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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브라더
코리 닥터로우 지음, 최세진 옮김 / 아작 / 2015년 10월
평점 :
이 작품 ‘리틀 브라더’는 국가권력기관이 명분을 내세워 개인의 사생활과 정보를 불법으로 침해하고 그에 맞서는 고3 남학생의 활약을 다루고 있다. 많은 이들이 조지 오웰의 ‘1984’를 떠올리고 나 또한 그러하다. 통제사회란 측면에서 영화 ‘브이 포 벤데타’도 떠오르는데 읽으면서 이것보단 다른 작품이 떠올라 슬쩍 미소 지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내 나이대의 사람이라면 크리스찬 슬레이터 주연의 영화 ‘볼륨을 높여라’를 알 것이다. 한국에서도 흥행했으니 말이다. 이 영화는 이렇다. 고등학생이 라디오해적방송을 하다가 불법이란 이유로 결국 잡힌다는 내용. 메시지라면 어린 세대를 억누르는 기성세대에 대해 할 말은 하자는 거다. 언뜻 ‘리틀 브라더’와 별 연관 없어 보이는데, 이 영화의 기성세대를 국가권력기관으로 치환하고, 부당하다고 느낀 청소년의 저항이란 점을 생각한다면 스토리의 포맷은 대충 맞아떨어진다. 그러니까 두 작품 다 “할 말은 하자!”는 거다.
영화는 1990년에 나왔다. 길거리포스터만 보고도 왠지 모를 흥분에 몸이 달았는데 후에 비디오로 꽤 많이 본 기억이 있다. 멋있지 않은가. 불법의 라디오해적방송이라니. 누가 듣든 말든 내 맘대로 툭 터놓고 주저리주저리 욕설도 섞으면서 떠들어댄다는 게 말이다. 근데 주인공의 해적방송이 그 나이대의 청소년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얻는다. 그러니까 가득 쌓인 불만을 하소연할 창구조차 없던 그들에게 해적방송DJ는 자신들의 대변인인 셈인 거다.
‘리틀 브라더’의 주인공 마커스가 그렇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벌어진 대규모 참사의 테러범을 잡고 차후에 벌어질 테러를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사람들을 불법 통제한다. 초법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그에 따르기를 강요한다. 저항에 따른 대가는 참혹하다. 그럼에도 마커스는 대항한다. 법 위에 군림하려는 권력이 부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항하지 않으면, 할 말을 하지 않으면 개인의 존재이유가 허수아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보자고 외치는 틴에이저무비라면, ‘리틀 브라더’는 개인의 사생활과 정보침해가 어떤 세상을 만들지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관점을 틴에이저소설처럼 풀고 있다. 배경과 주제가 상이하면서도 결국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에 따라 틀을 깨고 행동하는 십대라는 점에서 두 작품은 그리 다르지 않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거나 추천하는 작품을 뒤늦게 보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재밌어? 그럼 난 안 볼 건데?!... 그래서 뒤늦게 봤다가 이걸 이제야 보다니 했던 작품이 근래에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잡화점의 기적'이다. 왜 그런 심뽀가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모르겠으나, '리틀 브라더' 또한 그런 심뽀가 있었다. 수많은 전문가들의 추천평 때문이다. 대체 이 작품이 얼마나 재밌길래??? 작가도 처음 들어보고 도서지원을 받은 것도 아닌 순수한 상태에서 한 마디 하자면, 이 작품은 내 눈에 흠을 잡기가 힘들 정도로 상당히 재밌다. 5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금세 읽을 수 있는 건 흡인력과 소설적 완성도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디스토피아적 관점의 '1984'가 읽은 후에도 묵직한 우울감을 준다면, 이 작품은 희망적인 분위기를 경쾌하게 풀어간다. 가볍다는 게 아니다. 무거운 주제를 재밌게 풀어간다는 거다. 앞으로 다가올 사회가 어떤 모습일지는 모르나 작품의 사회에 근접한 모양새라는 생각에 섬뜩하다. 온갖 명분으로 부당한 권력을 휘두르는 국가기관의 통제사회가 오려거나 왔을 때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어떤 식으로든 목소리를 높이는 게 유일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할 말은 하자!'는 거다. 허수아비가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첨언. 아이폰의 잠금장치해제 방법을 알려달라는 미국 FBI의 요구를 애플은 거부했다. 결국 FBI는 외부업체의 도움을 받아 이를 알아냈다고 발표했다. 이게 뭘 의미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