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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나무의 일기
디디에 반 코뵐라르트 지음, 이재형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300년 된 나무가 쓰러졌다.
300년이란 시간이 흐르면 그렇게 되는 것일까?
의식을 갖고 있는 나무의 이야기는 신선함으로 소설을 장악한다.
오랜 기간 동안 한 자리를 지켰던 나무가 지난 세월의 이야기를 나누며 지나간 인연들과 회상을 나누고, 인간이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세상과 소통한다. 그런데 의문스러운 것은 낯익은 여자 아이의 소리가 들린다는 것.
300년 된 두 그루의 나무.
한 나무의 풍성함에 가려 빛이 바랬던 나무는 이제 홀로 태양을 받는다. 풍성했던 나무는 쓰러져 사람들의 슬픔을 뒤로 하고 장작으로 쓰일 뿐이다. 그때 집 앞의 한 소녀에 의해 예술품으로 남아 또 다시 미래를 살아가는 나무.
이 소설의 매력은 역사를 현실로 끌어오는 작가의 상상력이다. 역사 속 사건을, 인물을 300년이란 시간을 보낸 나무를 통해 현실로 자연스럽게 끌고 와서 이야기의 완성도를 높인다. 신비한 여자 아이의 정체와 나무의 정체성이 결말에 드러났을 때는 ‘아~’하는 탐복이 입에서 흘러나온다.
그러나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바로 나의 모자란 역사의식이다. 이 소설을 읽기 전에 소설의 배경이 되는 지난 300년의 역사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면 이 소설이 더욱 내 뇌리에 각인되었을 것이다. 좋은 작품의 진정한 매력을 느끼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다. 시간이 흐른 뒤, 이 작품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질 때쯤 그 동안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역사서를 읽고 다시금 도전하고 싶다. 그렇다면 결말에 이르러 느낄 수 있는 파동이 지금보다 훨씬 더 크게 다가오리라.
물론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해서 이 소설의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작품의 구성이나 신선한 소재는 충분히 독자의 눈을 매료시킨다. 그러나 역사적 배경을 아는 사람이 이 작품을 읽는다면 이 작품은 전혀 다른 작품이 된다. 예를 든다면 몇 달 전 방영한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를 볼 때, 등장인물, 역사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이 보는 것과 알고 보는 것의 차이라고나 할까?
역사의식을 갖지 않고 보더라도 전혀 보는 데 아무 문제가 없지만 역사 속 인물을 재해석하고 그 안에서 상상력을 발휘한 작가의 필체에 놀라게 되는 것. 그럼으로 인해 작품에 대한 색다른 매력을 느끼는 것. 그것을 알지 못하는 아쉬움에 얼른 이 소설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길 바라며 다시금 이 책을 펼쳐보는 그 날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