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열린사회와 그 적들 I - 개정판 ㅣ 현대사상의 모험 16
칼 포퍼 지음, 이한구 옮김 / 민음사 / 2006년 4월
평점 :
[전체주의, 역사주의와의 끝없는 싸움]
결국 또 저질렀다. 고전은 당분간 안 읽을 생각이었는데, 요즘 사회 이슈를 보면서 그냥 문득 떠오른 책이 이 책이라서 고생 할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열린사회와 그 적들>라는 책을 펼쳤다.
칼 포퍼는 누구나 알다시피 20세기를 대표하는 사상가다. 개인적으로 20세기 사상가 중에서는 가장 좋아하는 사상가다. 특히 그의 자연적 법칙과 규범적 법칙의 구분에 대한 통찰은 읽을 때마다 전율감을 느끼게 한다. 이는 곧 과학과 비과학의 구분에 있어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포퍼는 이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책을 통해서 끊임없이 되살아나서 인류의 문화에 잠식하는 역사주의, 전체주의적 관점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함께 자유와 개인주의의 중요성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참 읽을 때마다 어려우면서도, 또 시간이 지나면 찾게 되는 그야말로 고전이다.
이 책에서 칼 포퍼의 역사주의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은 플라톤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물론 칼 포퍼가 플라톤에 대해서 전적으로 비판적인 견해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뒤에 이야기 하겠지만 물론 플라톤에게도 긍정적인 인식을 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와 그 후계자들의 국가에 대한 철학은 틀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플라톤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논의가 전개되다보니, 책을 보면서 "이게 플라톤 이론서야 아니면 칼 포퍼 책이야?" 싶을 정도로 플라톤의 이론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알아야 깔테니까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나도 서평을 플라톤을 중심으로 써 내려가려고 한다. - 사실 전체적인 포퍼의 아이디어를 다 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닌데 그건 솔직히 자신이 없다. -
아, 플라톤에 대해서 알아가기 전에 일단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연적 법칙과 규범적 법칙의 구분에 대한 부분부터 알아보고 시작하자. 칼 포퍼는 법칙은 2 가지 분류가 있다고 말한다. 자연적 법칙과 규범적 법칙이다. 이 법칙의 두 가지 종류는 사실 '법칙'이라는 이름을 제외하면 공통점이 딱히 없다. 자연적 법칙은 영구불변이며, 거기에는 아무런 예외도 없다. 영구 불변이며 아무런 예외도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라는 것이다. 이 말인 즉슨 맞거나 틀리거나 둘 중 하나에는 반드시 속한다는 것이다. 즉 실제로 자연에 적용할 수 있거나(이 경우 참된 진술) 적용 할 수 없는 엄격하고 일정불변한 규칙성을 갖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어떤 자연 법칙이 하나 존재한다고 해보자. 그런데 어느날 이 법칙의 예외가 발견되었다. 그럼 더이상 우리가 알고 있던 그 '진술'은 '법칙'이 아니라 '가설'이 된다. 이런 엄격한 자연적 법칙의 특성은 철저한 검증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예외'란 존재하면 안된다. 따라서 우리가 자연법칙이라고 생각하는 '진술'들은 예외가 발견되기 전까지만 '법칙'이고, 예외가 발견되면 '가설'이 되어버린다. 이 말은 동시에 '검증이 가능해야만 자연적 법칙이다' 라는 의미도 내포한다. 아예 구조적으로 예외가 존재할 수 없는 '진술'들도 있다. 예컨대, '부모는 자식을 사랑한다' 라는 진술은 검증 가능한 성격의 진술이 아니므로 자연스레 자연적 법칙이 아닌 것이다. 검증 가능성, 예외, 일정불변한 규칙성, 법칙과 가설 이라는 키워드들이 정말 흥미롭다.
규범적 법칙은 말 그대로 인간이 규범적으로 정해둔 법칙들이다. 규범적 법칙은 당연히 법적인 규정의 형태가 될 수도 있고, 도덕적 규율이 될 수도 있다. 또한 변경될 수도 있다. 진술 또한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받아들일 수 있다, 받아들일 수 없다' 처럼 가치판단의 기준으로서 존재한다. 다만 여기서 재미있는 특징은 규범적 법칙이 '의미를 갖고 있으려면', 그것은 파괴될 수 있어야 한다. 파괴될 수 없는 것은 규범화 시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월소득보다 월지출이 많아서는 안된다.' 는 규범적 법칙이 될 수 있다. 파괴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갑에 있는 돈보다 더 많은 돈을 지갑에서 꺼내지마라' 는 규범적 법칙이 될 수 없다. 저걸 무슨 수로 파괴하겠는가. 사실 규범적 법칙이 '될 수 없다'라는 것은 '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파괴가능의 여부 라는 키워드도 또한 재미있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주된 내용으로 들어가보자. 우선 플라톤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플라톤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소크라테스크의 저자이자, 아카데미아의 설립자이자 교장을 지낸 서양 철학의 거두다. 또한 귀족 계층에 속했었고, '철인정치론'이라는 국가 개념을 제시한 학자이기도 하다. 그의 철인정치론은 철저하게 계급을 분리해서 각 계급에 맞는 일만 하도록 하고, 사유재산과 귀금속을 금하고, 공동육아 제도를 시행함 등을 특징으로 한다.
이런 플라톤의 이상적 국가 개념은 그의 '역사주의'와 '자연주의' 관점에서 나온 것이다. 플라톤은 철저하게 역사주의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봤다. 그리고 세상의 역사 법칙은 '부패의 역사'라고 정의한다. 즉 자꾸만 나빠져서 언젠가는 파국에 치닿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태초에 완전한 국가가 존재했고, 그 국가가 쇠퇴하면서 명예귀족정치체제가 등장하고, 그 체제가 쇠퇴하면서 과두제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 과두제가 쇠퇴하면서 민주주의 체제가 등장하고, 민주주의 체제가 쇠퇴하면 참주정이 등장한다. 이런 쇠퇴의 과정은 인종퇴화가 발생하고, 인종퇴화가 도덕의 붕괴를 초래하고, 도덕의 붕괴가 곧 정치의 붕괴를 가져오는 매커니즘을 통해서 발생한다. '인종의 퇴화'는 말 그대로 인간이 시간이 흐를 수록 열등해진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왜 이런 소리를 하나 싶었다. 그런데 플라톤이 살던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왜 이런 소리가 나오는지 이해가 간다. 플라톤이 살던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의 조상을 '신'이라고 생각했다. 플라톤 본인의 가문은 '포세이돈'의 후손이라고 생각한 것이 단 적이 예이다. 즉 아주 옛날 조상은 신인데(이데아) 시간이 흐르면서 인종이 퇴화되어 현대에 플라톤은 인간이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됨으로써 야심과 재물에 대한 욕구가 이런 욕구가 도덕의 붕괴를 초래한다. 도덕의 붕괴는 사회적 부패를 초래하여 결국 계급투쟁으로 비화되고, 그 계급투쟁의 결과 정치 체제가 붕괴되는 것이다. 이 플라톤의 관점을 통해 우리는 왜 파시즘, 전체주의가 나오면 항상 '인종주의'가 같이 따라나오는지 알 수 있다. 히틀러의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과 순수혈통' 주창의 시발점은 바로 플라톤이었던 것이다.
또한 플라톤의 철인정치론에서 철저한 계급의 분리는 생물학적 자연주의 관점에서 나온다. 이 생물학적 자연주의의 단초는 소크라테스가 제공한다. - 물론 소크라테스는 플라톤과 이론적 노선이 다르다. - 소크라테스는 신체보다 영혼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설파한다. 영혼이 정신보다 더 중요하므로, 영혼은 본성을 결정한다는 의미도 된다. 그럼 이때 우리는 두 가지 종류의 결단을 내릴 수 있다. 모든 인간이 이런 정신적 본성을 갖고 있다고 결정할 수도 있고, 헤라클레이토스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금수처럼 배루를 채우고' 그런 고로 그들의 본성은 열등하며, 단지 몇몇 사람만이 정신적 공동체가 될 자격을 갖고 있다는 결정을 할 수도 있다. 플라톤의 선택은 후자였다. 그 결과 그는 인간의 본성의 질을 나누고, 그 본성의 질에 따라서 계급을 구분한다. 계급은 본성의 질, 즉 영혼의 격에 따라서 구분된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넘을 수 없다. 그리고 섞여서도 안된다. 이런 논리는 특정 계급 - 이성적 본성을 갖고 있다고 선택된 소수의 사람들 - 에게 주어지는 특권을 '자연적'이라며 정당화하는데 사용된다.
'자연 = 본성 = 영혼' 으로 이어지는 논리를 플라톤은 자신의 책 <국가>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가 자족할 수 없기 때문에 국가가 발생하는 거라네, (중략) 그 외에 국가에 정착하게 되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인간들은 한 부락에 여러 원조자들을 모으지 그건 그들이 많은 것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야,(중략) 그리고 그들이 한쪽은 주고, 다른 쪽에선느 받아먹고 하면서 자기들의 상품을 분배할 때는 모든 사람들이 다 이런 식으로 자기 이익을 늘려나가고자 하는 것 아닌가?" ... "본래 우리들 중의 어떤 두 사람도 똑같지는 않다. 각자는 자신의 독특한 본성, 즉 어떤 사람은 이런 유의 일에 알맞고, 어떤 사람은 저런 일에 안맞은 (중략) 독특한 본성을 갖는다. 인간은 여러 가지 기술에 종사하는 것이 나은가 아니면 단 한 가지 기술에 종사하는 것이 나은가? (중략) 분명히 각자가 자기의 자연적인 재능에 따라서 단 한 가지 직업에만 종사하는 것이 더 많은 생산을 할 수 있고, 더 낫고 더 쉬울걸세"
맞는 말 같다. 위대한 정치경제학자 애덤스미스도 자신의 저서 <국부론>에서 분업의 위대함에 대해서 논하지않았는가. 그런데 애덤 스미스의 분업과 플라톤의 분업은 그 성격이 완전 다르다. 애덤 스미스의 분업은 '숙련'에 따른 효율의 증가를 이유로 한다. 즉 후천적인 요인이므로 스스로 결정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반면 플라톤의 분업은 '본성'에 근거한다. 선천적으로 주어진 요인이므로 스스로 결정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이 분업의 대가가 누군가는 특권 계층으로서 살아가고, 누군가는 노동 계층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라면? 그런 계층의 분류를 선천적인 요인에 따라 결정한다면, 신도 아닌 같은 인간이!? 슬슬 뭐가 잘못된 것인지 인식되는가? 그렇다. 플라톤의 국가 체계는 철저하게 비평등적이고, 비인도적이다. 그리고 특권 계층으로 살아가는 좋은 본성을 타고난 사람들 조차도 사실 행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유재산도 없고, 경제적 금욕을 유지해야 하며, 자신의 아내도 없고 자신의 자식도 알 수 없다. 과연 행복하겠는가? 플라톤은 개인의 행복 따위는 중요한게 아니고, 사회 전체의 행복을 봐야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급자족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상호 연계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어차피 사회의 구성원일 수 밖에 없고 그러면 사회의 이익만 증진시키면 된다는 것이다. 솔직히 여기까지 읽고 "플라톤 또라이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런 플라톤의 급진적인 생각은 그의 삶을 보면 이해할 수 있는 결과물이다.
플라톤은 굉장히 불행한 경험을 한다. 귀족주의자인 친구는 민주 시민들에 의해서 추방 당했고, 본인의 스승은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한다. 본인도 신변의 위험이 생겨서 해외로 망명 생활을 한다. 이런 불행한 생활을 한다면, 당연히 이런 불행의 원인이 무엇일까? 에 대해서 고민했을 것이다. 역사주의 관점을 취한 플라톤의 답은 "변화"다. 변화가 문제인 것이다. 인종의 퇴화가 도덕의 상실이 부패를 부르고 이 부패가 계급투쟁을 발생시켜 결국 정치를 붕괴시키고 사회가 나락으로 치닿는 것이다. 따라서 플라톤에게 '사회의 변화 = 쇠퇴의 과정' 이라는 등식은 자연스럽다. 그럼 이제 플라톤이 할 일은 무엇일까? 변화의 추진력을 찾는 것이다. 왜? 제거해버려야 사회의 변화 같은 쇠퇴의 과정이 사라질 것이고 그래야 불행한 일들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원인은 이미 알았다. 결국 "인종의 퇴화 - 도덕의 붕괴 - 계급투쟁 - 뻥! - 인 것이다. 결국 계급투쟁을 막아야 한다. 계급투쟁이 사라지는 사회를 만들어야 변화가 사라지고 그래야 불행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계급투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플라톤이 찾은 방법이 플라톤의 국가 개념에 드러나 있다. 1. 관리해야 할 대상을 좁히는 것이다 : 계급 투쟁은 결국 개인들이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개인들을 관리해야 하는데 모든 개인을 관리하는 것은 너무 어렵다. 따라서 관리해야 할 대상을 줄여야 한다. 어떻게 줄일까? 정치에 있어서 권리를 일부 계급에게만 주고 나머지 계급은 그저 의무만 주면 된다. 그럼 나머지 계급이 가만히 있겠냐고? 권리 중에 '무기의 소지' 등 무력에 대한 권리를 포함시키면 나머지 계급은 분명 불만은 생겨도 투쟁을 할 힘은 없다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이다. 이런 생각이 바로 계급의 구조에 드러난다. 플라톤 국가의 계급은 수호자 - 전사 - 노동자 로 구성된다. 수호자와 전사 외에는 무기 소지도 불가능하고, 군사적 목적의 육체 단련도 시키지 않는다. 고로 전사는 외적으로부터 국가를 수호함과 동시에 국가의 체제를 방어한다. 결국 투쟁할 힘을 쥐고 있는 계급이 수호자와 전사 밖에 없다. 2. 관리해야 할 대상들 간의 단합 수준을 높인다 : 결국 투쟁할 힘을 쥔 계급들이 서로 반목하지만 않으면 체제는 안정된다. 그럼 이 계급들이 서로 단합하게만 하면 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본성 자체가 너무 난폭하면 안된다. 이건 뭐 이미 본성을 기준으로 계급을 나눴으니 해결이다. 그럼 단합을 할 기본적인 토양은 갖춰져있으니 환경만 만들어주면 된다. 환경은? 계급 간의 구간을 벌리는 것이다. 노동자 계급과 전사-수호자 계급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노동자들은 기본적 본성 자체가 나태하고 탐욕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불만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계급 외부의 위험 요인이 있으면 당연히 계급 내부적으로는 단합이 될 수 밖에 없다. 그야말로 비인도적인 체제다. 하지만 플라톤은 이런 비인도적인 체제가 주는 고통이 '사회의 변화'가 가져오는 불행보다 작다고 봤기 때문에 이런 체제를 고안한 것이다.
칼 포퍼는 이에 대해 플라톤이 위대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문제점은 잘 인식 했지만, 그의 치료법이 문제점보다 더 나빴다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동시대인들이 혹심한 시련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런 체제를 구상한 것이니까. 플라톤이라는 인간 자체가 자비심 없는 냉혹한 인간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로서는 불행의 원인을 밝혀내고 그 원인을 이겨내고자 최선을 다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치료법이 정말적 오류라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플라톤이 구상한 사회는 전형적인 닫힌 사회다. 이런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회로의 이행은 인류사 관점에서 굉장한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부족주의로부터 인도주의로, 전체주의로부터 개인주의로의 이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닫힌 사회'를 열망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닫힌 사회의 붕괴에 대한 반발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반발의 원인을 포퍼는 '긴장과 불안'이라고 지적한다. 긴장과 불안은 닫힌 사회의 붕괴의 결과다. 개방적이고 부분적으로 추상적인 열린 사회는 우리에게 계속 능력을 요구한다. 이때 열린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은 합리적으로 되기 위한, 적어도 우리의 감정적 사회적 욕구를 억제하려는, 그리고 우리 자신을 돌보고 책임질 능력을 말한다. 즉, 노력의 요구가 긴장을 초래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긴장이 결국 우리에게 지식과 합리성, 협동과 상호부조를 선사하고, 그 결과 우리는 생존의 기회가 증가하며 인구가 늘어나게 만든다. 우리가 받는 것들에 비해서는 나름 저렴한 대가라는 것이 포퍼의 견해고, 내 견해도 같다.
열린 사회에 대한 더 자세한 분석과 고찰은 책을 통해서 확인하길 바란다. 소크라테스, 아테네의 무역 등 꽤 많은 것들을 함께 다루고 있는데 그걸 잘 버무려서 서평으로 쓸 능력이 없어서 이정도에서 멈춰야 할 것 같다. 특히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 아주 재미있다.
후, 드디어 마지막 문단이다.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은 꽤 어려운 책이다. 책의 약 600페이지 분량 중에 300페이지가 본문에 대한 주석이니까. 포퍼 스스로도 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고전'이라는 이름에 부합하게(?) 읽는 사람이 드문 편이다. 하지만 포퍼가 플라톤의 이론을 통해 보여준 전체주의적 역사주의적 망령은 여전히 우리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일상에서 접하는 사람들의 말을 통해서도 그 망령들이 우리 사회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어렵고 딱딱한 책이지만 현대적 시민을 위한 기본적 소양을 담은 책이라는 것이다. 열린 사회는 항상 긴장과 불안을 초래한다. 하지만 그 긴장과 불안은 우리가 누리는 번영을 위해 감수해야 할 대가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 대가 지불하는 첫 걸음은 포퍼의 책을 읽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P.S 다쓰고 예약 하는데 튕겼다. 결국 다시 썼다. 울고 싶다. 처음에 썼던 글보다 아무래도 개판이다. 아 우울하다. 서글프다. 짜증난다. 아 왜 임시저장은 첫 단락까지만 되어 있는 것인가! 아! 망할! 에이!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