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런어웨이 - 도피할 수 밖에 없었던 여자의 가장 황홀했던 그날
앨리스 먼로 지음, 황금진 옮김 / 곰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2013년 노벨 문학상이 발표될 무렵부터 현대소설의 자극적인 소재와 특이한 사건에 지겨워져 있었다. 패스트푸드를 먹는 것처럼 읽을 때는 몰입감과 재미가 뛰어나지만 감상이 적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박완서 작가님의 소설을 다시 한 번씩 꺼내 읽었다. 딸이 아닌 이상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어머니, 할머니의 과거 이야기를 듣는 느낌의 감성을 자극하는 글들이다. 특별한 사건도 없이 불쑥 감동이 차오르고, 특별할 것도 없는 소재라서 내 주변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것만 같은 이야기들 말이다. 그 여유로운 필력과 친근한 흐름에 다시금 감동을 받곤했다.
앨리스 먼로의 『행복한 그림자의 춤』을 읽고 바로 떠오른 것은 박완서 작가님과 느낌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작가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글, 특별한 사건도 없이 감성을 자극하는 것. 여유로운 필력과 친근한 흐름은 박완서 작가님과 많이 닮아 있었다. 그 후부터는 앨리스 먼로의 소설을 찾아 읽었다. 『행복한 그림자의 춤』, 『디어 라이프』, 『런어웨이』까지 읽고 나는 앨리스 먼로의 소설을 계속, 더 읽고 싶어졌다.
『런어웨이』는 20대 초중반의 여성들이 화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단편들이 묶여있다. 연애, 결혼, 출산, 관계와 관련된 사건들을 중심으로 소설이 전개된다. 「우연」, 「머지않아」, 「침묵」은 연작으로 한 여자가 우연히 만난 남자를 다시 찾아간 이야기 딸을 낳고 부모님을 만나러 간 이야기. 딸이 장성해서 자신을 떠나간 사건들을 엮어 한 여자의 유년기를 제외한 일생을 단편으로 엮은 소설이라 주목할 만하다. 가장 집중해서 읽은 단편은 「런어웨이」다. 첫 장에 나오는 단편이자 표제작이기도 하지만 여자의 일탈에 몰입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말 체험 목장을 운영하는 칼라와 클라크, 넉넉잖은 운영에 연일 이어지는 비로 수입이 없는 상황, 대책 없이 빈둥대는 클라크. 그 상황을 벗어나려는 칼라를 위해 도움을 주는 옆집 실비아. 도움을 받아 오른 버스 안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칼라를 그리는 장면에서 갈팡질팡하는 칼라를 바라보게 되는 독자는 드라마의 바보 같은 선택을 하는 여주인공을 보는 듯이 상황이 그려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난폭한 남편 클라크의 실비아에 대한 협박. 어딘가 환상적인 결말은 크나큰 사건, 소재 없이도 자연스럽게 독자를 긴장시키고 몰입시킨다.
「반전」은 어딘가 고전을 닮은 도입부다. 드레스를 준비해 놓지 않으면 죽어버릴 거라는 대사로 시작해서 왜 드레스를 준비해놓지 않으면 죽어버릴 거라는 대사를 하게 됐는지 이어가고 가슴 아픈 운명의 장난을 담아낸 단편이다. 어딘지 제인 오스틴의 향기가 나는 작품이다.
앨리스 먼로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작가다. 나는 『런어웨이』를 읽고 그렇게 느꼈다. 1800년대의 소설과 현재의 소설을 모두 담아 낼 수 있는 살아있는 작가다. 제인 오스틴과 같은 느낌도 있고, 한국적인 박완서 작가님의 느낌도 담아낸다. 나는 이런 소설이 패스트푸드같은 최근 소설이 아닌 장독에 묻어 둔 건강한 장 같은 느낌이 들어 열광하며 읽게 된다. 아쉬운 것은 장독에 묻힌 장을 다 먹으면 더 이상 먹을 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전 노벨상 수상 인터뷰에서 앨리스 먼로는 다시 작품 활동을 할 수도 있다고 한 것이 희망이다. 앨리스 먼로의 작품은 천천히 아껴서 계속 읽고 싶다. 다음 작품이 나오길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