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계 최초 잡놈 김어준 평전
김용민 지음, 고성미 사진 / 인터하우스 / 201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딴지일보, 가끔 들어갔다. 나꼼수, 예전 열풍이었던 시기에 방송을 몇 번 들은 기억이 있다. 김어준과 3인방, 이름은 많이 들어봤는데, 잘 모른다. 사진으로 본 적은 많아 얼굴식별이 가능하다. 이게 내가 방송과 그들에 대해 아는 전부다.

그러니 이 책을 봤다고 어설프게 아는 척 할 수 없다. 정치적 행동을 논한다거나 할 수도 없다(뭘 알아야지...) 나꼼수 4인방, 특히 김어준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도 아니다. 그래서 ‘김어준 평전’이라 이름 붙은 이 책을, 나꼼수나 김어준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읽었다는 등의 가식을 떨 생각은 없다. 호기심이 있었다면 4인방이 쓴 그동안의 책들 중 한 권이라도 읽었을 텐데, 난 이 책이 그들에 관한 첫 책이다. 그럼 왜 읽었냐고? 리뷰 이벤트가 있어서다. 나꼼수가 열풍이었던 시절부터 그들이 궁금하긴 했다. 인터넷 검색을 열심히 찾아서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언제 기회가 되면 그들에 관한 책을 읽어볼 마음은 있었다. 그게 이번 기회와 맞물렸기에 읽었다.


책의 머리말 시작부터 이런 구절이 있다. ‘예능’을 ‘다큐’로 받아들이지는 말지어다!

예능은 재미다. 그러니 재미로 읽으면 된다는 거고, 읽는 동안 재밌었다.

1998년 7월 4일, 조선일보 인터넷 홈페이지를 패러디한 딴지일보의 창간배경, 2011년 4월 27일에 첫 녹음을 시작한 나꼼수의 탄생비화, 서울시장이 되는 박원순 밀어주기, 정봉주가 감옥 간 사건과 맞물려 터진 ‘비키니 사건’과 김용민의 19대 국회의원 총선출마에서 드러난 막말사건, 나꼼수 최종회까지 기사를 통해 조금은 알고 있었거나, 몰라서 더 흥미로웠던 일들이 몰래보는 야사(?)처럼 다가왔다.


이 책의 저자 김용민은 김어준의 최측근이자 나꼼수 4인방의 한 인물이기에 아무리 논리적인 근거를 붙인다고 해도 그러한 사건들의 객관성을 담았다고 주장하기는 힘들다(그래서 머리말에 ‘예능을 다큐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시작부터 썼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객관성이란 건 많은 이들이 인정하는 성질을 말하는데, 이 많은 이들의 생각이란 것도 개개인의 주관성에서 발생한 거라 어떤 집단인가에 따라 객관성의 성질이 달라질 수 있기에 ‘객관성’이란 말 자체에 어폐가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러니 이 책은 ‘객관성’이란 두루뭉술한 성질을 배제한, 개인의 주관성에 나름의 논리를 적용시켜 하고 싶은 말을 한 것이다. 때문에 읽는 사람들 중 저자의 말에 이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짜증은 낼 수 있을지언정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분통을 터뜨릴 이유는 없어 보인다(내가 그렇다는 게 아니고.)


위에서 언급한 사건들이 공적인 일화라면, 김어준과 3인방에 얽힌 사적인 에피소드들이 개인적으로는 더 흥미로웠다. 대학졸업 후 포스코 입사 8개월 만에 짐을 싸고 세계 50개국을 돌아다닌 김어준의 배낭여행 이야기는 지금의 그를 있게 한 가장 큰 계기가 아닌가 싶다. 그 스스로도 “배낭여행을 통해 트인 세계시민으로서의 식견이라고 스스로 밝힌 바 있다. 그 말대로, 사람은 누구나 겪은 만큼, 딱 그만큼만 성장하는 것이니까.” 라고 말하고 있으며, 측근인 저자도 “김어준의 안목은 팔할이 여행에서 다져진 것이다.”라고 평한다. 그의 식견과 안목이 어느 정도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보고 듣고 체험한 게 많을수록 시야가 넓어지는 건 맞는 소리니 그의 성장을 굳이 폄하할 필요는 없겠으며, 일단 돌아다닐 그 용기가 부럽다.


라디오 ‘김어준의 저공비행’에서 친하지 않았을 무렵, 김어준이 깔때기를 심하게 하고 있던 정봉주에게 ‘의원님, 시끄러워요!’라고 소리치고는 둘 다 웃어댔다는 이야기나, 처음 주진우를 불편해하던 정봉주에게, “내 취재대상이 되면 당신은 죽어.”라고 맞받아치며 ‘자력으로 나꼼수에 정착한’ 주진우의 이야기 등은 남다른 포스가 느껴지기도 한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재밌게 본 이야기는 P 259, 김용민이 정치에 참여하기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이던 문재인의 성대모사를 욕과 섞어 흉내 낸 부분인데, 방송에서 보는 문재인 전 대표의 성품과 말투를 익히 알고 있기에 그 페이지는 몇 번을 다시 봐도 낄낄거렸다.)


‘딴지일보’와 ‘나꼼수’는 김어준이란 사람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 그를 평가하는 하나의 잣대가 된다. 워낙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만든 공적인 사건이니까. ‘명랑사회 창달’이란 ‘딴지일보’의 창간모토는 ‘색깔론으로 먹고 사는 타락한 언론과 현실 권력을 패러디’하는 것으로 존재감을 드러냈고, 각하 헌정 방송인 ‘나꼼수’는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잔꾀(꼼수)를 지칭하는 것으로 여러 큰 이슈들을 만들어냈다.


[p 64. 그런데 김어준은 정통 스타일을 고집한 오연호와 달리 ‘패러디’를 주무기로 삼았다. 이는 김어준식 메시지 확산의 기제였다. 오연호의 논문 ‘상호작용성의 두 차원과 인터넷저널리스트의 변천’에 따르면, 김어준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말을 사람들이 들어줄까 고민했는데, 돈, 힘, 권위, 역사가 없는 그로서는 ‘재미’를 무기로 삼았다. 거기에서 패러디라는 딴지일보의 독특한 스타일이 등장했다. 비단 패러디라는 표현 양식만이 아니었다. 공학도답게 김어준은 플랫폼에 대한 관심 또한 커서 2013년 대선을 정점으로 팟캐스트 ‘나꼼수’로 대박을 친다.


p 125. 플래넷을 접을 시점이었다. 김어준의 말이다.

“우리는 대단히 편파적이다. 그러나 편파적이 되는 과정은 대단히 공정하다.”

‘2002년 대선후보 일망타진 이너뷰’에서 밝힌 이 말은 그의 수많은 어록 중에 가장 빛나는 것이라 나는 개인적으로 평가한다. ‘마구만’이라는 네티즌이 인터넷신문 프레시안 게시판에 글을 올려 김어준의 이 말에 보태는 듯 한마디 했다.

“공정하게 편파적인 것이 가장 공정한 것이며, 편파적으로 공정한 것이 가장 편파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김어준으로 대표되는(나꼼수 4인방이 아닌 이유는 이 책이 ‘김어준 평전’이기에) ‘딴지일보’나 ‘나꼼수’가 바로 김어준이란 사람을 평가하는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다고 했을 때, 위 두 문단의 ‘재미와 패러디’, 그리고 ‘편파적이지만 과정은 공정한’이 바로 김어준이란 인물의 특성이란 거다. 그리고 최측근인 저자는 그런 특성을 이 책의 곳곳에서 그렇게 드러내고 있다.


[ p 168. 김어준은 진보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합리를 추구합니다. 정치적으로 대체로는 진보가 합리적이어서 겹치는 것일 뿐, 김어준을 진보로 이해하려는 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히는 꼴입니다.]


‘김어준과 15년 동안 먹고 사는 문제를 함께 공유했던 딴지일보 편집장 김용석’과의 인터뷰 내용 중 일부다. 어차피 이 책은 저자가 공정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며 쓴 편파적인 책이기에 최측근인 편집장의 평가 또한 그런 범위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정봉주야 정치인이니, 주진우야 기자니까 그렇다 치고, 이 책을 완독하기 전, 대체 김어준은 뭐하는 사람이기에(김용민도 잘 모르겠고) 희한한 사람들 넷이 모인 곳에서, 그것도 리더역할을 하며 무슨 자신감으로 저러는 거지? 라는 궁금함이 있었다. 그의 이력이야 이제 조금은 알겠고, 아래 문단에서 그의 자신감의 배경을 찾았다.


[p 22. 자기보다 잘난 사람을 만나면 곧바로 꼬리를 내려야 하는 상대적 자신감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잘난 줄 알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자신만의 자산을 정확하게 평가해서 그것에 만족하는 절대적 자신감이 중요하다는 것... ...

자존감은 외부적인 것과는 관계없이 자기객관화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객관화가 안 되면 자신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 한다. 그러나 내 부족한 부분까지 수긍하고 긍정하여 형성되는 자존감을 자기면 그러한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되고, 그만큼 여유가 생겨 ‘타자’를 쳐다볼 수 있게 된다고 그는 믿었다.]


이 책, ‘은하계 최초 잡놈 김어준 평전’을 완독하고 이 글을 쓰면서 호의를 드러내는 걸 자제하려 했는데 잘 안 된 듯싶다. ‘나꼼수’와 4인방에 대한 약간의 호감이 있기에 그런 티를 내도 상관은 없겠으나, 그렇다고 잘 모르는 상태에서 그런다는 게 좀 불편한 감도 있다. 그건 아마 ‘나꼼수’와 김어준이란 사람이 그만큼의 파장을 일으켰기에, 그리고 그 파장에 온전히 동의하는 것도 아니기에 그런 듯싶다.

어쨌든, 어떤 상황과 환경, 누구를 만나 조금이라도 위축된다는 느낌이 들 때, 내가 툭하면 속으로 내뱉는 말이 있다.

‘쫄지마, 시바! 잃을 것도 별로 없는 놈이...’

쫄지마,로 대표되는 그에 관한 책을 읽었다. 재밌게 잘 봤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리틀 브라더
코리 닥터로우 지음, 최세진 옮김 / 아작 / 201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작품 ‘리틀 브라더’는 국가권력기관이 명분을 내세워 개인의 사생활과 정보를 불법으로 침해하고 그에 맞서는 고3 남학생의 활약을 다루고 있다. 많은 이들이 조지 오웰의 ‘1984’를 떠올리고 나 또한 그러하다. 통제사회란 측면에서 영화 ‘브이 포 벤데타’도 떠오르는데 읽으면서 이것보단 다른 작품이 떠올라 슬쩍 미소 지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내 나이대의 사람이라면 크리스찬 슬레이터 주연의 영화 ‘볼륨을 높여라’를 알 것이다. 한국에서도 흥행했으니 말이다. 이 영화는 이렇다. 고등학생이 라디오해적방송을 하다가 불법이란 이유로 결국 잡힌다는 내용. 메시지라면 어린 세대를 억누르는 기성세대에 대해 할 말은 하자는 거다. 언뜻 ‘리틀 브라더’와 별 연관 없어 보이는데, 이 영화의 기성세대를 국가권력기관으로 치환하고, 부당하다고 느낀 청소년의 저항이란 점을 생각한다면 스토리의 포맷은 대충 맞아떨어진다. 그러니까 두 작품 다 “할 말은 하자!”는 거다.


영화는 1990년에 나왔다. 길거리포스터만 보고도 왠지 모를 흥분에 몸이 달았는데 후에 비디오로 꽤 많이 본 기억이 있다. 멋있지 않은가. 불법의 라디오해적방송이라니. 누가 듣든 말든 내 맘대로 툭 터놓고 주저리주저리 욕설도 섞으면서 떠들어댄다는 게 말이다. 근데 주인공의 해적방송이 그 나이대의 청소년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얻는다. 그러니까 가득 쌓인 불만을 하소연할 창구조차 없던 그들에게 해적방송DJ는 자신들의 대변인인 셈인 거다.

‘리틀 브라더’의 주인공 마커스가 그렇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벌어진 대규모 참사의 테러범을 잡고 차후에 벌어질 테러를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사람들을 불법 통제한다. 초법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그에 따르기를 강요한다. 저항에 따른 대가는 참혹하다. 그럼에도 마커스는 대항한다. 법 위에 군림하려는 권력이 부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항하지 않으면, 할 말을 하지 않으면 개인의 존재이유가 허수아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보자고 외치는 틴에이저무비라면, ‘리틀 브라더’는 개인의 사생활과 정보침해가 어떤 세상을 만들지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관점을 틴에이저소설처럼 풀고 있다. 배경과 주제가 상이하면서도 결국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에 따라 틀을 깨고 행동하는 십대라는 점에서 두 작품은 그리 다르지 않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거나 추천하는 작품을 뒤늦게 보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재밌어? 그럼 난 안 볼 건데?!... 그래서 뒤늦게 봤다가 이걸 이제야 보다니 했던 작품이 근래에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잡화점의 기적'이다. 왜 그런 심뽀가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모르겠으나, '리틀 브라더' 또한 그런 심뽀가 있었다. 수많은 전문가들의 추천평 때문이다. 대체 이 작품이 얼마나 재밌길래??? 작가도 처음 들어보고 도서지원을 받은 것도 아닌 순수한 상태에서 한 마디 하자면, 이 작품은 내 눈에 흠을 잡기가 힘들 정도로 상당히 재밌다. 5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금세 읽을 수 있는 건 흡인력과 소설적 완성도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디스토피아적 관점의 '1984'가 읽은 후에도 묵직한 우울감을 준다면, 이 작품은 희망적인 분위기를 경쾌하게 풀어간다. 가볍다는 게 아니다. 무거운 주제를 재밌게 풀어간다는 거다. 앞으로 다가올 사회가 어떤 모습일지는 모르나 작품의 사회에 근접한 모양새라는 생각에 섬뜩하다. 온갖 명분으로 부당한 권력을 휘두르는 국가기관의 통제사회가 오려거나 왔을 때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어떤 식으로든 목소리를 높이는 게 유일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할 말은 하자!'는 거다. 허수아비가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첨언. 아이폰의 잠금장치해제 방법을 알려달라는 미국 FBI의 요구를 애플은 거부했다. 결국 FBI는 외부업체의 도움을 받아 이를 알아냈다고 발표했다. 이게 뭘 의미하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루미너리스 1
엘리너 캐턴 지음, 김지원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완독했다고 어설프게 아는 척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작품이다. 얕은 감상이 금방 티가 나기에 솔직한 감상을 적는다. 1권을 일주일, 2권을 삼일 동안 읽었다. 1권의 삼분의 이 이상을 밑줄을 좍좍 그으며 봤다. 초반에 인물관계며 사건을 정확히 이해하지 않으면 읽을수록 헤맬 거란 생각에 약간은 전투적인 자세가 됐다. 그러다 밑줄을 포기한 건 다름 아니다. 많은 등장인물과 복잡한 서술방식의 이야기전개를 따라가는 게 쉽지 않아서다. 그러다보니 소설을 즐기는 게 아니라 공부하는 게 돼버렸다. 마치 수험서를 보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소설을 즐겨보는 첫 번째 이유는 내 입맛에 맞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재미가 없다면 소설을 볼 이유가 없다. 그런데 밑줄을 그으며 자꾸 뒤를 넘겨 확인하고 일부러 외우고 심지어 메모까지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건 몰입의 가장 큰 적이며 소설의 재미를 포기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진도는 안 나가고 남은 분량이 부담으로 다가온 것이리라. 잘 몰라도, 이해가 좀 안 돼도 그냥 마음 편히 읽어갔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1권 마지막 장을 덮었다. 1권만 먼저 샀기에 2권에 대한 고민이 잠시 있었다. 시작한 건 끝을 본다는 오기 따위는 내게 없다. 언제든 힘들고 어렵고 하기 싫으면 그만 둔다. 단 그 선택을 하기 전까지 깊이 생각하고, 선택을 했으면 책임은 확실히 진다. 책 하나 더 추가로 사는데 이런 말까지 하나 싶기도 하지만, 1권만 먼저 본 사람이라면 이해할 듯싶다. 그만큼 1권은 이 작품의 전체적인 재미를 느끼기에 힘든 측면이 있다. 전체적인 구성에서 이 정도 분량을 사건을 위한 떡밥으로 깔아둔다는 건 쉽지 않은 선택이고, 구성방식이고, 초반에 무조건(?) 흥미를 붙잡아둔다는 다수의 전개방식과 분명히 다르다. 그래서 낯설거나 올드한 느낌, 지루한 감은 있다. 그럼에도 2권을 구입한 건 다른 사람들의 2권 리뷰를 훑어봤기 때문이다. 1권과는 다른 스피디하고 흥미로운 전개 등의 표현이, 과연 무대가 되는 호키티카 마을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게 만들었다. 그리고 2권은 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빠르고 흥미진진하게 봤다. 완독한 후 바로 드는 생각.

"47년 맨부커상 역사상 최연소 수상 작가의 천재적 작품!(홍보문구) 을 읽어냈다!"


자, 이 작품의 내용을 한 줄로 말하면 이렇다.

1866년, 뉴질랜드 골드러시를 배경으로 하는 호키티카란 마을에서 스테인스란 젊은 갑부가 사라지고, 안나라는 창녀가 자살시도를, 크로스비란 남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는데, 과연 이 마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작년 말, 문근영 주연의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이란 드라마가 있었다. 약간은 아쉬운 시청률이었지만 개인적으로 재밌게 봐서 기억에 남는데, 이 드라마 역시 '대체 이 아치아라란 마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사람들이 쉬쉬하며 문근영을 따돌리는 걸까?' 란 궁금증을 끊임없이 자아내게 했다. 그러니까 ‘루미너리스’나 ‘마을’이나 '대체 이 마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가 소재의 컨셉트이긴 한데, 전부는 아니라는 거다. 이 마을에서 또는 그때 무슨 일이, 아니면 당시의 누군가가, 라는 건 사건의 기본적인 얼개를 나타내는 표현일 뿐 정작 중요한 건 무슨 일 때문에 벌어져서 무얼 말하고 싶은 걸까,이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주제라는 건데, 이 작품 루미너리스의 주제가 소재이자 배경이 되는 '골드러시'. 즉, <주제=소재=배경>이라는 거고 그렇다면 이 작품은 초반의 조금은 지루한 전개부터 마지막 탐욕의 결말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주제를 대놓고 말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바로 골드러시 말이다.


골드러시란 금광이 발견된 지역으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현상을 말한다. 왜 몰려들까? 금이 있기 때문이고, 그건 일확천금을 가질 수 있는 기회라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금'은 '꿈' 또는 '탐욕'으로 풀이할 수 있는데, 정직하게, 최소한 부정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꿈의 범주에 넣을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면 탐욕이 된다. 그리고 금을 꿈으로 풀이할 수 있기란 매우 힘들다는 걸 본문에서도 말하고 있다.


[2권 p 640. 살인이나 절도, 반역 같은 데에는 신경 쓰지 말게. 진정한 범죄는 사기뿐이라네. 광부의 희망을 꺾는 짓이야. 광부들이란 가진 게 오로지 희망밖에는 없는 사람들이거든. 광부에 대한 사기는 두 종류가 있지. 빈 광산에 금을 심어서 속이는 게 첫 번째이고, 빈 광산이라고 주장하는 게 두 번째야.

- 금광촌 거물 매너링이 젊은 갑부가 되는 스테인스에게 하는 말.


p 488. 아가씨가 알아둬야 하는 게 있어. 금광 마을에선 관대함 따윈 없다고. 관대한 행동처럼 보인다면, 다시 한 번 들여다봐.

-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크로스비가 창녀 안나에게 하는 말.]


가진 게 오로지 희망밖에는 없는 광부들이 사는 금광 마을에, 한 몫 잡았으나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크로스비가 마을에 갓 흘러들어온 안나에게 하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꿈(희망)이 있고, 꿈을 찾아 왔으나 관대함을 기대하지 말라는 건 결국 금광 마을 자체가 탐욕으로 이뤄졌다는 말이고, 그 탐욕의 범죄는 살인이나 절도, 반역이 아니라 바로 사기라는 말도 꿈의 좌절이 얼마나 광부들에게 살인보다 더한 짓인지를 단적으로 나타낸다. 결국 골드러시라는 건 허황된 꿈, 탐욕스러운 짓에 불과하다는 얘기겠다.


그럼에도 왜 사람들은 골드러시를 감행할까? 그것이 헛된 희망이라는 걸 몰라서?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겠으나, 단순히 꿈이라고 포장된 금보다는 새로운 시작의 기회 때문이 아닐까싶다. 오로지 일확천금이라는 목적보다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살아가보자는 것. 작품 초반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중심역할을 하는 무디도 탐광의 꿈을 안고 마을에 들어왔고, 사건의 중심에 있는 안나도 어쩔 수 없이 창녀가 되기 전에 새로운 시작의 기회를 찾아 금광 마을에 왔다. 젊은 갑부가 되는 스테인스 또한 일확천금의 목적보다는 탐광이란 일 자체에 매력을 느껴 온 것이다.


[2권 p 544. 오래전부터 신비롭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탐광꾼의 삶에 매료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도에 없는 외로운 해변에 금이 보이지 않게 숨겨진 채로 반짝이는 것을 상상했다. 널따란 바다 위로 노란 보름달이 떠오르는 것을, 골짜기 사이를 말을 타고 달리고, 맨땅에서 잠을 자고, 나무로 된 선광대로 물을 거르고, 깜부기불 위에서 막대 주위에 광부의 반죽을 감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자신이 찾은 부가 인류와 인류의 역사보다도 오래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근사한 일일까, 그걸 자신의 두 손으로 땅에서 파낸다는 것이 얼마나 굉장한 일일까 그는 생각했다.

- 스테인스의 생각.]


그러니 골드러시라는 단어 또는 행동의 본질에는 금이라는 탐욕 이전에 희망이나 꿈이라는 긍정적인 면이 강하다고 볼 수 있고, 그것들이 모여 금광 마을을 이룰 때 너무나 쉽게 변질될 수 있음을 이 작품은 내내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이런 순수했던 골드러시가 어떻게 변하게 되는지를 살인+실종사건과 연결시켜 추리적인 구성으로 보여줌으로써 골드러시의 본질적인 면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드라마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에서 비밀의 중심은 '누군가'에 찍혀있다. 이 누군가는 용서할 수 없는 나쁜 놈이다. 그 누군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 또한 그렇다. 이 작품 루미너리스의 중심에는 카버와 리디아가 있다. 두 작품 모두 소수의 그들이 행한 추잡한 비밀에 한 마을이 기이해지고 발칵 뒤집혀진다. 탐욕이란 욕망에 하나둘 동조하고 그것이 결국 한 마을 전체를 괴물로 만들어버린다. 작품에서 '변질된 골드러시'란 행동은 현대를 살아가는 지금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탐욕이란 이름으로 말이다.


나뿐만 아니라 이 작품에서 많은 사람들이 느꼈을 아쉬움이 있을 것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12궁 별자리와 7개의 행성의 특징과 성격에 빗대어져 만들어졌다고 하니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좀 더 작품의 맛을 진하게 느꼈을 텐데 말이다. 그러나 완독한 사람으로서 다시 생각해보면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다. 모르는 건 모르는 대로 넘어가면 그뿐이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게 당연하겠지만 그렇다고 작품을 보는 데 있어 큰 지장은 없다. 별자리를 빗댄 인물의 특성은 소설적 완성도를 위함이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건 '골드러시'고 말이다. 2권 마지막 장을 덮으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위에서도 언급했듯,

'맨부커상을 읽어냈다!' 였다. 작품의 내용을 한 줄로 간략하게 말했지만 이 작품은 다양한 인간군상을 낯선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읽기가 쉽지 않은 이유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하고 싶다. 혹시라도 나처럼 읽는 게 쉽지 않았다면 그래도 읽는 동안 느꼈을 나름의 재미로도 충분하다고 말이다. 흔치 않은 골드러시란 소재의 작품을, 12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그것도 유명하다는 맨부커상을 받은 작품을 읽어냈다는 자기만족으로도 책을 봤던 시간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 논문을 쓸 게 아니기에 이 정도로도 난 만족한다.

(한강 작가님의 맨부커상 후보를 축하하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 제21회 전격 소설대상 수상작
기타가와 에미 지음, 추지나 옮김 / 놀 / 201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동안 힘들었지?...


누구나 비밀 한두 가지는 있다. 대체로 그 비밀은 누구에게도 말 못할, 말하고 싶지 않은, 들키고 싶지 않은 것들이다. 그 비밀 때문에 자기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거나 이미 까매져있는데, 그래서 이 까만 속을 그을음이라도 털어내고 싶은데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비밀이다. 누구에게도 말 못할 비밀...

조금 오래 전, 그러니까 내가 이십대 후반쯤에 지금도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나름의 비밀 때문에 어느 때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다. 말이라도 하면 속이라도 아주 조금 풀릴까싶어 고민 끝에 친한 친구를 불러내 술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소주의 힘을 빌려 아무렇지 않은 척, 최대한 담담하게 주저리주저리 말을 했다. 듣는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를, 그러나 나에게는 참 큰일인 그 얘기를 잠자코 듣던 친구의 첫 마디는 (거짓말 안 보태고) 이거였다.

"야... 그동안 힘들었겠다..."

그러면서 자기였어도 그랬을 거라며 이해해주고 호응해주었다. 지금도 그날의 장소, 분위기 등이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는 그 친구에게 항상 고마움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어쨌거나 내 편에서 나를 이해해주려는 태도 때문이다. 내가 바보 같고 멍청한 짓을 해도 어떤 식으로든, 하다못해 '척'이라도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나는 지금도 잘 그러지 못하지만 그 친구에게 가장 본받고 싶은 점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아오야마는 작은 기업에 입사한지 반 년 된 신입사원이다. 사회를 살아가면서 누구라도 겪을, 아니 누구나 겪는 직장생활의 어려움을 혹독하게 경험하고 있다. 상사의 눈치 때문에 퇴근을 늦게 하고, 주말에도 일을 해야 하며, 익숙하지 않은 업무로 저지르는 실수 등에 자기비하를 한다. 그리고 승강장에서 마주 오는 전철에 떨어지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휘청거리는 아오야마의 팔을 누군가 잡아끈다. 초등학교 동창생이라며 애매하게 소개하는 야마모토. 그와의 교류에서 아오야마는 새로운 기분과 마음가짐을 다지게 되지만 또 다른 실수 등으로 인해 자살충동을 느끼며 우울해한다. 그러면서 밝혀지는 야마모토의 정체... 지옥 같은 직장 생활과 동창생이 아니었던 야마모토와의 관계 속에서 아오야마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우리가 소설을 보는 이유는 삶에 대한 고찰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나아가 장르에 따라 대리만족까지 준다면 소설을 보는 목적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 작품은 (굳이) 분류상 순문학이 아니다. 삶에 대한 진지한 고찰은 없다. 출판사 리뷰에도 나오듯 라이트 노벨로 분류된다. 대중성과 나름의 작품성을 함께 평가하는 전격소설대상 '미디어웍스 문고상'을 수상했다. 진지하지 않다고 가볍다는 뜻은 아니다. 무거운 주제를 가벼운 작법으로 썼다는 얘기다. 그건 대중성과도 통한다. 대중성이란 여러 연령대에서 즐길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 진지한 고찰이 없다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내용에 공감하기에 나름의 작품성을 획득하고 있다. 난 이 점이 꽤 중요하다고 본다. 대중성. 진지한 고찰을 한다고 대중성이 없는 건 아니겠으나 많은 이들에게 읽히기 힘든 건 사실이고, 대중성에 목적을 두면 그만큼 가벼워지기에 평가절하 되기도 한다. 작품성과 대중성의 조율이 중요하면서도 쉽지 않다는 얘기다. 굳이 말하자면 대중성에 많은 무게가 실리는 이 작품에서 나름의 작품성이라고 한다면 뻔한 말들을 공감 있게 소설적으로 잘 풀어냈다는 점이다.


[p 157. 인생은 누구를 위해 있다고 생각해?... 자신을 위해... 나머지 절반은 너를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을 위해 있어.

p 166. 아버지는 잠시 침묵했다가 이렇게 말을 이었다. 너는 아직 젊어. 지금은 얼마든지 실패해도 된다.

p 171. 괜찮아. 인생은 말이지, 살아만 있으면 의외로 어떻게든 되게 되어 있어.

p 178. 도망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그 아이는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혼자 애를 쓰고, 손 쓸 도리가 없는데도 계속 애를 쓰다... 도망치지도, 앓는 소리를 하지도 못하고 결국 망가져 버렸어요. 어째서 알아채 주지 못했을까요. 지금도 생각해요. 혹시 곁에 있었다면 뭐라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p 196. 내 인생에 참견할 수 있는 사람은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뿐이다.

p 216. 하지만 사회를 위해 사람이 희생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누구든 행복해질 기회는 돌아온다. 설령 그 기회를 전부 깨닫지 못하더라도 한 번쯤은 인생을 바꿀 타이밍을 찾을 수 있으리라. 그 타이밍을 붙잡을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어쩌면 그것은 그때 그 사람 곁에 있는 '누군가'가 건네는 말에 크게 좌우된다.]


문장만 보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익숙한 말들이다. 그냥 한 번 보는 '오늘의 한 줄 명언'같은 느낌이다. 그럼에도 위 문장들이 가슴에 스며드는 건 이야기 속에서의 소설적 완성도가 높기 때문이다. 가볍게 지나치고 흘려듣는 말들이 무거운 주제를 만나 가벼운 작법으로 쓰여 무겁게 울림을 준다. 공감은 되어도 남의 이야기이기에 가볍게 접할 수 있으나, 이후에 남는 여운은 깊게 들어간다. 남의 이야기이면서 내 이야기이거나 일 수도 있는, 비슷한 이야기이기에 그렇다. 꼭 진지한 고찰이 없더라도 삶에 대한 공감을 하게 만든다면 그것 나름의 작품성을 갖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비록 뻔한 말과 내용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배우 고수를 한 방에 뜨게 만들었던 오래 전 광고가 생각났다. '박카*'라는 광고인데 청년의 도전정신을 짧은 시간에 울림 있게 보여주어 호평을 받았고 이후로 그런 컨셉트의 광고가 몇 편 더 나온 것으로 기억한다. 내용은 정말 뻔했다. 지금 기억에 새벽에 열심히 일하고, 아침 일찍 활기차게 나가는 모습 등이 이미지로 떠오르는데, 왜 그 광고가 그렇게 떴을까? 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의 광고라는 특성을 가지고 말이다. 그건 아마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점을 정확하게, 그것도 긍정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리라.

이 작품이 그렇다. 직장인이든 자영업자이든 작품 속 아오야마의 모습은 겪었거나 겪지 않았어도 충분히 공감이 되는 모습이기에 읽어나가는 것이다. 소재와 결말이 이와 같더라도 어떻게 풀어나가는가에 따라 호응의 차이는 크다. 이것이 대중성과 나름의 작품성을 동시에 획득한 글의 특징이다.


이 작품의 장점을 언급하며 좋은 평가를 내리는 건 위의 특징들을 담고 있으면서 요즘 시대의 큰 문제 중 하나인 실업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청년 열 명 중 몇 명이나 사표를 내고 이직할 용기를 가질 수 있을까? 연령대를 높여 가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작품의 미덕은, 청년에게는 이직의 두려움을 깨고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으라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가정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행동을 한 아오야마에 대한 대리만족과 자신을 돌아보게 만다는 계기를 준다는 점이다. 진지한 고찰은 없더라도 자기 삶에 대한 긍정적 메시지를 설득력 있게 풀어간다.


서두에 비밀 얘기를 했다. 주인공 아오야마에게 동창생을 가장한 야마모토가 없었다면 아오야마는 어떻게 됐을까? 좋은 결말은 아닐 것 같다. 만약 내가 스트레스로 힘들었을 때 내 얘기를 들어주고 이해해주려던 친구가 없었다면 이후의 난 어떤 생활을 했을까... 란 생각을 한다면... 뭐 더 힘들고 더 바보 같았을 거다. 난 그때 속이라도 조금 풀고 싶어 용기 내 말을 꺼낸 거지만, 나이를 좀 더 먹은 후 생각하면 '내가 지금 힘든데 조금 도와주라...' 라고 손을 내민 것이다. 만약 나보다 어린 친구에게 조금이라도 세상살이 경험을 더 한 사람으로서의 조언 하나만 하라면 이 말을 하고 싶다.

'그동안 힘들었지? 그러니 이제 힘들면 도와달라고 말해. 힘들 때 도움을 받는 건 아주 당연한 거니까...'

세상이 x같고 사회가 아무리 부조리해도 우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왕 살아가는 거 조금이라도 긍정적이 되려면 힘들 때 잡아달라고 손 내밀고, 아플 때 아프다고 말해야 한다. 혼자 끙끙대는 성격상 내가 손 내밀지 않았을 때에도 어느 누군가가 그걸 알아채고 내 손을 잡아주었기에 내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누군가가 손 내밀면 잡아주는 게 당연한 거고, 그게 이 거지 같은 사회가 그나마 돌아가는 이유다. 아오야마가 나중에 임상심리사가 되는 이유 또한 그렇다. 그러니 너무 힘들어하지 말자. 손 내민다고 쪽팔려하지 말자. 손 내민다고 많은 사람들이 덥썩 잡아주지는 않을 거다. 열 명 중 한 명도 없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도 한 백 번쯤 내밀다보면 분명 한 명은 진심으로 도와주려고 잡아줄 거다. 그 누군가를 만날 때까지 손을 내밀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 손을 잡아주면 이런 생각이 들 거다.


[p 209. 인생이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모도미난스 - 지배하는 인간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힘을 가진 자, 정당성을 획득하라!

 

 

근래 마블의 어벤저스 캐릭터들을 필두로 히어로물이 강세다. 실재적인 느낌을 주는 CG의 발전이 큰 몫을 했기에 이런 인기가 가능하지 않은가 싶다. 거기에 초능력을 갖고 있는 능력자들의 실존적 고민이 더해져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다. 2천 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능력자들 영화의 주류는 단순한 선악의 대결, 힘을 가진 자들의 해프닝 수준이었다. 지금의 히어로물의 인기를 한층 끌어올리고 본격적으로 발전시킨 작품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비긴즈’부터가 아닌가 한다. 단순히 능력을 가진 자의 해프닝이 아닌, 능력자로서의 자신의 존재이유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배트맨의 모습은 그도 한 인간임을, 절대적인 영웅이 아니라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대상임을, 상처받고 아파하고 깨달아가는 존재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능력의 차만 있을 뿐 그들도 보통의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점에서 괴리감은 좁혀지고 좀 더 인간적으로 다가가고 싶게 만들었다. 그건 곧 그들과 나를 동일시하게 만들고 그들처럼 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꿈도 못 꿀 절대자가 아닌 그저 나보다 우월한 능력자. 그리고 나도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 초능력은 막연한 환상이 아닐 수도 있음을 많은 히어로물은 보여주고 있고, 그래서 우린 꿈을 꾼다. 능력자의 꿈을.

 

 

작품에서 14세 소년 스스미에게 주어진 능력과 이후의 파괴적 행동은 위에서 언급한 그런 초능력이 생겼을 때의 부정적인 면을 그리고 있다. 자신의 가족이 죽은 후, 가출패밀리에 가입해 거리에서 생활하다 끝내 폭주하는 스스미의 모습은 뜻하지 않게 갑자기 생긴 초능력의 남용이 얼마나 파괴적일지, 자신을 비롯한 타인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여파를 미치는지 잘 보여준다. 이건 꽤 가능성 있는 현실적인 가정이다. 선행학습이 어쩌고 하면서 학원을 몇 개씩 다녀야하는 현실의 청소년들의 삶 속에서, 우연히 거미에 물려 스파이더맨이 되고 좌충우돌하다 동네를, 세계를 구하는 소년영웅을 기대하는 건 영화로도 충분하다. 괜히 불만스럽고, 또래보다 싸움을 잘 하고픈 그 나이의 청소년에게 갑작스레 생긴 힘의 사용처는 여자아이에게 잘 보이고, 싸움을 잘 해 돋보이고 싶은 정도가 고작인 게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그러면서 파생되는 사건들에 힘겨워하고 감당하기 어려워 결국 폭주를 하는 스스미의 모습은 어쩌면 배트맨이 하는 실존적 고민보다 더 깊이 있게 다가온다. 소수점 아래의 부유한 생활환경에서 스스로 배트맨이 되고자 했고, 존재의 이유를 다시 사유하는 배트맨의 모습은 딱 우리가 바라는 능력자의 모습일 뿐이지만, 바라지도 않았고 존재감이 완성되지도 않은 미성년의 스스미에게 힘은 감당하기 어려운 짐일 뿐이다. 학원에서도 가르쳐줄 수 없는 힘의 사용법을 모르는 스스미, 결국 폭주하는 스스미를 통해 감당할 수 없는, 통제할 수 없는 힘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의 모습을 이 작품은 잘 보여주고 있다.

 

 

이에 반해 스스미와 대척첨에 서 있는 또 다른 주인공 안시현은 ‘힘을 가진 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힘의 출처를 알게 되고, 힘의 사용법을 배우고, 힘의 정당성을 획득한 안시현을 통해 능력에는 책임감이 따른다는 절대적 진리를 확인시킨다. 안시현은 만들어진 영웅으로 우리가 익숙하게 환호를 보냈던 영웅의 다름 아니지만, 스스미는 그런 능력을 꿈꿨던 우리에게 갑자기 힘이 주어졌을 경우 가장 벌어질 확률이 높은 상황을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힘을 가진 자의 막중한 책임감을 환기시킨다.

 

 

작품은, 스스미와 안시현이라는 개인을 통해 ‘힘을 가진 자의 책임감’을 물었다면, 이 물음을 확장시켜 백원단과 방바재단이라는 두 단체의 대립을 통해 ‘힘의 정당성’까지 질문한다. 통제할 수 없는 힘, 또는 부당한 권력이 정당한가? 라고 말이다. 백원단은 힘을 통제할 수 없을 경우를 우려해 힘의 근원을 추적하며 정당성을 획득하려하지만, 방바재단은 물리적 힘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는데 중점을 둔다. 이러한 방바재단의 모습이 선한 의도이든 그렇지 않든 그건 나중 문제다. 선행되어야 할 문제는 힘에 대한 책임감이다. 책임감은 곧 통제로 치환할 수 있다. 그래야 의도한대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방바재단은 극단적인 행동을 통해 목적을 정당화한다. 그걸 가능케 할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단이 목적을 넘어설 때, 그 목적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하지 않다. 방바재단이 휘두르는 권력은, 그들이 정당하다고 믿는 힘은 그래서 옳지 않고 명분이 없다. 명분 없는 힘은 결국 파멸을 가져온다. 14세 소년인 스스미의 파멸 또한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한, 명분 없는 힘이기에 그렇다. 작품은 결국 다시 묻는다. 감당할 수 없는 힘이 주어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고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