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의 능력 - 토머스 머튼의
토머스 머튼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묵상의 능력, 원제 INNER EXPERIENCE]은 바닷속 해구처럼 그 깊이와 넓이를 가늠할 수 없는 책이다. 이 제목을 보니 나무의 뿌리 이미지가 떠오른다. 묵상은 쭉 뻗어 올라간 나무줄기와 무수한 가지보다 땅속 어두운 곳에 깊이 내려간 뿌리에 해당한다. 아무리 커다란 나무이더라도 그 줄기와 가지의 모습은 노력만 한다면 모두 헤아려 볼 수 있으나 땅 아래로 내리 뻗은 뿌리는 누가 헤아려 본다 말인가? 머튼의 묵상은 내적 경험, INNER EXPERIENCE이기 때문이다. 결코 드러나지 않지만 묵상이란 뿌리를 깊이 내린 사람은 그 삶이 풍성하다.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아니 밀리듯이' 묵상의 뿌리가 깊은 삶은 요동치 않는다.

이 책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1부에서는 묵상을 살아 있는 계시로 보는 ‘발견’이다. 2부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으로 ‘대화’라고 했으며, 3부는 영원한 안식을 얻는 삶으로 ‘동행’을 다루었다.

1.
머튼에 의하면 인간은 복잡한 상태에 놓여 있다. 상황에 마구 휘둘리고 있고 용기와 믿음을 상실했으며, 자신의 내적 자아로부터 추방당했다(p26~27). 묵상은 이와 같은 현실에서 회복할 수 있게 하는 귀중한 도구이다. 그 되찾음이 바로 영생이라는 것이다. 머튼은 기독교적 묵상을 네 가지로 요약한다. 하나, 예수를 통한 하나님과의 접촉으로. 둘, 영혼 깊은 데서 성령을 이루어가는 것. 셋, 다른 곳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분을 발견하는 것. 넷, 뜻을 경외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 접촉과 이루어감과 발견, 그리고, 순종을 통해 묵상가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깨닫는 과정을 거칠 것이다. 그렇게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단어로 ‘주입된 묵상’이 다뤄졌다. 주입된 묵상은 간접적 묵상과 대비된다. 묵상의 깊이는 인간의 노력으로는 도무지 도달하지 못할 수준이라는 것이다. 협력과 능동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무엇보다 여기에 하나님 쪽에서 밝혀주는(주입된, 넣어주는) 앎이 있다는 것이다. 주입된 묵상의 의미들을 설명하는 초입에서 머튼은 이런 말을 한다.

더 낮고 초보적인 신비적 직관은 물질계에서 나온 상징에 의존하며 거기서 배웁니다. 더 높고 온전한 묵상은 감각 이미지와 논증적 이해를 넘어서 무지의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합니다. p84

감각과 논증을 넘어서는 것이기에 그분이 주입해 주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11가지 의미들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초반부는 무척이나 혼돈스러웠다. 아무것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너무 깊어 숨이 막혀버릴 듯 했다.

2.
묵상과 기도는 그분과의 만남이자 대화의 장소이다. 머튼은 습관과 인습으로 돌아가지 말고 깨어나서 자기 안의 비실체에 초연해지라고 한다. 대화라고 했지만 머튼의 말대로 그것은 ‘씨름’과 같다. 하나님의 뜻과 사랑에 대항하는 모든 것은 완전히 부서질 때까지 놓아서는 안 되는 씨름이다. 그래서, 머튼은 감각의 어두운 밤, 영의 어두운 밤. 감각의 밤이 되어야 비로서 주입된 묵상을 시작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칠 때면 죽을 것만 같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을 먼저 경험해 본 머튼은 묵상은 몸과 마음의 해함이 없음을 확신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묵상한다고 현실에서 물러나거나 현실을 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묵상을 통해 피상적 존재를 꿰뚫어보고 그것을 넘어섭니다.” p152


3,
3부의 제목에 ‘동행’을 ‘영원한 안식을 얻는 삶’과 함께 다룬 이유를 생각해 본다. 그것은 영원한 안식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누군가와의 ‘함께 함’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머튼은 ‘묵상을 갈망하십시오’ 라고 한다. 묵상은 결코 정적일 수 없다. 그분을 묵상하는 일이고 그분이 계속 움직이고 있기에 묵상하는 나도 따라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묵상을 갈망함은 하나님을 갈망함이며 하나님을 갈망함은 그분과의 동행을 갈망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묵상은 한 번에 뛰어 오르지 못하고 차근차근 밟아가는 과정이 될 수 밖에 없다.

묵상하는 길은 길을 만들며 가는 산행과 같다. 무수한 덤불들을 헤치며 가야 하고 험한 길로 가기도 하며, 길을 한참이나 헤메이기도 한다. 그 길 찾음에는 수 없는 장애와 문제가 있음을 발견한다. 여전히 메여 있는 죄의식을 발견하기도 하고 근본도 모르고 준비되지 않은 채 나서기도 한다. 하나님의 형상 보다 자기 모습을 주장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고 자유와 진리를 무시하고 자기 의를 한참이나 드러내기도 한다.

없는 길을 만들어 가며 찾아 가야 하는 산행에서 서두르게 되면 결국 낭패를 보게 마련이다. 그 때는 차근차근 헤아리면서 나아가야 한다. 다시 돌아갈 수 도 있겠지만 장애물들과 내 안의 문제들을 정리하지 못하면 어리석은 내적 자아 속에서 헤메이다가 그만 갇혀 버리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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