비정함과 둔감함에 (그로서는 매우 드물게도) 분노를 표할 때. 전집 간행문제로 자신과 불화한 당사자가 마음고생으로 자살했다는 사실을 굳이 밝히면서도 역시나 자신은 똑같이 행동할 것이라 명토박을 때. 그가 굳이 말하지 않고 에세이에 숨겨둔 것들은 그런 것들이다.
그의 문장을 조금 고쳐 말하자면, 아무리 작가라 해도 모두가 웃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는 불가능하고, 그 책임은 본인이 오롯이 짊어지고 살 일이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겠다, 식으로 늘 조심스럽게 열어두는 방식의 태도를 견지하는 그가 이럴 때 보여주는 진지함과 날카로움은 서늘할 정도다. 그럼에도 말하자면 출산하는 고양이와 한밤중에 몇시간씩 마주하고 있던 때의 완전한 느낌, 그처럼 아름답고 성실한 묘사로 한순간이나마 그에 공감할 수 있게 해준 건 역시나 하루키여서 가능한 마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