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자의 마음 - 도망친 곳에서 발견한 기쁨
정고요 지음 / 엘리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



정고요 시인의 에세이 <산책자의 마음>은 빠르게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이동'이 아니라, 방향없이 천천히 걸으며 마음의 속도를 낮추는 경험을 담아낸다. 저자는 골목과 공원, 계절의 변화 같은 일상 풍경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담담하게 기록한다. 그래서 독자는 책을 읽는 동안 읽는다기보다는 함께 걷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산책자의 마음은 형식부터 정해 두지 않은 책이다. 서문처럼 읽히는 글도 독자를 안내하는 문장도 없다. 대신 시와 산문, 짧은 이야기가 산책의 동선처럼 이어진다. 어디까지가 시작이고 어디서부터가 다음 장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그 모호함이 오히려 이 책의 리듬을 만든다. 읽는 사람은 따라가며 정리하기보다, 잠시 멈추거나 건너뛰어도 괜찮은 상태가 된다. 이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돈된 독서보다 흘러가는 읽기를 허락한다.

이 책의 산책은 운동이 아니라 사위에 가깝다. 풍경을 설명하기보다는 그 풍경 앞에서 자신이 어떤 상태가 되는지를 기록한다. 사물이 겉모습보다 그 이면에 붙어 있는 감정과 생각을 조심스럽게 건져 올린다. 심각하지도 과장되지도 않는다. 그저 시인 눈에 비친 세계를 말할 뿐이다.

책에 등장하는 저자의 목록은 특히 인상 깊다. 눈물을 밀봉한 용기, 코피를 막았던 솜뭉치, 시를 써 내려간 종이, 정수리에서 뽑은 머리카락의 일부 같은 것들. 쓸모로는 설명할 수 없는 대상들이다. 저자가 소수를 좋아한다는 고백도 오래 남는다. 1과 자신만 약수로 가진 숫자라는 이유가 시답지 않으면서도 정확하다.

'장소를 사랑하기' 에서는 강원도, 그중에서도 강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산과 바다가 공존하고 지나치게 높은 건물이 없으며, 같은 길을 걸어도 다른 선택이 가능한 도시. 저자는 강릉으로 이사 온 해부터 나이를 다시 계산한다고 말한다. 공간이 삶의 감각을 얼마나 바꾸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언어에 대한 감각도 예민하다. '옆'과 '곁'의 차이를 이야기하며 곁은 만들어지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누구나 옆에는 설 수 있지만, 곁은 허락 없이는 갈 수 없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무렇지 않게 써오던 단어들이 시인의 설명을 만나 전혀 다른 얼굴을 갖는다.

'평행 우주 산책'에서는 죽은 반려묘 호떡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아이와 함께 사는 세계가 저자에게는 또 하나의 우주다. 그 장면을 읽으며, 나 역시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이미 떠났지만 여전히 함께 살고 있는 존재들. 그런 세계가 정말 어딘가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책 곳곳에 실린 일기들은 장소의 공기를 생생하게 전한다. 과감한 표현 없이도 장면이 또렷이 그려지는 건, 시인이 관찰에 얼마나 섬세한 지를 보여준다. 산책과 내면의 옷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는, '우리는 우리가 걷는 풍경을 담는다'라는 문장이 오래 남는다. 걷는다는 행위가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 이보다 잘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과거에 대한 고백도 인상 깊다. 놓지 못했던 시간들, 계속 따라붙던 기억들, 나이가 들면서 그것들과 조금씩 거리를 두게 되었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다. 젊을 때의 불안과 두려움이 얼마나 집요했는지, 그리고 시간이 어떻게 사람을 무디게도, 살게도 만드는지를 떠올리게 한다.

처음에는 지나치게 섬세하다고 느꼈던 문장들이 읽을수록 머릿속에서 장면으로 살아난다. 달빛이 쏟아지는 바다, 바람 없는 날의 파도 소리, 시인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사물 하나가 여러 방향으로 뻗어 나간다. 고지식하게 눈앞에 것만 보던 나에게, 이 책은 세계를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만든다. '광포한 아름다움'이라는 바다의 표현이 유독 마음에 남는다. 이 책을 덮고 나면 특별한 다짐 대신 조용히 밖으로 나가 걷고 싶어진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