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그 유골을 먹고 싶었다
미야가와 사토시 지음, 장민주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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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다단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바로 부모님 아닐까 싶다. 부모님 중에서도 바로 엄마.


엄마에 대한 나의 마음은 상당히 복잡하고, 엉킨 실타래 같다. 나와 완전히 다른 존재이면서도, 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내 존재의 일부. 나는 엄마 없이도, 앞으로 엄마를 안 보고서도 잘 살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내 마음 한 편에선 엄마에 대한 생각, 엄마에 대한 걱정을 놓지 않는다. 나의 마음은 왜 이런 걸까. 자식들의 마음은 나와 다 비슷할까.


엄마가 학교 다닐 때 공부를 곧잘 하셨다는 말을 들었다. 엄마에게도 듣고, 외가 친척 여러 분들께 들었다. 실제로 내가 겪은 바, 엄마는 머리가 좋으시다. 암기력이랄지, 지혜랄지, 통찰력이랄지 내가 아는 누구보다도 좋다. 원리라든지, 규칙이라든지 무엇이든 룰을 빨리 파악하시는 편이라 그런 것 같다. 판단력이나 실행력도 좋으시다. 다만 문제는 아버지에 관한 문제라면, 머리로는 알면서도 인정(人情) 때문에 늘 마음이 약해져서 최선이 아닌, 항상 차악의 선택을 하셨다. 분명 어떤 선택이 최선인지 알면서도... 어쨌든 엄마의 노력 덕분에 최악은 피해 왔고, 가끔 차악은 겪으며 여기까지 왔다. 큰일이 일어났지만 그럭저럭 잘 헤치며 여기까지 왔다. 만약 엄마가 없었다면 내가 어떤 삶을 살았을지 알 수 없다.


엄마가 우리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엄마는 어떤 삶을 사셨을까? 아버지에 대한 원망, 엄마에 대한 측은한 마음이 커질 때면 이런 상상을 해보는데, 내 상상 속의 엄마는 소박하고 검소하게 살지만, 그럼에도 평생 돈 걱정 없을 만큼 돈이 들어오는 시스템을 갖춰놓고 여유 있게 사는 그런 여성이다. 한마디로 복이 있는. 우리 외할머니가 그런 분이셨다. 그러나 실상, 경제력 없고, 돈 감각 무딘 남편을 만나 결혼 처음부터 지금까지 고생을 하셨다. 지금 정도의 살림을 꾸리는 것도 모두 기적 같은 일로 모두 엄마 덕분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무척 고마운데, 그러면서도 동시에 답답하면서도 서글프고, 또 안타까우면서 때로는 화가 나기도 한다.


이런 마음들 때문에 세상에서 나랑 심적으로 가장 가깝고 허물없는 존재가 엄마이면서도,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다 말할 수 있어도 엄마에게는, 엄마라서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거부감, 거리감. 사람의 마음이 자석이라면, 엄마에 대한 내 마음은 엄마를 끌어당기면서도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면 밀어버리는 순식간에 극이 바뀌어 버리는 자석 같다.


이런 마음 오직 나만 드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제목이 꽤나 꺼림칙하지만 일본 소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영화와 애니메이션도 있다)을 아시는 분이라면, 대략 위 제목이 어떤 뜻으로 쓰였는지 알 것이다. 저자가, 그의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너무 슬프고 또 살아생전 엄마를 너무 사랑하고 좋아해서 그 유골을 먹고 싶었다는 뜻이다(놀랄 건 없다, 저자는 생각만 이렇게 했을 뿐 실제로 먹지 않았고, 형의 반대로 어머니 유골을 집으로 모시지도 못했다).


이 제목만 보면 아들이 지극한 효자에, 늘 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퇴근하는 길에 엄마에게서 전화가 오면, 운전하는데 위험하다는 핑계로 일부러 받지 않는다(여자친구에게 전화가 왔다면 전화를 받았을 걸로 생각한다). 새벽에도 안 주무시고 자신을 기다리고 계셨던 엄마를 보면, 반가우면서도 와락 짜증이 밀려와 저자는 엄마에게 잔소리를 한다.



그러다 어느 날 저자의 엄마는 말기 암 판정을 받는다. 그때 저자도 함께 있었다. 검사 결과 듣기 무서우니 같이 가자는 엄마의 청 때문이었다. 저자는 의사의 설명을 듣는 순간에도 일상의 잡다한 일처리를 생각하며, 엄마가 입을 가리고 놀라는 모습을 보고는 제3 자의 모습을 지켜보듯 엄마의 습관을 생각한다. 그리고 담담하게 일을 잠시 쉬고 엄마의 병간호를 할 생각을 한다.


저자의 어머니는 그때 이후로 2여 년간 항암 치료를 받았다. 어머니가 편찮으시기 10여 년 전, 저자는 혈액에 문제가 있어 크게 아팠다. 이식 수술까지 받아야 하는 큰 병이었다. 그때 저자의 어머니는 긍정적이고 강했다. 저자가 완쾌되는 것은, 그의 엄마는 당연한 일인 듯 행동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10년 후 막상 당신이 편찮으시니, 자꾸 죽음을 이야기하고, 삶을 정리하며 죽음을 준비하신다. 그런 엄마의 모습에 저자는 화가 났다.


저자로서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건 상상도 하기 싫고 정말 원치 않는 일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래도 어머니에게 내는 화는, 어머니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로 거꾸로 돌아와 비수가 되어 꽂혔고 스스로가 괴로웠다.


당시 저자의 곁에는 ‘마리’라는 마음씨 좋은 여자친구가 있었다. 마리는 치료로 지친 어머니와 간병으로 지친 저자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 주고 모자간에 서로 감정 상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어느 날 저자는 어머니에게 마리와 결혼을 할지 말지 그 고민을 털어놓는데, 암이 뇌에까지 퍼져서 제대로 말도 글도 쓰지 못하던 어머니가 마지막 힘을 내어 쓴 듯한 글을 저자와 마리에게 준다. 결혼하라는 뜻의 글.... 얼마 후 저자와 마리는 결혼을 하고, 얼마 후에 어머니는 돌아가신다.



저자는 아내 마리와 고향에서 생활을 조금 더 이어가다가 그 생활을 정리하고 도쿄로 상경했다. 고향에는 돌아가신 어머니와의 추억이 많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도쿄에서 만화 그리는 일에 집중한다. 처음에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생각이 자주 떠올랐지만, 점점 일상으로 회복하게 되었고 그러는 동안 자신의 작품은 인기리에 연재되었고, 어떤 작품은 영화화, 어떤 작품은 애니메이션화 된다.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부끄럽지 않은 그런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저자는 20대 때 크게 아팠다. 혈액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수술 동의서에는 생식 기능 부전 가능성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그는 자식을 낳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술 전에 정액을 채취하는 일에도 반대했다. 그냥 살아만 있어도 좋다고. 하지만 당시 저자의 그런 생각에 크게 화를 낸 사람은 그의 엄마였다. 어머니는 화 한 번 내지 않고 늘 씩씩하고, 밝고 자신감 넘쳤는데 이때 딱 한 번 화를 낸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후손은 가져야 한다고.


어머니의 선경지명일까, 어머니의 바람 덕분일까. 그렇게 어머니가 고집해서 받아 두었던 정액으로 저자는 아내 마리와 체외 수정에 성공해서 소중한 딸아이를 낳는다. (어머니가 그때 역정을 내지 않고, 그래서 정액을 채취하지 않았다면 저자는 딸을 낳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저자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딸아이에게 부모 된 마음으로 편지를 쓴다.


하나에게


내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이제 2년 가까이 되었다.

요즘엔 얼마간의 여유도 생겼는지

만약 내가 죽는다면....

이런 상상까지 해본다.


이 편지는 주로

남겨진 사람에게 건네는 조언이다.


만약 모두들 슬퍼해준다면 부디

진이 빠질 때까지 펑펑 울기 바란다.

그것도 잠깐 동안의 일이니까.


그보다 나는

‘죽음’은 순서라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차례가 돌아오는

예방주사 같은 것.

언젠가 나도 죽어서

이 세상에서 갑자기 사라질 테고

무르고 새하얀 뼈만 남게 되겠지.

하지만 그때가 되면 아프거나 힘들거나 하는

세상의 일에서

해방된 후일 테니

나쁘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 나를 불쌍하게 여기지는 않아도 된다.


네가 몹시 슬픈 이유는

틀림없이 아직 네 안에 ‘죽음’과 ‘외로움’이

뒤섞여 있는 상태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1년쯤 지나면

‘죽음’을 외로움과 떨어트려 놓고

조금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죽음’의 정체를 알게 되면

그 외로움도 조금씩 치유되어 갈 거야.

‘시간이 약’이지.

나는 네가 ‘죽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의식을

가지기 바란다.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할수록

‘죽음’에는 의미가 더해져 간다.

나도 요새 어쩐지

죽음에는 에너지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부모의 죽음에는

아이의 인생을

움직일 정도로

엄청난

힘이 있어.

슬프다, 슬프다 하면서 울다가

정신 차려보면 어느새 새로운 일들이 시작되고

또 흘러가고 있을 거야.

어느 날의 이별 경험이

슬픔에 주저앉은

너의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올릴 거야.


그러면 너는 다시 바빠질 테고.

바쁜 것은 행복한 일이니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기를.

나의 죽음이 너의 페달을 밟게 한다.

나의 죽음이 너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나는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너의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저자는 이제 도쿄에서 성공한 만화가가 되었다. 직접적인 표현 없지만 저자가 아이에게 쓴 편지를 보면, 어머니의 죽음과 그로 인해 도쿄에서의 새로운 삶이 그에게 원동력이 되었고, 그래서 더 일에 몰입해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저자는 살아생전 어머니에게 화를 낼 때도 있었고, 짜증을 낼 때도 있었고, 어머니의 소소한 행동들을 귀찮아하기도 했다. 이런 감정들은 누구나 한 번쯤 부모님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아닐까 싶은데 가까워서, 사랑해서, 애틋해서 느끼는 감정이며서 또 부모님을 밀어내고 독립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보통 포유류의 많이 종들이 이렇게 독립한다)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런 복잡다단한 감정들이 드는 것 같다.


이 작품을 읽고 엄마의 존재에 대해, 엄마에 대한 내 마음을 다시 생각해 본다. 일부러 생각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읽다가 보면 저절로 나의 엄마가 떠오른다. 나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이든 이 작품을 보면 누구나 자신의 엄마가 절로 생각날 것이다. 돌아가셨든, 아직 살아계시든 간에 말이다.


내 몸은 엄마의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쩌면 그래서 아까 자석을 예로 들었듯이, 어느 정도 가까워지면 곧바로 같은 극끼리 밀어내려는 작용이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일어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가족끼리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서로 좋을 만큼만, 서로 이해할 수 있을 만큼만, 서로 각자 선택의 자유 여지는 어느 정도 줘가며 신경 쓰고 보듬어줘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게 또 가족이라서 마음대로 잘 안되지만...


어쨌든 가볍게 가볍게, 시원하게 시원하게 살아가고 싶다. 저자가 아팠을 때 씩씩했던 그의 어머니처럼.




덧붙임) 

사실 인간이 같은 인간을 먹는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로, 남태평양 어느 섬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추모의 의미로 그 사람의 육신을 먹었다고 한다. 문제는 그곳의 풍토병으로 정신 질환이 있었는데, 인도주의적 정신을 가진 의사가 그들의 병을 치료하고자 환자의 뇌를 검사해 보았다. 그 결과 그들의 뇌는 광우병에 걸린 소의 뇌와 비슷했다고 한다. 소가 소를 먹어서는 안 되듯, 인간도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혹은 싫어하더라도) 인간을 먹어서는 안 된다. 윤리적으로 문제이고 의학적으로도 아주 큰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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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들 시녀 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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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를 다룬 소설은 많다. 하지만 대부분의 디스토피아 소설은 이 암울하고 폭력적인 세상이 그저 작가의 상상일 뿐이라고 또렷이 인지하며 읽는다. 이런 세상은 결코 실제할 수 없다고...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만큼이나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가렛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현실적이어서 한페이지, 한페이지 넘길 때마다 오싹했다. ‘『시녀 이야기』 속 디스토피아는 우리 현실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인류 역사가 그걸 증명하지 않나’고 자연스레 생각했다.



마가렛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여권 신장 운동이 요즘처럼 활발히 이뤄지던 미국에서, 기독교 근본주의에 바탕을 둔 ‘길리어드’라는 종교 집단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잡았다. 그들은 다른 나라와 전쟁을 빌미로 국내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를 장악하고 국민들 인권을 제약한다. 사람들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인권 제약도 순순히 받아들인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제약받는 사항이 늘어나고, 급기야 여성들은 직업을 가질 수 없고 은행 계좌를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남자만 은행 계좌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여성의 경제권은 완전히 박탈당했고 경제력이 없는 여성은 경제력 뿐만 아니라 인생의 모든 것이 남성에게 종속된다. 여자는 혼자 거리를 돌아다닐 수 없고 유럽 중세 때처럼 '남성을 유혹할 수 있는' 머리카락부터 발 끝까지 신체 모든 부분을 펑퍼짐한 드레스로 가려야 한다. 그리고 오래전 철폐되었던 ‘계급’이 길리어드 사회에 부활한다. 사람들은 각기 계급에 맞게 옷을 입고, 행동할 수 있다. 다른 복장은 금물.


몇 개의 계급이 존재하는 '길리어드'에 아주 독특한 존재가 있다. 바로 ‘시녀’다. 그녀들은 임신 가능한 여성들로 선별된 존재들로 오로지 아기 생산(임신)만을 위해 존재한다. 존재 의미가 임신과 출산에만 있을 뿐, 실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아기 공장'.


『시녀 이야기』는 이런 디스토피아 세상을, 프레드 사령관의 시녀인 ‘오프프레드’의 시각으로 쓰여 있다. 그녀는 오로지 사령관의 아기를 낳기 위해 존재하는 여성이다. 그녀에게 인권은 없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시녀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들, 가령 길리어드를 만든 사령관이나 그들의 부인, 그들의 자녀, 이 사회를 감시하는 '눈', 또 노동자 계급인 이코노계급까지 모두에게 억압적인 곳이다. 모든 사회구성원이 정해진 규율에서 일탈할 수 없는 곳, 일탈하면 바로 심문 받고 교수형에 처해지는 곳이다. 모두가 억압하고, 억압 받는... 도저히 나아질 희망이 없는 디스토피아 세상.


하지만 그 세상에도 희망은 있었다. 『시녀 이야기』후반부에서 희망이 흘러나온다. 철저하게 희망을 품을 수 없을 때 희망의 씨앗이 싹트는 것이다. 산부인과에서 벌어지는 의사의 강간, 사회적으로 명망 높은 사령관들의 추악한 욕망, 사령관 부인들의 삐뚤어진 질투들... 물론, 의사나 사령관, 사령관 부인에게 유린당하는 피해자는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하지만(죽임을 당하거나, 스스로 죽거나), 암암리에 이루어지는 개인의 일탈이 철옹성 같은 길리어드에 균열을 내고 사회 붕괴의 기폭제가 되는 것이다.


 

 

『증언들』은 『시녀 이야기』의 후속작으로 근본주의 종교국, 길리어드가 어떻게 붕괴 되었는지, 『시녀 이야기』15년 후를 그린다. 『증언들』은 세 명의 증언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길리어드에서 최고 위치에 있는 아주머니인 ① ‘리디아 아주머니’, 고위 사령관의 고명딸로 곱게 자란 ② ‘아그네스’ 그리고 길리어드와 이웃한 국가인 캐나다에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란 ③ ‘데이지’. 이 세 명의 증언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시녀 이야기』 보다 읽기 수월했다. 무엇보다 길리어드가 붕괴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고, 또 세 명의 증언자 중 길리어드의 질서를 만들고 규율을 창조한 ‘리디아 아주머니’의 증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패한 권력층에서, 그 부패를 고발하고 이 권력을 전복시키는 이야기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희망을 품게 한다. 이 희망은 『시녀 이야기』에는 없었던 것이다. 이 희망 때문에 『증언들』에서 어떤 암울한 이야기가 나와도 괴롭지 않았고 곧 길리어드가 전복될 기대를 품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시녀 이야기』에서 이 사회가 붕괴될 조짐은, 결론을 알고 난 후에 알 수 있는 조짐들이었다)


그리고 사령관의 딸이지만, 입양된 딸로서 처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아그네스’, 아그네스에 대한 마가렛 애트우드의 심리 묘사가 섬세하다.


다만, 자유로운 캐나다에서 자란 데이지는 사춘기 소녀 특유의 예민함과 거친 모습이 섞여 있는데, 어디로 튈지 모르는 캐릭터라 작품 속에서 조금 겉도는 캐릭터로 느껴졌다.


길리어드의 지도자들은 사회를 철저히 통제해서 결코 무너지지 않는 사회를 건설하려 했지만, 오히려 엄격한 통제와 근본주의가 '위선과 허위로서' 길리어드의 붕괴를 일으킨 것이다. 길리어드에서 핵심 지도자인 리디아 아주머니의 철두철미한 복수는 실로 꼼꼼하고, 통쾌했다. 전직 판사로서, 악한 인간과 악한 사회를 심판한 것이다.


마가렛 애트우드의 『증언들』은 단순하 문학 작품으로서 독자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소설이 아니다. 이 소설에는 결코 세상에 일어나지 않았던 일은 쓰여 있지 않다. 자유로웠던 국가가 갑자기 엄격한 근본주의의 종교 국가가 된 사례는 유럽이나 중동 국가에서 있어 왔던 일이며, 여성의 인권을 박탈하고 남성에게 완전히 종속 시킨 사례는 이슬람 국가 뿐만 아니라 중세 기독교 국가, 그리고 우리 조선 시대에도 있었던 일이다. 그래서 『시녀 이야기』와 『증언들』와 단순히 디스토피아를 그린 작품이 아니라, 현실과 그리고 우리의 역사를 그린 '역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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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발견 - 나의 특별한 가족, 교육, 그리고 자유의 이야기
타라 웨스트오버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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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툼한 책이지만 정신없이 빠져 읽은 『 배움의 발견』

이 책은 미국 모르몬교 근본주의자 가정에서 태어난 한 여성의 자서전이다. 그녀가 태어난 해는 1987년. 미국식 만 나이로 하면 올해로 만 32세. 완전 어린 나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창 젊디젊은 나이이다. 하지만 그녀의 16세 이전의 삶은 꼭 1887년에 태어난 1세기 전 사람들과 같다.

모르몬교 신자 중에서도 극단으로 치우쳐 있던 저자의 아버지는 처음 몇몇의 아이들은 출생신고도 하고, 학교에도 보냈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해가 갈수록 종교에 심취해졌고, 미국 정부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피해 의식은 걷잡을 수없이 커졌다. 3~4명의 자식은 출생신고도 하지 않고, 학교에도 보내지 않았다. 또 가족이 심하게 아파도, 설사 그게 신체가 절단되는 사고라 해도 저자의 아버지는 아내의 민간요법에 의지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르며 가족의 실제로 느끼는 고통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오랜 시간 동안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았다. 가끔, 언덕 아래에 있는 할머니 집이나 조금 더 멀리 있는 외할머니 집에 가곤 했지만 그곳 역시 잡화점 하나 있는 아주 작은 마을일 뿐이었다. 그녀는 인적 드문 산 아래 살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머니와 아버지 일을 도와 일을 했다. 아버지는 근면 성실하게 일했다. 그는 아내에게 산파 일이 하도록 했다. 단지 종교적 믿음 때문이었다. 병원을 극도로 싫어하고 불신했던 그는 아내가 산파 일이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부합한다 생각했다.

저자는 폐쇄적이고 극단적 믿음을 갖고 있는 아버지 밑에서 아버지의 말씀, 아버지가 해석한 성경의 말씀만이 옳다고 생각하며 자란다. 하지만 그녀 위로 많은 오빠들이 있었고, 언니도 있었다. 그들은 자라면서 아버지와 충돌했고, 한 명씩 집에서 나갔다. 그녀의 좁은 세계에서 오빠들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녀를 바깥세상으로 나오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특히 순종적이었던 타일러 오빠가 그가 간 길을 그녀에게 제시했다. 바로 학교, 즉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것 말이다. 타일러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집을 나가 대학에 들어갔었다. 막내 여동생인 저자에게도 타일러는, 집이라는 최악의 장소에서 벗어나 학교에 가라고 권유하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강력한 영향 아래 매해 학교 가기를 차일피일 미뤘다. 그러다 우연히 그녀가 둘째 오빠인 숀에게 심하게 학대받던 날, 타일러가 몇 년 만에 집에 들르게 되었고 여동생이 학대받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 사건은 어떻게 보면 일주일, 한 달 지나면 곧 잊을 숀 오빠의 학대였지만 타일러 오빠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게 된 건 그녀를 위축 시켰다. 그리고 그녀 속에 있는 뭔가를 뒤흔들어 놓게 된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그녀는 공부를 시작하고,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한다. 사실 그녀가 공부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우선 공부할 짬을 낼 시간을 내는 것도 쉽지 않았고, 아버지 훼방을 물리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또 형제가 많고 가족이 하는 일이 위험한 일이다 보니 항상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집이 점점 더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으리라. 숀 오빠가 오토바이 사고로 심하게 머리를 다쳐 뇌가 보이는 데도, 아버지는 집으로 오라며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말을 거부하고 병원으로 간다. 어쩌면 여기서 그녀는 아버지와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결정적 계기였으리라.

이후 대학에 들어가서도 완전히 낯선 환경에 그녀는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완전히 낯선 이방인으로, 거의 외계인 같은 존재로서 생활하기 시작하는데, 어떻게 보면 재밌는 에피소드로 느껴지지만 어떻게 보면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게 느껴졌다. 그녀가 느꼈을 당혹감, 놀라움, 두려움 등이 어느 정도 상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이 년 전에 읽은 어떤 책에서는, 미국의 산을 트레킹 하는 독일 여성이 1~2세기 전 종교의 자유를 위해 독일을 떠나 미국에 정착한 옛 독일어를 쓰는 사람을 우연히 만났다고 했다. 길을 잃었기에 그들의 만남은 반갑고 고마웠지만 21세기에 19세기의 독일 말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 기분은 참 이상했다고 적혀 있었다.

미국은 넓고, 인적 드문 곳이 많다. 그런 곳곳에 비록 소수이지만 오래전 종교의 자유를 찾아온 이들의 후손이 여전히 터를 잡고 살아가고 있고, 우리들로선 생각도 할 수 없는 생활 방식을 고수하며 살아가고 있다. 놀랍도록 낯설고, 기이할 정도로 이해가 되지 않는 그들의 삶...

실제 이야기인데 모두 꿈처럼, 소설처럼 느껴진 자서전이다.

Educated... 나는 무엇을 배웠고 앞으로 무엇을 배울 것인지 그리고 '배움'으로 내 삶의 지평을 얼마큼 넓힐 것인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누군가의 놀라운 삶은, 이렇게 내 삶에 파문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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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사 1 - 새롭게 밝혀진 문명사 : 문명의 출현에서 로마의 등장까지 신세계사 1
쑨룽지 지음, 이유진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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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역사는 인간이 만든 '관념의 산물'이다. 실제로서의 '실체'가 있기 보다, 개인과 집단이 어떤 상(플라톤이 말한,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 같은 것)을 만들어서 그 상에 역사적 사실과 흔적(유물)을 퍼즐 맞추듯 조각조각 끼워 맞추어 전체적 그림을 만들고, 스토리텔링을 하는 것이 바로 역사가 아닐까 싶다.


구석기인들은 신석기인들이나 청동기 시대 사람들보다 훨씬 정교하고, 사실적인 그림을 동굴 깊숙한 곳에 그렸다. 동굴 벽의 입체감을 그대로 살려서 동굴의 튀어나온 부분에는 실제 동물의 근육이 강조되는 부위를 그려 꼭 지금 시대의 3D 영화처럼 동물을 생생히 구현한 것이다. 일정하게 발광하는 전깃불이 아닌, 불규칙적으로 매 순간 일렁이는 횃불로 동굴 벽을 비추면 거기 그려진 동물은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구석기인들은 동굴 깊은 곳에 왜 동물 그림을 그렸을까? 어떻게 원시시대라 할 수 있는 구석기 시대에, 그토록 사실적이고 정교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당시 구석기인들이 안료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로 깊었기에 동굴 벽에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주류 학계의 의견은 ① 사냥 연습, ② 사냥 성공을 비는 제의를 위해, ③ 넘쳐나는 예술 혼, ④ 우연히 발견한 염색성 가루 등등으로 나뉜다. 이 의견들은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사실은 역사학자는 시간과 공간을 꿰뚫어보는 신이 아니라는 것이고, 또한 문학에서 말하는 '전지적 관찰자 시점'을 역사학자들은 결코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역사가는 그가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가는 그 시대, 그가 뿌리내린 그 시대의 시각으로 최대한 그럴 듯하게 과거를 읽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세계사' 역시 마찬가지다. 말은 '세계사'이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세계사'는 영국, 프랑스, 독일 역사학자 등이 쓴, 지극히 (서)유럽식 사고의 '세계사'다. 그들에게 '세계'는 어디일까?!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가기 전까지는 지중해 연안 지역 및 북아프리카와 서유럽 지역이다(북유럽과 동유럽 역사 또한 이 '세계사'에서 쉽게 배제된다). 그리고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한 이후부터는 아메리카 역시 '세계사'로 편입되는데, 말이 세계사이지 아메리카가 유럽사에 편입된 순간 이후를 서술한 것이다.


유럽인들이 쓴 세계사의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점이다. 가령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을 보면, 철저하게 그리스 입장에서 이 전쟁을 다룬다. 그리스라는 나라의 역사를 설명하다가 갑자기 페르시아가 등장해 서로 전쟁을 했다고 적어 놓는다. 소위 세계사라고 하면, 그리스와 동등하게 페르시아도 이 나라의 형성 과정과 역사, 그리고 그리스와 왜 전쟁을 했는지 따로 자세하게 서술해야 하는데 유럽인이 쓴 <세계사> 속에는 '페르시아'가 갑자기 역사 외부에서 짠, 하고 나타나 그리스와 전쟁을 했다는 식으로 적어놓는 것이다. 로마와 카르타고와의 전쟁도 마찬가지다. 서술의 중심은 언제나 로마이고, 카르타고는 느닷없이 나타난 페니키아 식민도시라는 식이다.


유럽인들이 '세계사'라고 하는 책은 대부분 세계사라기보다, '유럽사'다. 유럽이 아닌 지역에 대한 서술이 있다고 해도, 그 서술은 유럽과 상관이 있기 때문에 적어 놓은 것일 뿐 진정한 세계사가 아니다.


극동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가 읽는 그들(유럽인들)의 <세계사>는 여기저기 구멍이 뻥뻥 뚫려 있고, 유럽인의 입맛에 맞춰 쓴 너덜너덜 조각나 있는 <유럽사>일뿐이었다.




<세계사>를 가장한 <유럽사>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인 역사학자가 쓴 『신세계사』. 저자 쑨룽지는 처음부터 <유럽사>일 뿐인 <세계사>를 비판한다.


이렇게 해서 가르치게 되는 건 세계사라고 할 수 없다. 역사라고도 할 수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소위 정상급 대학이 세계사라고 내건 것도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서양사다. 나는 강의실에서 자주 이렇게 탄식한다. "타이완의 세계사 교육은 서양 중심론의 마지막 보루일 것이다!" (25쪽)

우리가 직면한 최대의 역설은 이것이다. 서양 중심론, 포스트식민주의, 다문화주의 등이 죄다 서양에서 기원했다는 사실. 서양 중심론 제거, 글로벌 사관, 동서양의 대분기설 등은 사실 서양의 흐름을 뒤쫓는 것이다. (25쪽)


저자는 소위 '세계 4대 문명설'에도 비판적이다. 세계 4대 문명은 티그리스강-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 발흥한 <메소포타미아 문명>, 나일강 유역에서 발흥한 <이집트 문명>, 인더스강 유역에서 발흥한 <인더스 문명>, 그리고 황허 강에서 발흥한 <황허 문명>을 일컫는다. 저자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강 유역에서 발흥했다기 보다, 근처 산에서 무관개 농경을 먼저 한 후 기술이 발전해서 강 유역의 관개 농업으로 나아갔다고 주장한다. 무관개 농업보다 관개 농업이 훨씬 발달한 농사 기술이기 때문이다.


유럽은 바다와 강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런 물 중심 유럽식의 사고가, <문명은 꼭 큰 강 유역에서 발흥한다>는 생각을 이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생각이 틀렸다고 본다. 정말 큰 강 근처에서 문명이 발흥한다면, 왜 아메리카 대륙, 특히 문명이 발흥하기에 천혜의 조건을 가진 '미시시피강 유역'에서는 왜 문명이 발흥하지 않았냐고 반문한다.


유럽인들의 눈에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석기시대'에 머물러 있었다고 보지만(물론 석기를 주로 사용), 당시 대제국을 이루고 세계에서 손꼽히는 인구를 가졌던 잉카 제국은 강이나 바다에서 발흥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이 살기 힘든 산에서 대제국을 이뤘는데 이들이 아무리 석기를 썼다고 해도, 천문학이나 수학 수준을 보면 과연 뛰어난 문명을 지닌 곳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럽인이 쓴 세계사에는 그들의 '문명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므로 아메리카 문명은 철저히 배제한다.


이런 역사 비판 의식으로 저자는 인류 시작부터 로마 시대까지, 유럽인 사고에서 벗어난 세계사를 새롭게 쓰고 있다.


이 책에서 제일 흥미로웠던 부분은 바로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 폴리네시아 등지에 널리 퍼져 살고 있는 '남도어족' 이야기였다. 거의 처음 접하는 역사 이야기여서 내가 완전히 소화했다고 할 순 없지만, 아무튼 놀라웠다. 다양한 설이 있지만, 타이완을 출발한 남도어족은, 바다로 남서진, 남동진한다. 그래서 오세아니아의 여러 섬에 퍼져 살게 되었고, 서쪽으로는 아프리카 근처 섬인 마다가스카르까지, 동쪽으로는 폴리네시아를 거쳐 아메리카 대륙 코앞인 이스터섬까지 나아갔다고 한다.


224쪽


남도어족들이 어떻게 증기선 없이도 거센 바람과 파도를 거슬러서 폴리네시아를 거쳐 이스터섬까지 갔느냐이다. 특히나,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기 전 남아메리카의 고구마가 폴리네시아 중동부에 전해졌다고 한다. 이 말인즉슨 남도어인들이 남아메리카에 갔다가 다시 배를 돌려 폴리네시아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남도어인들은 제대로 된 역사(글로 체계적으로 남긴)가 없어서 유럽인들에게 미개인, 원시인으로 여겨졌지만 지금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항해기술을 가졌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이런 역사를, 역사로 여기지 않았으며 문명으로도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유럽식 문명'만 문명으로 생각하며 그 세계 속에 편입된 역사만 세계사로 인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 내가 느끼기에, 글쓴이가 바로 '중국인'이라는 것이 바로 한계다. 그는 중국이라는 범위에만 갇혀 있으면 안 된다는 입장을 견지하지만, 책 중간중간에 어쩔 수 없는 중국식 사고방식이 튀어나온다. 가령 서양 역사학자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중국 사마천 이야기를 한다던가 이런 식으로 다른 지역 역사 이야기를 하는데 뜬금없이 중국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중국인이 아닌 나로서는, 왜 이런 맥락에서 중국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내가 억측하는지는 몰라도 중국에 대한 글쓴이의 자부심 같은 게 느껴졌다. 중국인이 아닌 나로서는 살짝 거부감이 느껴진 요소였다.


어쨌거나 일제강점기 이후로, 세계사는 곧 유럽사라는 인식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깊다. 서양을 발전의 롤모델로 받아들인 일본의 영향 때문이다. 지금도 서점에 가서 세계사 코너를 둘러보면 거의 다 유럽사 중심의 세계사다.


『신세계사』의 저자는 중국인으로서, 유럽인 중심의 세계사를 고쳐 써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이 책을 썼다. 우리도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유럽 중심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사를 읽고, 써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우리 스스로 새롭게 읽고 쓴 세계사가 우리 나아갈 길을 비춰줄 등불이 되고, 길라잡이가 되리라고 믿는다. 이 글의 맨 처음에 언급했듯, 역사는 '우리 관념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유럽 중심의 세계사 서술에 의문을 품고 있는 분,

다양한 세계사에 관심 있는 분들께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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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지도 - <페러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 네 번째 이야기 페러그린 시리즈 4
랜섬 릭스 지음, 변용란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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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만 보면 완전 무서운 공포, 스릴러 장르의 문학 같지만 그와 전혀 다른 내용의 책이다. 할리우드 영화, <엑스맨> 유의 독특한 개성, 독특한 능력을 가진 인물들이 총출동하는 모험, 액션, 히어로 장르물이랄까.

주인공들은 이상한 능력을 가진 10대들, 태어나고 자란 시기는 제각기 달라서 누구는 1900년 초반에 태어나 아흔 살이 넘었고, 누구는 미국 경제 대공황 시대에, 누구는 1960, 70년 대에 태어나 자랐다. 각기 태어난 시기는 다르지만, 모두 십 대에 머물러 있고, 함께 친구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루프' 때문이다. 이 루프는 시간이 현재와 완전히 다르다. 시간이 갇혀 있달까. 그래서 루프 안에 머물면 나이가 들지 않거나, 아주 천천히 나이를 먹는다. 제이콤 포트먼과 제각기 놀라운 능력을 가진 아이들은 태어나고 자란 시기는 다르지만 이 루프 덕분에 같은 십 대로 친구가 된다.

내가 시간의 지도 이전 세 편, 『페러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 『할로우 시티』, 『영혼의 도서관』을 안 봐서 이 소설 속 세계관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전권들을 읽지 않더라도 충분히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고 재미있다. (히어로물 is 뭔들)

그리고 주인공이 10대여서 그런지 작가는 '연애'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암요, 뺄 수 없죠!) 남자 주인공 제이콥 포트먼과 여자 주인공 엠마 이야기인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이 예전 영화 <백 투 더 푸쳐>처럼 약간 터부시 되는 내용이 나온다. 여자 주인공 엠마는 제이콥의 친할아버지(에이브 포트먼)가 젊었을 때 서로 사랑했던 사이로 현재는 할아버지는 죽었고, 엠마는 여전히 예전 그 나이, 그 모습으로 제이콥의 친구이자 연인이 되었다.

제이콥과 이상한 아이들은 모험을 떠나는데 그 모험의 궤적이 예전 에이브 포트먼의 흔적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과정에서 엠마는 자꾸만 에이브를 생각하게 되고, 현재 엠마의 남자친구이자 에이브의 친 손자인 제이콥은 걷잡을 수 없는 질투에 사로잡힌다. 연애보다 임무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애써 감정을 누르지만, 10대에게는 임무만큼이나 사랑도 중요한 법이라 엠마와 갈등에 놓을 때마다 제이콥은 한없이 흔들린다. (이 나이가 되어서 보니, 10대들의 이런 갈등, 고민들 넘 귀여워. ㅋㅋ) 어쨌든 읽으면 할아버지와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설정은 느낌이 좀 요상하다.

히어로물로 읽어도 좋고, 10대 연애 소설 및 성장물 이야기로 읽어도 좋다. 이 책 시리즈 <페러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은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니 함께 보면 좋을 듯. 추천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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