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말해서 그는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들의행복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며, 오로지 이들을 잃게 될 때에만 상처를 입을 뿐이다. 그는 이들의 실존에 접근조차 할 수 없다. 그는 자신 외에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오직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을뿐이지만, 그나마도 정확하게 들여다보지 못한다.
거룩한 성수나 멸균 처리된 밍밍한 물로는 비극을 쓸 수 없다.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비극은 눈물과 피로 쓴다.
이 글에서 나는 신념윤리가 아닌 책임윤리가 어떻게 후회의 정치의 토대가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았다. 곧, 보복을 위한 보복이 아니라 앎과 인정이 이룬 조화 속에서 희생자와 가해자가 아닌 그 자손들 사이의 화해의 토대를 쌓을 수 있는지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