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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그 유골을 먹고 싶었다
미야가와 사토시 지음, 장민주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1월
평점 :
복잡다단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바로 부모님 아닐까 싶다. 부모님 중에서도 바로 엄마.
엄마에 대한 나의 마음은 상당히 복잡하고, 엉킨 실타래 같다. 나와 완전히 다른 존재이면서도, 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내 존재의 일부. 나는 엄마 없이도, 앞으로 엄마를 안 보고서도 잘 살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내 마음 한 편에선 엄마에 대한 생각, 엄마에 대한 걱정을 놓지 않는다. 나의 마음은 왜 이런 걸까. 자식들의 마음은 나와 다 비슷할까.
엄마가 학교 다닐 때 공부를 곧잘 하셨다는 말을 들었다. 엄마에게도 듣고, 외가 친척 여러 분들께 들었다. 실제로 내가 겪은 바, 엄마는 머리가 좋으시다. 암기력이랄지, 지혜랄지, 통찰력이랄지 내가 아는 누구보다도 좋다. 원리라든지, 규칙이라든지 무엇이든 룰을 빨리 파악하시는 편이라 그런 것 같다. 판단력이나 실행력도 좋으시다. 다만 문제는 아버지에 관한 문제라면, 머리로는 알면서도 인정(人情) 때문에 늘 마음이 약해져서 최선이 아닌, 항상 차악의 선택을 하셨다. 분명 어떤 선택이 최선인지 알면서도... 어쨌든 엄마의 노력 덕분에 최악은 피해 왔고, 가끔 차악은 겪으며 여기까지 왔다. 큰일이 일어났지만 그럭저럭 잘 헤치며 여기까지 왔다. 만약 엄마가 없었다면 내가 어떤 삶을 살았을지 알 수 없다.
엄마가 우리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엄마는 어떤 삶을 사셨을까? 아버지에 대한 원망, 엄마에 대한 측은한 마음이 커질 때면 이런 상상을 해보는데, 내 상상 속의 엄마는 소박하고 검소하게 살지만, 그럼에도 평생 돈 걱정 없을 만큼 돈이 들어오는 시스템을 갖춰놓고 여유 있게 사는 그런 여성이다. 한마디로 복이 있는. 우리 외할머니가 그런 분이셨다. 그러나 실상, 경제력 없고, 돈 감각 무딘 남편을 만나 결혼 처음부터 지금까지 고생을 하셨다. 지금 정도의 살림을 꾸리는 것도 모두 기적 같은 일로 모두 엄마 덕분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무척 고마운데, 그러면서도 동시에 답답하면서도 서글프고, 또 안타까우면서 때로는 화가 나기도 한다.
이런 마음들 때문에 세상에서 나랑 심적으로 가장 가깝고 허물없는 존재가 엄마이면서도,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다 말할 수 있어도 엄마에게는, 엄마라서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거부감, 거리감. 사람의 마음이 자석이라면, 엄마에 대한 내 마음은 엄마를 끌어당기면서도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면 밀어버리는 순식간에 극이 바뀌어 버리는 자석 같다.
이런 마음 오직 나만 드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제목이 꽤나 꺼림칙하지만 일본 소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영화와 애니메이션도 있다)을 아시는 분이라면, 대략 위 제목이 어떤 뜻으로 쓰였는지 알 것이다. 저자가, 그의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너무 슬프고 또 살아생전 엄마를 너무 사랑하고 좋아해서 그 유골을 먹고 싶었다는 뜻이다(놀랄 건 없다, 저자는 생각만 이렇게 했을 뿐 실제로 먹지 않았고, 형의 반대로 어머니 유골을 집으로 모시지도 못했다).
이 제목만 보면 아들이 지극한 효자에, 늘 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퇴근하는 길에 엄마에게서 전화가 오면, 운전하는데 위험하다는 핑계로 일부러 받지 않는다(여자친구에게 전화가 왔다면 전화를 받았을 걸로 생각한다). 새벽에도 안 주무시고 자신을 기다리고 계셨던 엄마를 보면, 반가우면서도 와락 짜증이 밀려와 저자는 엄마에게 잔소리를 한다.
그러다 어느 날 저자의 엄마는 말기 암 판정을 받는다. 그때 저자도 함께 있었다. 검사 결과 듣기 무서우니 같이 가자는 엄마의 청 때문이었다. 저자는 의사의 설명을 듣는 순간에도 일상의 잡다한 일처리를 생각하며, 엄마가 입을 가리고 놀라는 모습을 보고는 제3 자의 모습을 지켜보듯 엄마의 습관을 생각한다. 그리고 담담하게 일을 잠시 쉬고 엄마의 병간호를 할 생각을 한다.
저자의 어머니는 그때 이후로 2여 년간 항암 치료를 받았다. 어머니가 편찮으시기 10여 년 전, 저자는 혈액에 문제가 있어 크게 아팠다. 이식 수술까지 받아야 하는 큰 병이었다. 그때 저자의 어머니는 긍정적이고 강했다. 저자가 완쾌되는 것은, 그의 엄마는 당연한 일인 듯 행동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10년 후 막상 당신이 편찮으시니, 자꾸 죽음을 이야기하고, 삶을 정리하며 죽음을 준비하신다. 그런 엄마의 모습에 저자는 화가 났다.
저자로서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건 상상도 하기 싫고 정말 원치 않는 일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래도 어머니에게 내는 화는, 어머니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로 거꾸로 돌아와 비수가 되어 꽂혔고 스스로가 괴로웠다.
당시 저자의 곁에는 ‘마리’라는 마음씨 좋은 여자친구가 있었다. 마리는 치료로 지친 어머니와 간병으로 지친 저자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 주고 모자간에 서로 감정 상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어느 날 저자는 어머니에게 마리와 결혼을 할지 말지 그 고민을 털어놓는데, 암이 뇌에까지 퍼져서 제대로 말도 글도 쓰지 못하던 어머니가 마지막 힘을 내어 쓴 듯한 글을 저자와 마리에게 준다. 결혼하라는 뜻의 글.... 얼마 후 저자와 마리는 결혼을 하고, 얼마 후에 어머니는 돌아가신다.
저자는 아내 마리와 고향에서 생활을 조금 더 이어가다가 그 생활을 정리하고 도쿄로 상경했다. 고향에는 돌아가신 어머니와의 추억이 많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도쿄에서 만화 그리는 일에 집중한다. 처음에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생각이 자주 떠올랐지만, 점점 일상으로 회복하게 되었고 그러는 동안 자신의 작품은 인기리에 연재되었고, 어떤 작품은 영화화, 어떤 작품은 애니메이션화 된다.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부끄럽지 않은 그런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저자는 20대 때 크게 아팠다. 혈액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수술 동의서에는 생식 기능 부전 가능성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그는 자식을 낳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술 전에 정액을 채취하는 일에도 반대했다. 그냥 살아만 있어도 좋다고. 하지만 당시 저자의 그런 생각에 크게 화를 낸 사람은 그의 엄마였다. 어머니는 화 한 번 내지 않고 늘 씩씩하고, 밝고 자신감 넘쳤는데 이때 딱 한 번 화를 낸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후손은 가져야 한다고.
어머니의 선경지명일까, 어머니의 바람 덕분일까. 그렇게 어머니가 고집해서 받아 두었던 정액으로 저자는 아내 마리와 체외 수정에 성공해서 소중한 딸아이를 낳는다. (어머니가 그때 역정을 내지 않고, 그래서 정액을 채취하지 않았다면 저자는 딸을 낳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저자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딸아이에게 부모 된 마음으로 편지를 쓴다.
하나에게
내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이제 2년 가까이 되었다.
요즘엔 얼마간의 여유도 생겼는지
만약 내가 죽는다면....
이런 상상까지 해본다.
이 편지는 주로
남겨진 사람에게 건네는 조언이다.
만약 모두들 슬퍼해준다면 부디
진이 빠질 때까지 펑펑 울기 바란다.
그것도 잠깐 동안의 일이니까.
그보다 나는
‘죽음’은 순서라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차례가 돌아오는
예방주사 같은 것.
언젠가 나도 죽어서
이 세상에서 갑자기 사라질 테고
무르고 새하얀 뼈만 남게 되겠지.
하지만 그때가 되면 아프거나 힘들거나 하는
세상의 일에서
해방된 후일 테니
나쁘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 나를 불쌍하게 여기지는 않아도 된다.
네가 몹시 슬픈 이유는
틀림없이 아직 네 안에 ‘죽음’과 ‘외로움’이
뒤섞여 있는 상태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1년쯤 지나면
‘죽음’을 외로움과 떨어트려 놓고
조금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죽음’의 정체를 알게 되면
그 외로움도 조금씩 치유되어 갈 거야.
‘시간이 약’이지.
나는 네가 ‘죽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의식을
가지기 바란다.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할수록
‘죽음’에는 의미가 더해져 간다.
나도 요새 어쩐지
죽음에는 에너지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부모의 죽음에는
아이의 인생을
움직일 정도로
엄청난
힘이 있어.
슬프다, 슬프다 하면서 울다가
정신 차려보면 어느새 새로운 일들이 시작되고
또 흘러가고 있을 거야.
어느 날의 이별 경험이
슬픔에 주저앉은
너의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올릴 거야.
그러면 너는 다시 바빠질 테고.
바쁜 것은 행복한 일이니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기를.
나의 죽음이 너의 페달을 밟게 한다.
나의 죽음이 너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나는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너의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저자는 이제 도쿄에서 성공한 만화가가 되었다. 직접적인 표현 없지만 저자가 아이에게 쓴 편지를 보면, 어머니의 죽음과 그로 인해 도쿄에서의 새로운 삶이 그에게 원동력이 되었고, 그래서 더 일에 몰입해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저자는 살아생전 어머니에게 화를 낼 때도 있었고, 짜증을 낼 때도 있었고, 어머니의 소소한 행동들을 귀찮아하기도 했다. 이런 감정들은 누구나 한 번쯤 부모님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아닐까 싶은데 가까워서, 사랑해서, 애틋해서 느끼는 감정이며서 또 부모님을 밀어내고 독립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보통 포유류의 많이 종들이 이렇게 독립한다)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런 복잡다단한 감정들이 드는 것 같다.
이 작품을 읽고 엄마의 존재에 대해, 엄마에 대한 내 마음을 다시 생각해 본다. 일부러 생각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읽다가 보면 저절로 나의 엄마가 떠오른다. 나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이든 이 작품을 보면 누구나 자신의 엄마가 절로 생각날 것이다. 돌아가셨든, 아직 살아계시든 간에 말이다.
내 몸은 엄마의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쩌면 그래서 아까 자석을 예로 들었듯이, 어느 정도 가까워지면 곧바로 같은 극끼리 밀어내려는 작용이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일어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가족끼리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서로 좋을 만큼만, 서로 이해할 수 있을 만큼만, 서로 각자 선택의 자유 여지는 어느 정도 줘가며 신경 쓰고 보듬어줘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게 또 가족이라서 마음대로 잘 안되지만...
어쨌든 가볍게 가볍게, 시원하게 시원하게 살아가고 싶다. 저자가 아팠을 때 씩씩했던 그의 어머니처럼.
덧붙임)
사실 인간이 같은 인간을 먹는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로, 남태평양 어느 섬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추모의 의미로 그 사람의 육신을 먹었다고 한다. 문제는 그곳의 풍토병으로 정신 질환이 있었는데, 인도주의적 정신을 가진 의사가 그들의 병을 치료하고자 환자의 뇌를 검사해 보았다. 그 결과 그들의 뇌는 광우병에 걸린 소의 뇌와 비슷했다고 한다. 소가 소를 먹어서는 안 되듯, 인간도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혹은 싫어하더라도) 인간을 먹어서는 안 된다. 윤리적으로 문제이고 의학적으로도 아주 큰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