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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치는 여자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
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이병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굉장히 감각적이다. 자해하며 피부를 베어내고 피를 흘리는 묘사, 사랑하는 누군가를 구타하고 무릎꿇리려는 마음에 대한 묘사, 그리고 타인의 애정행위를 관음하는 마음에 대한 묘사까지, 중간에 책장을 덮고 한숨돌려야 할 만큼 찌릿거린다.
어머니에게 억압당한 채 그녀가 생각하는 음악의 성스러움에 봉헌된 딸이 있다. 음악의 도시 빈에서 음악가로는 실패한 채 교육자로 어머니와의 삶을 이어가는 딸. 음악에는 속된 부분도 있다는 것을 알고 남자를 포함한 바깥세계에도 섞이고 싶지만, 이미 삼십오육년째 어미가 구축한 세계 속에서 둘만의 애증을 키워왔다.
옷차림과 외출시간까지 속속들이 구속하는 삶의 유이한 일탈은 자해와 관음이다. 빨래집게와 바늘과 면도칼로 본인의 몸을 빼곡하게 어루만지며 황홀경에 빠진다. 매춘부에게 돈을 지불하고 몸을 관람하거나 타인의 섹스를 훔쳐보는 행위는 굉장히 건조하고 무미하게 묘사되는데, 어떤 식으로던 타인과의 교감과 타인으로부터의 행복감을 좇아보려는 헛된 시도처럼 읽힌다. (딸-어머니 간의 완결적인 관계에서 자기 안의 남성성을 불러일으키려는 계속된 실패로 읽는 해석도 있더라만)
거기에 학생이 등장한다. 이 병들고 불감인 음악강사에 대한 환상과 열정을 품은 그는 아직 어리고 경험도 적다. 여자는 꾸준하고도 천천히 남자를 시험하고 탐구한 끝에 사랑을 주기로 결심한 반면, 남자는 소유욕과 뒤섞인 과한 열정과 함께 증오를 키워오고 있었던 것. 사도마조히즘의 관계를 빌려 사랑을 요구하는 그녀에게 끝내 폭발하는 그, 그리고 버림받은 그녀의 자해와 서늘한 결말까지.
사랑은 끝내 소유욕의 다른 이름인 걸까, 아니면 상대를 행복하게 해주려는 마음일까. 여하간 살면서 삐뚤어지고 구김살이 생긴 사람이, 나 자신에 대한 지배력을 확인하며 얻는 행복감이 꼭 필요하다면 기꺼이 외견상 가학적으로 보이는 역할을 맡을 수 있을까. 그렇지만 그렇게 아무런 주고받음도 없이 고통-쾌감을 위한 도구로서만 쓰인다는 건 또 얼마나 외로울까.
책의 어느 부분에 집중해서 읽냐에 따라 그야말로 백가지의 감상이 가능할 것 같은 소설. 치밀하고 도저한 심리묘사, 애정과 복종, 무책임과 방관의 즐거움, 사랑과 섹스에 대한 페미니즘적 전복들, 사도마조히즘의 다이나믹..지금 이토록 생생한 질퍽한 느낌이 가물거릴 때쯤 다시 한번 꼭 읽고 싶어질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