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도리스 되리, 김라합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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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평 : 피맛 감도는 달콤 쌉쌀한 이야기



나는 대부분의 현대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작가가 죽었다고 하면 읽어볼만 하다. 죽은 후에도 계속 출판될 정도라면, 작품성이 어느 정도 보장된 것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이런 생각은 옳다. 요즘의 소설들은 너무 가볍거나 작가의 철학적 이상 때문에 숨이 막힐 정도로 형이상학적이어서 나에게 그런 책들은 무의미하다. 매번 냉소적으로 책을 덮는다. 좋은 작가가 등장했다고 해도 아껴두고 작가가 죽을 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한다. 죽은 후에 출판될 때까지. 물론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고, 지금처럼 책을 읽을 수 있는 건강한 눈과 책에 대한 호기심, 열망이 있다면 말이다.


그러던 중에 이 책을 읽었다.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았는데 푹 빠져 읽었다. 한 장 한 장 읽는 게 아까울 정도. 이렇게까지 현대 소설이 마음에 들었던 적이 있나 싶었다. 한 인간의 감정과 마음, 관계에 대한 생각이 날것 그대로, 현실적이었고 사실적이다. 허구의 소설일 뿐인데 진정성이 느껴진다. 모든 소설은, 이런 사실적 느낌과 진정성이 느껴져야 작품(作品)이라고 본다.


책 내용이 조금은 오래되었다. 휴대폰이 아니라 전화기를 사용한다. 국제 통화를 할 때는 전화 교환원이 등장한다. 그래서 원서가 언제 쓰였는지 찾아보니까 1991년이다. 28년 전의 작품인데, 몇 몇 소품을 제외하면 상당히 감각적이고,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졌다. 좋은 소설은 이래야 하지 않을까. 아무튼 1991년이면 28년 전이긴 해도, 세기로 따지자면 한 세기 전 작품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도 고전소설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상당히 현실감각이 넘치는 고전소설. 정말 마음에 들고 좋다.




이 책은 총 18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단편집이다. 하지만 파니 핑크를 중심으로 한 주변 인물의 이야기들이 시간 순으로 배치된 연작 단편들이다. 하나의 이야기가 하나의 조각으로, 조각들을 이어붙이면 하나의 조화로운 조각보가 탄생하듯 이 단편집도 어떻게 보면 하나의 장편소설 느낌이다. 우리의 인생도, 그때그때 기억나는 것들로 우리 삶을 규정하고, '나는 이런 인생을 살아왔어'라고 말하듯 그런 느낌으로 다가왔다. 단편들은 이어지지 않고 조각나 있지만, 등장인물이 겪었을 특정 경험, 특정 감정들로 소설 속 파니나 안토니아, 샤를로테 그리고 그녀들과 만났던 남자들의 모습이, 그들의 인생의 전체적 윤곽이 그려진다.


사실 이 소설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영화 <파니 핑크>의 원작 소설이다. 감독과 소설 저자가 같은 사람이다. 도리스 되리. 나는 독일인은 뭔가 무뚝뚝하고, 자기 감정은 억누르고 잘 드러내지 않는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는데, 이 소설을 읽고 이런 생각/편견이 깨졌다. 상당히 섬세하다. 도리스 되리는 자기가 느끼는 감정이나 생각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간직해 있다가 그걸 풀어내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사소한 감정도 작가가 그걸 온전히 느끼지 않았다면 결코 쓸 수 없는 내용들이 많았다. 나는 이런 부분들이 참 소중하게 느껴진다. 나도 언젠가 이런 감정을 느꼈는데, 나만 느낀 게 아니구나라고 위로되는 그런 느낌. 나 혼자 동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느끼는 것을 나도 느끼는 구나 싶어 안심이 되는 그런 부분이 있다.


이 소설은 대부분 관계의 이야기다. 대체로 여주인공과 그 여주인공이 만나는 남자의 이야기다. 도리스 되리는 여성의 심리도, 남성의 심리도 잘 그려냈다. 개인적 느낌으로는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인간과 시대를 통찰하는 거창한 뭔가는 없지만, 개인의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현미경처럼 잘 드러냈다고 본다.


쉽게 사랑에 빠지는 파니(그런 만큼 쉽게 떠나는 파니),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곧잘 넘어가고, 욕정에 못이겨 여성들에게 집적거리는 남자들이나, 남자들의 관심을 싫어하는 않는 여성들, 이제 드디어 사랑을 만났다고 느끼고 진짜 사랑을 하는데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에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싸우고, 실컷 울다가 곁을 떠나지 않고 자기를 위로해 주는 상대방에게 더없는 사랑과 위로, 안정감을 느끼고 더 큰 사랑을 느끼게 되는 사람, 그런데 이런 만족감의 간격이 점점 짧아지고 고독과 외로움은 더 커져서, 더 자주 싸우고 더 심하게 폭력적이 되어가고 더 많이 울어야 하는 비극의 반복이 지속된다. 짧은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 불행과 비참함을 끌어들이는 사람들.


피맛이 약간 감도는 달콤쌉싸름한 인생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1991년에 쓰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감각적이고, 좋다. 새삼 도리스 되리의 감각에 감탄한다. 사랑과 남여의 관계에 대한 낭만주의적 관념에 회의를 품고 있는 사람, 인간의 감정과 심리를 사실적으로 풀어 쓴 글을 좋아하는 분들께 강추한다. 오래도록 아끼고픈 책이다. 강추!



+ 국내 출판된 도리스 되리의 책들이 다 절판된 상태인데,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를 펴낸 김에 문학동네에서 도리스 되리의 다른 책들도 다 재출간해주면 좋겠다.


+ 개인적으로 번역이 마음에 들어서, 이 책을 번역한 '김라합' 번역가님의 책을 되는 대로 다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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