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사랑한 일본장수, 김충선 다문화 인물시리즈 7
노자은 지음, 이은혜 그림 / 작가와비평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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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은

중앙대학교 청소년학과 및 같은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관계, 신뢰와 같은 사회적 자본에 대한 관심을 토대로 현재 관련 대학 강의와 연구를 진행 중이다.<한국사회의 소수자들 : 결혼이민자>,<한국사회와 다문화>,<그림과 사진으로 보는 다문화 한국사 이야기>를 썼으며, <청소년의 신뢰 : 구체적신뢰, 일반신뢰, 공적신뢰>,<청소년 다문화수용성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국내 거주 중국 동포 청소년의 사회적 관계망에 대한 질적 연구>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김충선 장군은 조선 시대에 발발한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로 귀화한, 조선의 문물을 사랑한 사야가라는 일본인 장수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의 삶을 다문화 시대에 맞춰 재조명하고자 합니다. 이시도의 전제는 첫째도 둘째도 김충선 장군은 외국인이라는 것입니다. 조선은 외국인인 사야가에게 주요 관직을 제공하고, 그가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외국이인 사야가는 김충선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국가에 힘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고, 그러면서도 더욱 겸손하고자 하였으며, 주변인과의 조화로운 삶을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녹동서원과 김충선 신도비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귀화한 모하당 김충선 장군을 그리며 기억하기 위해 정조 13년에 세웠지만, 흥선대원군이 치워 없애라는 명령을 내려 1884년에 사라지게 되었어요. 시간이 흐른후 1914년에 다시 세울 수 있게 되었고, 좀 더 이후인 1971년에 원래의 장소에서 100m정도 떨어진 현 위치로 옮겨 늘려 지었답니다. 이 지역안에는 겹처마 팔자지붕의 강당과 겹처마지붕의 녹동사, 향양문, 그리고 임진왜란 40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신도비가 있습니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길218로 )

 

 

 

일본은 당시 조선의 부산성을 침략하기 위해 조총부대를 준비시켰는데, 그 선봉장으로 사야가, 즉 김충선 장군을 내세웠단다. 사야가 장군이 이번 전쟁에 찬성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일본군 지휘부는 장군의 가족을 볼모로 잡고 장군에게 출병하여 이 침략 전쟁을 이끌 것을 협박했어.

상부로 부터 그러한 명령을 받았을 때 장군님은 조선으로 귀화할 결심을 하신 상태였단다. 이미 가족은 볼모로 잡혀 있었고,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위험한 전쟁에 가족을 모두 데리고 출병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어. 결국 조선으로 귀화하셨고, 이후 일본군을 상대로 한 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셨단다. 이 사실이 일본에도 전해졌지. 일본 입장에서 배신자인 자신의 가족을 일본에 있는 다른 장수들이 그냥 놔둘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장군님은 단 한 번도 일본에 건너가지 못하셨어.

사야가는 왜군들에게서 가져온 조총으로 조선군을 훈련시켜 조총부대를 만들었어요. 그는 자신감이 덜어진 관군을 격려하면서 한편으로는 스스로 참여한 의병들을 끌어들여 부대를 새롭게 훈련시켰어요. 이때 조총의 사용법뿐만 아니라 조총과 화약 만드는 기술을 전했답니다. 이후 조총으로 장비를 갖춘 조선의 군사들은 겨우 1년도 지나지 않아 일본군과 비슷하게 맞서서 싸울 수 있게 되었답니다.

평생 학문을 닦으시며 후학을 양성하셨다. 그리고 조선에 오신지 50년이 흐른72세에 제2의 고향인 조선에 묻히셨다.

김충선 장군은 일본의 가족을 등지고 조선에 정착하면서 안타까운 조선군사의 조총과 화약등 만드는 기술 사용기술을 알려주면서 임진왜란을 같이 치룬 조선의 장군이였다. 가족의 미안함으로 일본에 가보지 못하고 우리나라에서 마지막을 보내시면서 후학을 양성하시는데 힘쓰신 분이시다. 헌데 일본사람이란 이유로 많이 알려지지않아서 안타깝다.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서 너무 즐거운 독서였다. 우리나라를 지키기위해 많은 분들이 희생하신거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출판사로 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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