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사란 무엇인가? - 역사가가 텍스트를 읽는 방법
리처드 왓모어 지음, 이우창 옮김 / 오월의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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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소개된 역사학자들의 작업을 '역사적 텍스트에 대한 화용론'이란 말로 요약할 있을 것이다.

 

역사맥락주의자들의 방법론을 소개한 2장은 오스틴[Austin] 발화행위 이론을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외에도 텍스트에 대한 역사적 독해에서 중요한 작업은 저자가 해당 텍스트를 작성하고 발표함으로써 하고자 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의도를 밝혀내는 것임을 강조하는 데서 그라이스[Grice]와 스트로슨[Strawson] 영향력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발화행위를 이해하는 데 있어 발화자의 의도를 강조하는 것이 발화행위 이론 내의 한 입장이기 때문이다. 오스틴과 설[Searle]은 의도보다는 관습에 더 무게를 두었다.) 

 

물론, 영국의 지성사가들의 작업이 옥스포드의 일상언어학파나 폴 그라이스의 작업에서 실제로 영감을 얻은 뒤 이루어진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의 작업의 방법론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이들의 작업을 참조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반대로 철학자들이 역사학자들의 작업에서 영감을 받았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또한 발화행위이론이나 그라이스의 화용론의 혁신성은, 기존의 언어철학과의 관계 속에서, 이 이론들이 자신들의 착상을 어떻게 체계화시키는 데 성공했는지를 고려함으로써 부각되는 것이지 사람들이 언어를 활용해 다양한 행위를 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에 기반해 역사적 텍스트를 해석하기 위해 언어철학을 알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어쩄건 이 작업들이 제출된 시기가 겹치며, 케임브리지 지성사가들의 방법론을 철학적으로 정교화하고자 했던 스키너[Skinner]가 스트로슨과 그라이스의 작업을 참조해 철학 논문을 쓰기도 하였으니("Conventions and the understanding of speech acts", 1970), 이 두 학파의 역사적 연관성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스틴과 그라이스의 작업과 역사맥락주의자들의 방법의 유사성을 확인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화용론의 전형적인 예를 살펴 보자.

 

어떤 사람이 동료 철학자에게, 철학자 A 훌륭한 철학자인지 아닌지 묻는다고 생각해 보자. 질문에 동료 철학자가 'A 글씨를 아주 '라고 대답한다면, (그리고 그가 질문을 제대로 들었고, 협력적인 대화자라면, 그리고 해당 사회에서 남에 대해 직접적으로 좋은 말을 하는 것이 터부시된다면, 등등) 대답을 A 철학자로서 별로라는 이야기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상황을 우리는 오스틴과 그라이스의 이론을 사용해 각각 다음과 같이 이해할 있다. 1) 동료 철학자는 'A 글씨를 아주 '라는 문장을 발화함으로써, A 삼류 철학자라고 주장하는 발화행위를 했다. 2) 동료 철학자는 'A 글씨를 아주 '라는 문장을 발화함으로써 A 삼류 철학자라는 정보를 전달하고자 의도했다=동료 철학자의 'A 글씨를 아주 '라는 발화의 화자-의미(Speaker's-meaning) A 삼류 철학자라는 것이다.

 

의미론이 'A 글씨를 아주 '라는 문장이 어떻게 A 글씨를 아주 쓴다는 명제를 축자적 의미로 갖게 되는지를 연구한다면, 화용론은 동료 철학자가 'A 글씨를 아주 '라는 문장을 발화함으로써 어떻게 A 삼류 철학자라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연구한다.

 

책을 읽은 독자라면 여기서 역사맥락주의자의 작업과 화용론의 유사성을 있을 것이다. 역사맥락주의자들은 텍스트의 개별 문장들의 축자적 의미를 읽어내는 작업은, 위의 예의 'A 글씨를 아주 '라는 발화에서 오직 A 글씨를 쓴다는 정보만을 읽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작업이라고 본다. 동료 철학자의 발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온갖 맥락들을 알고 해당 발화에 접근해야 하는 것처럼 역사적 텍스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당 텍스트가 생산, 발표된 온갖 맥락들을 알고 해당 텍스트에 접근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옥스포드 일상언어학파의 철학자들은 의미의 기초 단위가 문장이 아니라 실제 대화 속에서 이루어진 해당 문장들의 개별 발화들이라고 보았다(때문에 의미는 사용이다라는 유명한 슬로건이 있는 것이다). 개별 발화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발화가 대화 속에서 하는 역할을 이해해야 하는 것처럼, 역사맥락주의에 따르면 개별 역사적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텍스트가 쓰여진 맥락-그 텍스트가 어떤 지적 대화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는지-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화용론과 역사맥락주의자들의 작업의 유사성에는 뚜렷한 차이도 있다. 역사적 텍스트와 해석자 사이에는 시간 간격이 있는 반면, 동료 철학자의 발화는 그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자를 향해 이루어졌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언어 표현의 의미가 바뀌므로, 역사적 텍스트를 맥락을 무시하고 읽을 경우, 우리는 텍스트의 축자적 의미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위험이 있다. 어떤 표현이 200년전에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용법으로 사용됐을 수도 있고, 개별 저자가 어떤 표현을 당대의 의미 용법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텍스트를 읽는 작업은 저자의 의도를 파악해 내는 작업보다도, 텍스트의 문장들의 축자적 의미를 이해하는 작업보다도 복잡할 것이다. 먼저, 축자적 의미를 가정하고 맥락을 재구성하여 저자의 의도를 파악해야 것이고, 그렇게 파악한 의도가 되물림하여 애초에 가정된 축자적 의미를 재설정하게 것이고, 이는 다시금 저자의 의도를 다르게 파악하게 것이다.

 

이는 역사적 텍스트를 읽는 데에서만 고유한 것은 아니라 기호를 사용한 인간의 의사소통의 본질적 특성이다. 그러나 텍스트가 생산된 시간과 독해가 이루어지는 시간 사이에 광대한 차이가 존재하는 역사학의 작업에서 특성은 더욱 날카롭게 표현된다. 어려움이 우리가 훌륭한 역사가들의 작업에 존경심을 표하는 이유 하나일 것이다.

 




흥미로운 내용을 담은 책이지만 책의 구성에 대해서는 다소 아쉬움이 있다. 책은 역사학의 학파의 작업 방법론을 장점과 한계를 포함하여 조망할 있게 도와주는 책이 아니다. 반대로 책은 학파의 구성원에 의한 선언문에 가깝다. 저자는 끊임없이 '우리는 이렇게 훌륭해요'란 태도로 일관한다. 게다가 다른 입장들, 다른 사상들에 대해 소개할 일부러 부정적인 단어들을 선택하는데 이런 태도는 학술서로서 부적절할 아니라, 이렇게 노골적으로 이빨을 드러내는 태도는 저자의 공언과는 달리 학파의 승리가 그다지 탄탄한 지반 위에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들게 한다.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질문은 역사적 텍스트가 생산되는 맥락을 구체화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이다. 맥락을 구성하는 요소는 무한히 다양하며, 이 요소 중 무엇을 텍스트 이해에 중요한 요소로 포함시키고 배제시키느냐에 따라 무한히 다양한 맥락을 구성하는 것이 가능하므로, 맥락이 텍스트 해석에 영향을 미치므로 무한히 다양한, 그러나 각각의 맥락에 비추어서는 타당한 텍스트 해석들의 존재 또한 가능하다. 맥락을 구성하는 요소에 대한 기준이 없다면, 해석의 타당성을 평가할 기준 또한 없게 될 것이다. 맥락이 텍스트의 의미를 결정한다는 이론적 주장을 할 때는 이런 문제를 고려할 필요가 없지만 실재하는 역사적 텍스트의 의미는 무엇이다라는 경험적 주장을 할 때는 이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실제로 맥락을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 되며, 또한 이 재구성된 맥락이 다른 사람들이 재구성한 맥락보다 낫다는 것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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