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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위로 - 산책길 동식물에게서 찾은 자연의 항우울제
에마 미첼 지음, 신소희 옮김 / 심심 / 2020년 3월
평점 :

런던의 겨울을 기억한다. 서울의 겨울과는 달리, 런던의 겨울은 습해서 새벽이면 마당의 잔디를 온통 은색으로 물들였다가 해가 나면 점차 원래의 겨울 풀빛 색을 찾아간다. 해가 난 곳과 그늘진 곳의 극명한 차이를 좇아, 점차 해가 은색 구슬들을 녹이는 장면이 좋아 주말 아침이면 한참 동안 창밖 정원을 내다보는 것이 일상이었다.
영국의 겨울은 날이 정말 짧다. 그리고 습하다. 그래서 저자가 말하는 겨울의 멜랑콜리를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저자는 우울증을 앓고 있는 동식물과 광물, 지질학을 연구하는 박물학자이다. 디자이너이자 창작자, 일러스트레이터이기도 하다. 책은 10월에 시작해 9월에 끝난다. 1월부터 12월이 아니다. 이 책은 저자가 우울증을 앓아왔던 지난 25년간 터득한 겨울나기의 비법서 같다고나 할까? 10월에 시작하는 이유는, 아직 겨울이 오기 전인 10월에 마음의 겨울나기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저자의 표현과는 달리 우리는 책에서 그녀의 역동적인 모습을 발견한다. 철새를 찾아 밤중에 갑자기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고, 매일 반려견과 함께 숲을 탐험한다. 영국의 겨울 날씨가 그녀의 우울증을 심하게 만들었다면, 영국의 자연은 그녀를 치유한다.
숲의 치유 능력은 비단 그들의 화학작용에만 있는 것 같지 않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도 이렇게 부지런히 피어나는 생명력. 아스팔트 사이에도 비집고 씨앗을 뿌리고 뿌리를 내려 피어나는 그 끈질김에도 있지 않을까?
책에 묘사되는 풍경과 동물과 식물을 나는 열심히 머릿속에 그려본다. 영국의 야생은 내가 본 적이 없는 것들이 많기때문에 쉽게 상상이 되질 않는다. 그러다가 간혹 저자가 그린 스케치나 세밀화 또는 사진이 나오면 그 상상의 실체를 마주하고 감탄을 금치 못한다.
이렇게 온전히 마주한 자연은 마음속에 저장되어 몇 날 며칠을 야금야금 꺼내 먹게 된다. 깜깜하고 인적이 없는 밤하늘에, 별자리도 잘 모르지만 쏟아질 것같이 많았던 별들. 뒷산을 산책하다 만난 까치를 닮기도 하고 참새를 닮기도 했던 어치를 만난 일. 아이와 산책하다가 딱따구리가 구멍 낼 곳을 다듬고 톡톡 찧어보는 모습을 발견했던 일. 가을 산길에 잘 익은 도토리가 톡 데구르르 굴러가던 소리. 이런 기억들을 우리는 힘든 순간이면 하나씩 열람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나에게는 거동이 불편하신 시이모님이 계시다. 혼자서 자연에 나갈 수가 없고, 나무와 하늘이 보이지 않는 방에 살고계신 분. 가끔 바람을 쐬어드리고 아이들을 보여드리고 바다와 산을 보여드리고 나면 그 기억으로 몇 달이 행복하신 분. 그분께 이 책을 선물하고 싶다.
계절은 어느 한순간 찾아오지 않는다. 야생은 보이지 않는 땅 밑에서부터 열심히 다음 계절을 준비한다. 겨울에 이미 땅속의 구근이 봄을 준비하며 기지개를 켜듯이, 저자가 겨울이 다가오기 전 야생의 기운을 머리와 가슴에 저장해 겨울을 준비하듯이,
한창 겨울일 누군가의 마음도 그 계절을 지나, 봄을 준비하는 땅속처럼 생명의 기운이 꿈틀대기를, 겨울을 지나 봄의 색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음울한 계절이면 내가 찾아다니는 이런저런 사소한 광경이 있다. 미세한 식물학적 지표들, 결국에는 봄이 오고 말 거라며 나를 안심시켜주는 기분 좋은 신호들이다. 지난달에 나타난 사양채와 갈퀴덩굴 새순처럼 이 꽃차례 배아도 그런 신호 중 하나다. 봄은 오고야 말 것이다. 밤은 짧아질 것이며 내 생각들도 다시금 밝아지고 가벼워지리라. 나는 한동안 개암나무 곁에서 머뭇거린다. (p.61)
나는 우울증에 붙들릴 때마다 내가 가진 모든 무기를 동원해 맞서 싸우고, 간신히 벗어나 서서히 회복하며 다시 인생을 살아나가려 애쓴다. 벗어날 수 없는 진 빠지는 악순환이지만, 오늘도 나는 굳건하게 견디고 있다. 나는 우울증을 일관된 하나의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p.175)
다음 날은 기분이 좋다. 우울증과 함께 산다는 게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 인정하면서 마음이 한층 가벼워진 것 같다. 나는 애니에게 목줄을 채워 오두막 뒤쪽 숲으로 걸어간다. (p.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