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형이상학 입문
투마스 타코 지음, 박준호 옮김 / 서광사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번역의 질이 많이 안 좋다. 책을 읽다가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 있어 원문을 찾아 보면 오역이다. 나는 소위 말하는 '번역비평'이란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번역자의 부담을 크게 만들어 번역 작업을 위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형이상학은 어렵다', '철학은 어렵다', '분석철학은 어렵다' 등의 생각을 하는 독자들이 있을까봐 굳이 지적을 한다. 책을 읽다가 조금이라도 이해가 안 되거나 막히는 부분이 있다면 원문을 찾아 보면 된다. 분석철학자들은 대체로 매우 평이한 문장을 구사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 책과 같은 입문서의 문장들은 더욱 평이하므로 그리 수고로운 작업이 아닐 것이다. 한 편, 책을 읽는 목적이 극히 최근의 분석철학계의 논쟁 지형을 한국어로 빠르게 훑는 것이라면 이 책은 그 목적 달성에는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훨씬 더 질이 나쁜 철학 번역들도 많은데 이 정도면 어떻게든 읽어낼 수는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어차피 대강의 흐름만을 소개하는 책이므로 원문으로 읽더라도 이 책에서 소개하는 어떠한 논증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이해를 얻기는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에, 사실 오역으로 인해 다소 이해도가 떨어지더라도 크게 문제는 안 될지도 모르겠다. 


걱정되는 것이 있다면 본래 평이하게 읽혀야 할 글이 그렇게 읽히지 않음으로써 형이상학에 관심을 막 가진 독자들을 도망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참고 삼아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심각한 오역을 몇 가지 밝혀 본다. 생각이 미치면 앞으로도 틈틈히 업데이트할 생각이다. 최소한 한 쪽에 하나씩 오역이 있다.


(64쪽) 


"크레인의 견해에 따르면 속성의 실존-함축성은 사물의 본성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사물에 대한 서술이 옳으려면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지 결정하는 것이 이 본성이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비실존대상은 이런 속성, 예를 들어, 황금임을 가질 수 없다. 실존하는 것이야말로 황금으로 이루어진 사물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이 문장들은 한 단락의 제일 앞에 등장하는 문장들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한국어로도 잘못된 문장이다. '이런 속성'에서 '이런'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On Crane’s view, it is the natures of things that determine which properties are existence-entailing, as these natures determine which conditions must hold for predications to be true of those things. In contrast, non-existent objects cannot have certain properties, such as being golden, because it is in the nature of golden things that they exist." 


'certain' 의 번역이 잘못되었다. 비실존대상은 '이런' 속성을 가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속성들을 가질 수 없다. '특정한'이 이상하다면 '비실존대상들이 가질 수 없는 종류의 속성들이 있다.'고 번역해도 좋았을 것이다. 


이번엔 더 큰 오류다. 


(66쪽)


"그래서 표준적 양화논리학과 달리 양화의 범위를 재해석할 것을 제안한다. 그는 비실존자를 포함할 수 있도록 양화의 범위를 확장한다. 그러나 양화의 범위가 처음부터 비실존자를 포함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크레인은 집합으로 간주되는 양화의 범위 개념에 토대를 두고 자신의 이론을 전개한다."


문장의 전개가 엉망이라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 원문은 이렇다. 


"Instead, Crane offers a reinterpretation of domains of quantification, suggesting that they may include non-existents as well. But why think that domains of quantification could not include non-existents in the first place? Crane has a theory, based on the popular conception of domains of quantification regarded as sets:" 


"그러나 양화의 범위가 처음부터 비실존자를 포함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는 완전한 오역이다. 크레인은 비실존자를 포함하도록 양화의 범위를 확장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이는 표준적인 해석에 따르면 양화의 범위에는 비실존자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소리이다. 여기서 글쓴이가 묻고 있는 것은 대체 왜 표준적 해석은 양화의 범위에 비실존자를 포함시키지 않느냐는 거이다. 따라서 "그런데 왜 애초에 (사람들은) 양화의 범위에 비실존자가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정도로 옮겨야 자연스럽다. 이 다음 오역은 더욱 심각하다. "Crane has a theory"를 "크레인은 자신의 이론을 전개한다"로 옮겼다. 그러나 여기서 'theory'는 추측을 가리킨다. 즉, "크레인은 많은 철학자들이 양화의 범위를 집합이라 생각한다는 사실이 그 이유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도로 옮기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70쪽)


"상대주의자에 관한 둘째 이해에 의거하면"


"On a second, relativist , understanding"


=> "두번째 해석인 상대주의적 해석에 따르면" 정도로 번역해야 한다. 



(188쪽) 

"Q가 P 로 환원되면, P는 Q에 근거한다"

말이 안 된다. 원문은 이렇다. 

"If p reduces to q,then p grounds q." 

"...환원되면, P가 Q를 근거짓는다"

반대로 번역해 놓았으니 말이 될리가 없다.




(320쪽)


"반 프란센의 지적에 따르면 형이상학이 제대로 반증가능성을 갖지 못한다면 자연주의를 전면적으로 전복시키려는 현대 형이상학자에게 큰 문젯거리이다."


313쪽에서 거의 모든 현대 형이상학자가 자연주의를 수용하고 있다고 쓰여 있으며, 자연주의를 전면적으로 전복시키려는 현대 형이상학의 기획은 소개된 바 없으므로, 이해 불가능한 문장이다. 


"Van Fraassen points out that the failure of metaphysics to be properly falsifiable is particularly problematic for those contemporary metaphysicians who strive to uphold some version of naturalism (which is most of them)."


오역이 발생한 이유는 'uphold'를 '전복시키다'로 옮겼기 때문이다. 'uphold' 는 '유지하다', '옹호하다'와 같은 뜻을 갖고 있다. 사전도 안 찾아 봤다는 얘기다..




이와 같이 논쟁의 여지 없이 틀린 번역이 거의 매 페이지마다 등장한다..






덧. 사실 원저 자체가 굳이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이라 생각된다. 원저를 영어로 볼 시간이 있다면 차라리 Chalmers 가 편집한 "Metametaphysics: new essays on the foundations of ontology"에 수록된 논문들을 추려 읽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 투마스 타코도 이 선집에 실린 논문들에 엄청 기대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