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파랑 - 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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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을 보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는 '차가움'의 감각이다. <천 개의 파랑>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첫 감각도 '차가움'이었다. 파랑파랑한 표지를 보고 맑고, 시원한 소설을 떠올렸다. 하지만 차가운 파랑이 천 개나 모인 이 이야기는 분명, 따뜻한 이야기다.

안드로이드 기수 콜리, 콜리를 망치러 온 콜리의 구원자 연재, 콜리의 파트너 말 투데이, 투데이의 친구 은혜, 연재와 은혜의 엄마 보경 등 너무나도 다른, 각자의 사정을 지닌 인물, 동물, 로봇이 만들어가는 이 이야기는 타인을 이해하고 타인에게 이해받는 이야기다. 은퇴를 앞둔 경주마 투데이를 행복하게 만들고자 모인 이들. 절대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관계들 사이에 쌓여가는 신뢰와 우정을 보며 나를 이해해 줄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거라고 믿어왔던, 꽁꽁 얼어붙어있던 마음이 녹아내렸다.

소설 속 존재들은 모두 각자의 아픔을 안고 살아간다. 장애인, 동물, 안드로이드, 사별자, 청소년. 그들은 제대로 아플 권리조차 없는 소수자이다. 하나의 이야기 안에서 한 종류의 상처도 제대로 토닥이기 어려울 것 같은데 천선란 작가는 모두에게 적절한 온도의 손길을 내민다. 어떤 누구의,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포기하지 않고 위로해줄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더욱더 따뜻하다. 이 세계에서는 조금 느리더라도 아무도 다치지 않고 각자의 행복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만 같다.

1960년대 최초의 우주여행이 시작된 뒤부터 지구는 '파란 행성'으로 불렸다.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는 푸르기 때문이다. 지구가 아닌 다른 세계를 상상해야만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요즘, 콜리의 파랑이 모인다면, 잠시나마 우리가 사는 푸른 별 지구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천 개의 단어만으로 이루어진 짧은 삶을 살았지만 처음 세상을 바라보며 단어를 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천 개의 단어는 모두 하늘 같은 느낌이었다. 좌절이나 시련, 슬픔, 당신도 알고 있는 모든 단어들이 전부 다 천 개의 파랑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늘을 바라본다. 파랑파랑하고 눈부신 하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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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리커버 에디션, 양장)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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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설 ‘파이 이야기'에서 주인공 파이는 자신의 ‘태평양 표류 이야기’를 믿지 않는 어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세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에요, 우리가 이해하는 그대로죠, 안 그래요? 그리고 뭔가를 이해한다고 할 때, 우리는 뭔가를 갖다 붙이지요. 아닌가요? 그게 인생을 이야기로 만드는 게 아닌가요?”(p.374)

 

언제부턴가 사람의 인생은 결국 하나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삶은 그가 세상을 이해하는 그대로를 바탕으로 둔, 아주 긴 이야기이다. 삶 속 사건들이 실제 일어난 일인지 아닌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어떤 경험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면, 그 경험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있지 못할 테니까.

 

그러므로 멋진 인생을 살고 싶다면, 내 삶에 무엇을 갖다 붙일 건지 고민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뭔가를 잘 갖다 붙인 경험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힘을 가진 이야기가 된다. 운이 좋으면 나의 이야기가 소설로, 혹은 영화로 만들어질 수도 있다. 말 그대로 영화 같은 인생을 산 사람이 되는 것이다.

 

캐나다 작가 얀 마텔과 인도 소년 파이는 동물들을 갖다 붙인 표류 이야기를 선택했다. 일본 운수성 해양부 직원들 또한 그 쪽을 택했으며, 영화감독 이안은 그것이 더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했다. 나도 그 쪽이 더 나은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하이에나와 얼룩말, 오랑우탄과 벵골호랑이가 있는 편이 더 마음에 든다. 그게 더 멋진 이야기이다.

 

어떤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선택하는지 잘 지켜보면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 조금은 알 수 있다. ‘동물이 안 나오는 이야기’와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 이 둘 중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선택하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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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해자들에게 - 학교 폭력의 기억을 안고 어른이 된 그들과의 인터뷰
씨리얼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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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그날을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어. 어쩌면 진짜로 일어났던 일이 아닐지도 몰라. 그날 너랑 나랑 같은 버스를 타고 어딘가 가고 있었잖아. 그때 우린 왜 한 버스를 탔을까? 집 방향도 다른데 말이야. 야자를 빼먹고 나오는 길이었나? 아무튼 그날 우린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았고, 자리에 앉자마자 내가 엄청 놀랐지. 그때 네 뒤 버스 창문으로 보이는 달이 되게 컸거든. 슈퍼슈퍼슈퍼문 정도 되는 달이었어. 내가 놀라서 달 되게 크다고 달 좀 보라고 너한테 말했었는데. 그 큰 달이 우릴 계속 따라왔었는데.

 

ㅇㅇ아, 나는 이 이야기가 너무 좋아. 너랑 나랑 큰 달이 비추는 버스를 함께 탄 이야기 말이야. 졸업 후에도 슈퍼문이 뜬 날엔 종종 네 생각을 했어.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이 기억을 꺼내면 넌 내가 싫어질까? 조금 크리피하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그래도 언젠간 이 이야기를 해줘야지’. 이렇게 다짐했어.

 

 그런데 오늘, 정말 오랜만에 너를 만났는데 어떤 말도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네가 그동안 간직하고 있었던 네 이야기를 해줬잖아. 네 말을 듣는데 나는 그냥 너무 미안한 거야. 그때의 너는 그렇게 힘들었는데, 나만 그 시절을 아름답고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나 봐. 네 말대로 내가 나서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은 아니었지. 그래도 내가 몰랐다는 게 너무 미안하고 그래. 너의 고통을 내가 달이니 버스니 하는 이야기로 포장해서는 안 되는 거잖아. 그래서 입을 다물었어.

 

ㅇㅇ아, 대신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내가 감히 너의 마음을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그래서 조심스럽지만, 한가지 확신하는 게 있거든. 네가 들려준 이야기 속 그 사람은 절대로 행복하지 않을 거야. 청소년기에 건강하지 못한 방법으로 친구관계를 맺고, 집단 내 권력을 휘둘렀던 사람은 평생을 고통 속에 살 거야. 겉으로는 웃고 행복해 보일지라도 그 속은 분명 지옥이야. 벗어날 수 없는 지옥. 이건 확실해.

 

여전히 그 사람을 떠올리면 화가 나고 열받는다는 너.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불행을 그 사람 앞에 가져다주고 싶다는 너. 그러면서도 이런 나쁜 소원을 빌면 안 될 것 같다고 고민하는 너. 그런 너를 둘러싼 생각들이 너를 많이 괴롭힐 것 같아. 어쩌면 지금 네 마음도 지옥일지 몰라. 하지만 너는 결국 버텨냈어. 난 너처럼 못했을 거야. 주위 사람에게 네 아픈 이야기를 터놓을 수 있을 정도로 넌 잘 버텨줬어. 그러니까 우리 나쁜 생각이 들더라도 잠깐 아프고 말자. 지옥에서 벗어나서 또 하루하루를 살아가자. 넌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니까. 전혀 찌질하지도 않고!! 정말 멋진 사람이니까.

 

이 편지는 한 책을 읽고 쓰기로 다짐했어.  네가 이 편지를 읽는 날이 올까? 이 편지가 네게 도움이 되긴 할까? 네가 조금이나마 편하게 잘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네가 매일매일 아주 달콤한 잠을 자고, 매일매일 기분 좋은 꿈을 꿨으면 좋겠어. 그렇게 되면 정말 좋을 것 같아.

 

미안해 ㅇㅇ아. 내가 너무 늦었지? 그동안 정말 고생했어. 그리고 고마워. 그 시절을 이겨내줘서. 나는 오늘 밤에도 네가 잘 자길 기도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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