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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1년 10월
평점 :
절판
일본 대중문화가 정식으로 국내 개방되던 90년대 말, 낯설면서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일본 영화가 한국관객들을 사로잡은 적이 있다. 에쿠니가오리의 작품을 영화화한 <냉정과 열정사이 >, <도쿄타워> 등도 2000년대 초반부터 인기를 끌었는데, 특히 <냉정과 열정사이>는 영화 내용은 희미해도 ost와 남녀주연 배우의 얼굴이 아직 기억날 정도다. 덕분에 이 작가의 이름을 낯설지 않게 기억하고 있었고 이 책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해도>는 여고생들의 성장기를 담은 이야기라기에 한 번 읽어보고 싶었다.
작가는 6편의 단편에서 똑같은 교복을 입고 평범해 보이는 열일곱살 일본의 여학생들이 각자 다른 이유로 삶의 과도기를 지나며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타도시로 전근 가 두어달에 한 번 만나 서먹한 아빠를 두었고 책 읽기 좋아하는 기쿠코가 지하철에서 여자 치한을 만나고 알게 되면서 새로운 감정에 사로잡히는 이야기 '손가락', 단짝 친구였으나 정신 이상 증상이 나타난 에미가 다른 친구들로부터 고립되고 자신도 거리감을 느끼다 에미가 입원후 결국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모에의 이야기 '초록 고양이'도 있다.
쇼핑으로 공허함을 달래는 엄마를 둔 유즈가 남자친구를 사귀며 느끼는 감정에 대한 이야기 '천국의 맛', 찻집에서 알바를 하고 음식으로 허전함을 달래는 비만인 자신에게 말로 상처주는 주변인들에게 매일 색깔별로 독약을 처방하는 일기를 남기는 카나의 이야기 '사탕일기', 애인과 헤어지고 혼자살며 언니 딸인 조카와 친구처럼 지내는 치즈루 이야기 '비, 오이, 녹차', 20대 후반 아저씨와 사귀다 싫증내고 헤어지는 미요의 이야기는 '머리빗과 사인펜'에 실렸다.
에쿠니가오리의 글은 영상이나 웹툰을 보듯 구체적인 묘사가 많았다. 다양한 색감과 맛이나 향을 상상하게 하는 여러 음식들도 언급돼 오감을 자극시키고 실제 제품의 브랜드도 많이 등장시켜 일본내 독자들은 생생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일본 전통 문화를 슬쩍 흘리면서도 모던한 느낌을 전달하려 했는지 서양식 생활 방식을 보여주며 영어식 표기 단어도 상당히 많이 나온다. 주어를 술어 뒤에 붙이는 도치식 표현도 종종 써 뭔가 좀더 가볍고 여운을 전달하려는 것도 같다. 그래서 뭔가 세기말부터 2000년대 초반 보던 영상미 가득하고 여백이 큰 일본 영화들이 떠오르고 왜 이 작가의 작품이 영화화되었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2002년 처음 일본에서 발간된 책이니 시간의 갭은 있겠고 한국의 열일곱 여학생들이라면 아마 빠질 수 없었을 진로나 학업 문제가 책 속 일본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아 좀 이질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단편이어서인지 자세한 설명없이 인상만으로 상황이 전개되고 일본문화의 차이 때문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긴했다. 하지만 일본영화나 소설을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과거 일본여행의 향수를 갖고 읽을 수도 있겠다.
일본어 이름이 익숙해지지 않아 잘 몰랐는데 책을 다시 보니 각 단편 속 여학생들이 모두 같은 반인 것 같다. 한 교실의 비슷해 보이는 소녀들이 각기 다른 감정들에 혼란스러워 하고 설레기도 하면서 그 시간을 보내는 것을 각각의 스토리로 풀어낸 듯 하다. 20년 전 일본의 한 고등학교 교실에 앉아있던 열일곱 여학생들은 이미 아줌마가 되어 이 책을 통해 이때의 시간을 회상할지도 모르겠다. 그들 중 누군가는 책속에서 자신의 기억과 맞닿는 부분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