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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함석헌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를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한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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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한 시
                                    - 로이 캄파넬라

나는 신에게 나를 강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걸 이룰 수 있도록
하지만 신은 나를 약하게 만들었다
겸손해지는 법을 배우도록

나는 신에게 건강을 부탁했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지만 신은 내게 허약함을 주었다
더 의미 있는 일을 하도록

나는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행복할 수 있도록
하지만 난 가난을 선물 받았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나는 재능을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지만 난 열등감을 선물 받았다
신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나는 신에게 모든 것을 부탁했다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지만 신은 내게 삶을 선물했다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도록

나는 내가 부탁한 것을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내게 필요한 모든 걸 선물 받았다
나는 작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신은 내 무언의 기도를 다 들어 주셨다

모든 사람들 중에서
나는 가장 축복받은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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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풀이
                  강정연

툭 부러진 연필심
찍 찢은 공책
뻥 걷어찬 깡통
획 던져둔 가방
툭 넘어트린 인형
탁 놓은 숟가락
꽉 안아주는 두 팔
왕 울어버리는 나
확 풀리는 마음

섭섭한 젓가락 / 강정연 동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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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안 통해
                           - 김미혜

엄마, 토끼가 아픈가 봐요
쪽지 시험은 100점 받았어?

아까부터 재채기를 해요
숙제는 했니?

당근도 안 먹어요
일기부터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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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엄마가 되기 전에는 언제나
식기 전에 밥을 먹었었다
얼룩 묻은 옷을 입은 적도 없었고
전화로 조용히 대화를 나눌 시간이 있었다

내가 엄마가 되기 전에는
원하는 만큼 잠을 잘 수도 있었고
늦도록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날마다 머리를 빗고 화장을 했다
날마다 집을 치웠었다
장난감에 걸려 넘어진 적이 없었고
자장가는 오래전에 잊었었다

내가 엄마가 되기 전에는
어떤 풀에 독이 있는지 신경 쓰지 않았었다
예방주사에 대해선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누가 나한테 토하고, 내 급소를 때리고
침을 뱉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이빨로 깨물고, 오줌을 싸고
손가락으로 나를 꼬집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엄마가 되기 전에는 마음을 잘 다스릴 수가 없었다
내 생각과 몸까지도
울부짖는 아이를 두발을 눌러
의사가 진찰을 하거나 주사를 놓게 한 적이 없었다
눈물어린 눈을 보면서 함께 운 적이 없었다
단순한 웃음에도 그토록 기뻐한 적이 없었다
잠든 아이를 보면서 새벽까지 깨어 있었던 적이 없었다

 

 

아이가 깰까봐 언제까지나
두 팔에 안고 있었던 적이 없었다
아이가 아플 때 대신 아파 줄 수가 없어서
가슴이 찢어진 적이 없었다
그토록 작은 존재가 그토록 많은 내 삶에
영향을 미칠 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내가 누군가를 그토록 사랑하게 될 줄 결코 알지 못했었다

내 자신이 엄마가 되는 것을
그토록 행복하게 여길 줄 미처 알지 못했었다
내 몸 밖에 또 다른 나의 심장을 갖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몰랐었다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 감정인지 몰랐었다

한 아이의 엄마가 되는 기쁨
그 가슴 아픔
그 경이로움
그 성취감을 결코 알지 못했었다
그토록 많은 감정들을

내가 엄마가 되기 전에는...



- 199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선정된 에바토트의 시집에 실린 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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