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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ㅣ 앨리 스미스 계절 4부작 1
앨리 스미스 지음, 김재성 옮김 / 민음사 / 2019년 3월
평점 :
앨리 스미스의 사계절 연작 중 첫 번째 작품, 『가을』
네 개의 계절 중 가을은 곡식과 열매를 수확하는 풍성한 계절이면서 나뭇잎이 물이 들고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계절, 춥고 혹독한 겨울을 대비해야 하는 계절이다. 분주하고 기쁨이 있는 계절이지만, 쓸쓸함과 고독함도 있는 계절이다. 제목이 『가을』인 이 책은 무엇을 다루었을까.
이 책은 '최초의 포스트 브렉시트 소설'이라고 평을 받고 있다.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으로서 브렉시트의 중요성을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으로는 알지 못하겠다. 나에게는 유럽이 원래부터 쪼개지고 짜개졌던 소국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던 대륙으로 보인다. 한때 알렉산더 대왕이 속전속결로 유럽과 아시아를 통합하며 새로운 국가를 만들었지만, 알렉산더가 죽자 제국은 흐지부지되고 다시 잘게 쪼개졌다. 그다음 로마도 몇 세기 간 번창했지만, 아시아에서 도미노 효과처럼 밀려온 이민족에게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유럽연합은 무엇인가. 19세기 말에 태어나서 낭만주의가 정신과 육체에 밴 20세기 정치 원로들이 구상해 냈다. '분열된 나라들을 한데 통합하자' 이런 구상도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사지로 몰아넣은 제1, 2차 세계 대전 속에서 피어났다. 그래서 나는 유럽연합이라는 기구가 어딘지 낭만적이다. 분열되고 피비린내 나며, 비인간적인 사태를 종식시키기 위해 유럽의 각 나라와 서로 미워하는 국민들을 통합하고, 화합해 평화를 위해 함께 나아가자는 것이 이상적이고 낭만적이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느껴지는데.
세상에 존재한 지 100년도 안 된 유럽연합이어서, 사실 영국이 유럽연합을 떠난다고 했을 때 그게 그렇게 큰 문제인지는 몰랐다. 단지, 유럽 대륙과 오가는 게 힘들겠네, 정도로만 인식했다. 하지만 영국을 비롯해,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의 상황이 꽤나 심각했다. 단지 유럽연합을 떠나는 문제가 아니라, 그곳 사람들의 자존심의 문제, 신념의 문제, 역사관과 가치관의 문제였던 것이다.

앨리 스미스의 『가을』은 외부자가 아닌 내부자가 쓴 소설로 영국 사람들의 분열된 정신과 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해하기 쉬운 날 것 그대로의 표현은 아니라서, 기본적인 영국의 상황과 현대 역사와 문화를 잘 모르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영국인 특유의 언어유희도 많다. 우리 말로는 그 언어유희의 느낌을 살려내기가 힘든데, 번역가분이 고생 고심 많이 하셨을 것 같다. 또 우리에게 낯선 인물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폴린 보티라고, 영국 팝 아트의 히로인 같은 인물이다. 이 사람의 작품이 『가을』에서 많이 언급된다. 화가, 폴린 보티는 당시 영국에서 유명세를 치르긴 탔지만, 여자라는 한계 특히 너무나 예쁜 여성이라는 것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시대를 풍자한 문제작을 많이 제작했으나 폄하되고,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미국 팝 아트의 아류로 취급받음). 아무튼 우리에게 낯선 인물과 그 사람과 관련한 저작들이 『가을』 안에서 느닷없이 곧잘 등장해 곤혹스럽게도 하고 그랬다.

화가, 폴린 보티
그런데 생각해 보면, 실제 앨리 스미스의 의도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폴린 보티처럼 자신의 소설도 콜라주 형식으로 그려내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처음 읽으면 전체 맥락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난해하고 어렵지만, 일단 전체 모습과 작가의 제작 의도만 이해하면 부분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앨리 스미스의 『가을』은 일회독으로 덮을 책이 아니라, 재독을 해야 하는 책이다.
또 각 장이 읽고 나면 전체적으로 이어진 느낌이 드나, 그럼에도 분열된 느낌은 지울 수 없다. 현재 영국의 분열된 상태를 묘사한 것이려나. 그런데 이 분열이, 그렇게 낯선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의식도 분열되고 쪼개져 있다. 하나에 깊게 집중하는 사람이 드물며, 보통의 집중은 몇 분 간만 지속되며 오래 지속되어도 한두 시간을 넘기 힘들다. 그런 상태를 작품의 '형태'로 조각해 내지 않았나 싶다. 우리는 현재에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과거로, 더 과거로 같다가, 오늘 있었던 조금 전의 과거로 쉴 새 없이 왔다 갔다 한다. 또 겪지도 않은 미래도 생각한다. 어쨌거나 우리의 의식이 그렇고, 기록되는 역사 역시 이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본다. (그래도 작품으로 읽기에는 벅참 ;ㅅ;)
앨리 스미스의 『가을』은 소녀와 노인의 존재의 연결을 나타내었다. (어느 글에서 '우정'이라고 표현되었던데, 사실 '우정'이라고 하기는 애매하다. 소녀는 노인을 사랑했다. 오해의 여지가 있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존재의 사랑이라고 할까, 좀 흔히 사용되는 '사랑'이 아닌 다른 '사랑'이다)
노인은 소수자의 상징이다. 소녀의 엄마는 노인을 편할 대로 이용하면서도 편견을 놓지 않고 노인이 없는 곳에서 비난하고 딸에게 편견을 주입하는데, 나중에 소녀의 엄마는 변한다. 난민을 비롯한 소수자의 권리를 위해 거의 투사급 인물로 변하는데(부당한 공권력에 기압계 힘껏 던지기 ㅋㅋ), 소녀의 엄마가 바로 영국의 일반 국민을 상징한다. 소녀는 소수자와 편견을 가진 일반 사람들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소설의 마지막은, Winter is coming을 예고하나, 동시에 희망도 흩뿌려 놓았다. 혹독한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 한 계절 쉬지 않으면 식물은 웃자라기만 하고 실속은 없을 것이다. 겨울은 힘듦의 계절이자 동시에 희망의 계절이다. 영국인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 저자 앨리 스미스의 바람처럼 소수자를 포용하고 인정하는 그런 길을 선택해 따스하고 행복한 봄을 맞이할지 궁금하다. 다음 시리즈도 기대한다.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19세기 낭만주의가 다시 한 번 부활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