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한 불가능
신은혜 지음 / 제철소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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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TV를 잘 보여주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 덕분에 나 또한 TV를 잘 보지 않게 되었다. 재밌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와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는 프로그램들은 가끔 찾아 보긴 하는데, 잠이 더 소중한 내게는 TV 보다는 잠이다. 크게 인기가 있었던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비교적 최근에 본 드라마 중에 <대행사>라는 작품을 본 적이 있다. 광고 대행사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재밌게 본 기억이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카피라이터의 삶이 회사내 권력구조와 함께 빚어내는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이 책의 저자가 카피라이터라서 그런가. 책을 읽는 내내 그 드라마에 작가의 모습을 겹쳐 그리곤 했다. 미디어가 상상에 제한을 건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다. 책은 재미있다. 저자가 하지 못하는, 할 수 없었는 일들을 1년의 과제로 설장하고 도전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 중 영어와 수영, 피아노는 나의 버킷리스트와도 겹쳐서 특히 공감하며 읽었다.


 수영과 관련된 나의 이야기를 해 보면 이렇다. 수영은 정말 정말 나와 맞지 않음을 느끼지만, 평생의 과업이 아닐까 싶게도, 수영에의 열망은 쉬이 사그라들지 않는다. 물과의 악연을 잠깐 풀어보자면,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일찍 도시로 나온 우리 가족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나는 초등학교 방학때마다 시골의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가끔 밭일을 돕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동네 아이들과 놀기에 바빴다. 냇가에서 수영도 그중 하나였는데, 나는 수영을 할 줄 몰라 얕은 곳에서만 수영 흉내를 낼 뿐이었다. 그러던 중 아이들이 냇가를 가로질러 오가는 수영을 하는게 쉬워보였던지 나도 따라 건너갔다. 문제는 돌아올 때였다. 몸에 힘이 빠진 나는 허우적 대기 바빴고, 함께 물놀이를 하던 사촌형이 없었다면 큰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그게 처음이 아니다. 내 기억에는 없지만, 삼촌이 젊은 시절(내가 5~6살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은) 우리 가족은 함께 시골에 놀러갔다. 큰 천막을 냇가(위에 내가 사고를 겪은 그 냇가)에 치고 대가족이 야유회를 즐기던 그 날, 삼촌의 눈에 무언가 둥둥 떠내려 오더란다. 건져보니 물을 마셔 배가 볼록한 나였다나. 건저내 인공호흠으로 나를 살려냈다고 한다. 물론 이야기로 들은 사실이고,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기억하는 그 일과 전해들은 이야기는 물에 대한 공포를 갖게 했고, 나는 목욕탕의 탕에만 들어앉아도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겨내고 털어 내고 싶었다. 해병대를 지원한 친구도 수영을 못했다. 입소하기 한달 전에 우리는 함께 수영을 배우기로 했다. 수영복도 없던 우리는 수영복을 사려던 돈으로 그날 술을 마셨다. 그리고 수영복은 갖고 있던 가장 짧은 운동복으로 대체했다. 수영장에서의 첫날 물속에서 나오려 팔에 힘을 주고 물 밖으로 몸을 빼는 그 순간, 물은 바지를 잡아 당겼고, 나는 반대로 빠져 나왔다. 이어져 터지는 아주머니들의 박수 소리. 한달을 등록한 수영장은 그렇게 하루만에 갈 수 없게 되었다. 


  이 책에는 수영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무릎을 굽히지 말라는 건 다리를 각목처럼 뻣뻣하게 펴고 발차기하라는 뜻이 아니라고. 마치 회초리를 휘두르듯 허벅지로 물을 내려 차면 무릎, 종아리, 발목, 발등까지 저절로 부드럽게 움직여질 거라고 했다. ......허벅지가 회초리처럼 부드럽게 움직이면서 물살을 누르는 느낌. 곧이어 발등이 누른 물살의 말캉함. 물을 가르고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가 살갗으로 느껴졌고 한 바퀴를 돌아도 숨이 차지 않았다." 언젠가는 나도 저 느낌을 알고 싶다. 그 희망이 수영에 대한 열망이 식지 않도록 해주는 것 같다. 


  피아노와 기타도 여전히 불가능의 영역으로 남아 있지만, 모르겠다. 조만간 다시 시작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조금은 더 자주 공부를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든다. 머릿속에만 있던 생각들이라 여전히 머릿속에만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책 이야기보다는 잡설이 길었다. 요즘 사람들과 대화를 못해서 그런가. 이상하게 무슨 말을 하면 길어진다. 이 책은 뭔가 공통되는 부분들이 많았던것 같다. 도전을 하는 과제들이 내가 배우고 싶었던 것들과 비슷했고, 글 또한 무런가 나와 비슷했다. 분명 내 글이 논리도 빈약하고 뭔가 부족할텐데.. 이상하게 글이 친숙하게 느껴졌다. 1년에 딱 하나라면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앞서 말한대로 머릿속에만 생각을 둘 것인가, 아니면 실천을 할 것인가. 그 행동력의 차이가 성취를 만들어내는 차이를 만들 것이다. 

"‘난 괜찮다.’ ‘선외 활동 따위 별거 아니다.’ 그렇게 자기암시로 의식을 바꾸려고 몇 번이나 되뇌었던 것 아니야? 못하는 놈이 머릿속에서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라고 자꾸 되뇌어봤자 그건 아무런 도움이 안돼. 중요한 건, 할 수 있다는 ‘경험’을 얻는 거야!"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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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링 업
셸 실버스타인 지음, 김목인 옮김 / 지노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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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를 갖고 드디어 만났습니다. 재밌게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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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지음 / 마이디어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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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을 보고 어찌 구매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해야만 하는 일들이 쌓여 있어서 독서를 좀 자제하고 있는데, 어찌 손이 가지 않을 수 있을까. 작가님을 정말 몰랐다. 여기 저기서 본 이름만 기억에 남아 낯설지 않을 뿐이었다. 그런데 표지에서 작가님의 책,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보고는, 아, 이 소설을 쓴 작가님 이셨군요, 했다. 이 책을 구매하지 전에 이 소설을 구매해 두었더랬다. 같은 작가님 이셨군요. 요즘 좀 소설을 잘 읽지 않긴 했다.


  작가님은 술꾼이다. ~꾼으로 끝나는 사람들은 직업은 아니지만, 무언가에 전문성을 띄고 있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술꾼이 그렇고, 소리꾼이 그렇다. 노름꾼과 사기꾼도 좋은 의미는 아니지만, 전문성을 띄긴 하니까. 나 역시 술을 좋아하긴 하는데, '꾼'까지는 가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과음을 하면, 숙취의 강도가 세게, 그리고 길게 이어진다. 과음이 심해졌다 싶으면, 여지없이 어느 순간부터는 기억도 사라져 있다. 무서웠다. 나이가 들고 적은 양의 음주에도 블랙아웃을 겪거나 숙취로 고생을 하기 시작하면서, 술을 많이 마시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꾼'의 자질을 포기했다고나 할까. 결혼을 하고 육아를 하면서 자연스레 술자리가 많이 줄어든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래저래 '꾼'이 될 수 없는 신체 및 체력과 환경이었다. 


  요즘은 유튜브에서도 그렇고, 술을 마시는 방송들이 많아진다. 방송에서 보여지는 술꾼들의 모습을 볼 때면, 그저 부러울 뿐이다. 이 책에서의 작가님도 마찬가지다. 부럽고, 부럽고, 부러웠다. 젊은 시절 나와 친구들도 돈이 없었다. 술은 마시고 싶은데, 금전적인 여유가 늘 부족했다. 한번은 세 명이 돈을 모았다. 만이천원이 모였다. 소금구이 집에 들어가 육천원짜리 1인분 고기 한 덩이를 시켰다. 손바닥만한 목살을 가위로 손톱 크기로 잘라 불판을 덮었다. 사장님이 보시곤 감탄을 하며, 안쓰러웠는지 한 덩이를 더 주셨다. 그 당시 2천원이던 소주를 3병 시켜 1병씩 마셨다.


  또 한 번은 대낮에 친구가 전화로 나를 불러 냈다. 여자친구와 헤어진 이야기를 굳이 여자친구도 없던 내게 말하며, 온갖 슬픔속으로 빠져 들었다. 우리에게는 2천원이 있었다. 슈퍼마켓에서 천원이던 막걸리를 하나씩 샀다. 갖은 슬픔을 억지로라도 만들며 그 안에 스스로를 가두던 친구 녀석은 술에 빨리 취하는 법을 알려 주겠다고 한다. 갖고 있는 막걸리를 코를 막고 쭈욱 들이켠다. 그리곤 달린다. 조깅하듯 달리는 것이 아니다. 전력질주다. 우리가 만난 곳은 고려대학교(그당시 정문을 들어서면 넓은 운동장이었다)였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뛰고 나니 아래쪽부터 머리 끝까지 술이 한달음에 올라왔다. 그렇게 막걸리 한 병씩 먹고 2~3번을 전력질주한 우리는 운동장 스탠드에 잠들었다. 3~4시간 자고 일어나, 저녁에 수업을 마친 친구 2명을 만나 이별의 슬픔을 맞은 친구의 슬픔속으로 함께 침잠했다.


  그랬다. 지금보다는 몸이 술을 더 감당하던 젊은 시절에는 '꾼'이 되기에는 여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자주, 그리고 많이 마셨다. 술과 관련한 많은 기억들이 있었고, 술을 같이 마셨던 친구들에 대한 많은 추억들이 있었다. 기분좋게 취했던 그 감정들이 좋았고, 즐거웠던 그 시간들이 행복했다. 작가님의 마지막 표현처럼, 나는 사람을 좋아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세월이 흐르며 현실을 살아내야 하는 순간, 마시지 않을 수 없는, 술이 생각나는 순간들은, 과거에 즐겁고 행복하게만 마시던 그 순간들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다. 사람이 좋았던 나는, 이제 사람들 없이 혼자서 마시는 술에 더 익숙해졌다. 


  혼자서 마시는 상황들에 익숙해지다 보면 마셔야만 하는 상황들을 계속 찾거나 만들게 된다. 축구를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대표팀 경기가 있다거나, 얼마전에는 응원하는 팀도 아니었는데 한국시리즈 핑계를 댔다. 술을 전혀 하지 못하는 아내는 또 술이냐며 한마디 하겠지만, 어느 순간 익숙해진듯 하다. 삼겹살을 먹는데 술과 함께 하지 않을 때 오히려 이유를 묻는 아내가 된 것을 보면 말이다.


  술 이야기만 길어졌다. 책 이야기로 돌아오면, 이 책은 작가님의 술에 대한 이야기다. 처음에는 글도 재밌고 술 이야기도 좋은데, 웃음에 대한 감각이 조금은 올드하게 느껴졌다고 해야하나. 개인적으로 술에 대해 정말 재밌게 읽었던, 김혼비님의 <아무튼, 술>이 너무 강했던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너무나도 비슷하게 느껴지는 이 책의 모든 부분들이 나의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양주는 입에 맞지 않고, 많은 술들을 다양하게 먹어 본 것이 아니라서, 최근에서야 입에 가장 잘 맞는다고 느껴지는 증류주를 찾은 나이지만, 블루를 증류주로만 바꾼다면, 이 책은 거의 나의 삶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된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술자리만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너무나도 입가를 미소를 띄며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술꾼'인 작가님을 부러워하면서, 술자리만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회상하면서, 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작가님의 에피소드들의 재미를 느끼면서 말이다. 오랜만에 폭풍 공감과 함께 재미있게 읽은 책이었다. 다시 봐도 제목이 너무 너무 좋았는데, 뭔가 하나가 걸린다. 작가님! 밤에만 드시는 게 아니시잖아요. 그렇다. 이 책의 제목은 <마시지 않을 없는 날이니까요>로 바뀌어야 한다.

지금은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어찌어찌 태어났으므로 우리는 어찌어찌 살아내야 한다. 고통이 더 많은 한 생을. - P59

누가, 혹은 무엇이 나를 술꾼으로 만들었을까? … 나를 술꾼으로 만든 건 사람이다.
나는 사람을 좋아한다. … 그런데 아직도 사람에게 다가가는 법을 잘 모른다. 모른다기보다 어렵다는 게 더 정확하겠다. 술 없이 말을 시작하고, 술 없이 누군가의 삶 속으로 스며드는 게 나는 이 나이 먹도록 어렵다. 그래서 술을 마신다. -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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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과 작업 - 나를 잃지 않고 엄마가 되려는 여자들 돌봄과 작업 1
정서경 외 지음 / 돌고래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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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서 소개를 받은 책이었는지, 아니면 알고리즘에 의한 추천이었는지 생각은 나지 않는다. 육아. 이 책의 제목을 빌리자면, 돌봄. 육아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다면 돌봄은 육아보다는 더 넓은 범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사실 돌봄이라는 단어에서 육아보다는 어른들을 돌보는 느낌을 더 갖게 마련이다. 물론 내 생각이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제목을 보고 단번에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것을 떠올렸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 또 읽고 싶은 책이 하나 추가 되었다. 


  일을 하면서 학업을 마치고 싶었다. 학업을 마친다고 무언가 삶에 대단한 변화가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거기가 종착역은 아닐까. 거기까지 하면 더이상 학업에 대한 미련이나 아쉬움은 없지 않을까. 그렇다고 공부가 끝난다는 생각이 든 것도 아니었다. 해야할 숙제같은 느낌이었달까. 수료를 2학기 남기고 결혼을 했다. 수료를 하는 해에 아이를 가졌고, 그 해 9월에 첫째 아이와 만났다.


  수료만 하면 금방 졸업을 할 줄 알았다. 결혼도 육아도 일도 모두다 다 잘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수료를 하고 2년이 지나 첫번째 논문이 나왔다. 그 다음 해에 둘째 아이를 가졌고, 9월에 둘째 아이와 만났다. 예상보다 조금 늦어질뿐 여전히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박사 과정 중에 처음 쓴 논문이 나오고 나서 5년이 지난, 올 10월 드디어 졸업 예비심사를 받았다. 수료 후 8년 안에 졸업을 해야 하는데, 다음 해면 그 기한이다. 


  육아가 꼭 반반씩 나누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만,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었고, 참여하려고 노력을 했다. 아내의 말도 들어 봐야겠지만, 공부보다도, 일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보내고 싶었다. 그러다 졸업'은' 하고 싶다고 아내에게 도움을 청했다. 작년 7월 이후부터는 퇴근 시간 이후에 회사에 남아 졸업을 준비했다. 한 학기면 충분할 줄 알았다. 그런데 머릿속에 자리한 생각들이 한 자도 써지지 않았다. 모든 생각들은 머릿속에서만 정리가 될 뿐, 막상 키보드의 키는 눌러지지 않았고, 모니터의 커서만 반짝일 뿐이었다. 그러다 눈에 보이면 책을 읽고 말이다.


  그렇게 두 학기가 지나갔다.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는 정말 해야만 했다. 억지로라도 쓰기 시작했다. 머리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그냥 다 적었다. 그리고 정리했다. 시간은 많이 걸렸지만, 그렇게라도 써야 했다. 잘 쓰고 마음에 들고 그런걸 따질 여유도 없었다. 예비심사 전날까지도 수정하고 수정했다. 떨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지만, 물러설 곳도 없어, 그렇게 발표는 시작되었다. 그래도 논리적으로 말은 되지 않을까, 했던 내 연구들은, 1시간의 발표 시간 동안 너덜너덜 해졌다. 어느 정도 인지 알 수 없는 높이에서 발버둥치는 내 모습이 그려졌다. 그 높이가 발이 닿는 아주 낮은 곳은 아닐까, 하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예비발표를 하러 가기 전까지는 발표 자료를 볼 것이지만, 발표 후에는 집으로 오면서 읽을 책이 필요했다. 그 때 내 눈에 이 책이 들어왔다. 역시 내 예감대로 '돌봄'은 '육아'와 연결되어 있었다. 성별은 다르지만, 많은 부분들에서 공감을 하며 읽었다. 10달동안 아이를 품고 있지도 않았고,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이라는 출산을 경험하지도 못했지만, 돌봄에서 오는 많은 경험들에 공감했다.


  모성과 부성을 나눌 필요도 없다. 그저 부모로써 아이들에게 갖는 그 의무와 헌신들. 첫째 아이를 낳았을 때, 아내가 아이에게 수유할 때는 항상 같이 있었다. 수유 후 트림을 할 때까지 안고 토탁이는 일은 나의 일이다. 이유식을 시작하고부터는 이유식은 만드는 일도 나의 일이다. 둘째 아이는 첫째보다 예민했다. 손을 더 탔던 것인지, 유독 밤에 잠을 잘 못 잤다. 잠들어 침대에 내려 놓으면 1~2시간 후에는 꼭 깼다. 그럴 때는 데리로 나와 안아서 잠을 재우고, 소파에서 안고 앉아서 잠든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몇 달을 했더니, 1년 뒤에는 허리가 아파 반년은 고생을 했던 것 같다.


  아이를 탓하지는 않는다. 탓할 일도 아니다. 육아에 대해 나도 아내도 너무 무지했던 탓이다. 책의 내용 그대로다. 육아의 힘듦에 대해 누구 하나 속 시원하게 현실적으로 조언을 해 준 사람들이 없었다. 첫째는 둘 다 몰랐기에 아, 생각보다 힘든 일이구나, 했다. 그렇게 2년의 시간이 지나면 힘듦과 고됨은 희석되기 마련이다. 책의 내용처럼 1+1이 반드시 2는 아니었는데, 우리는 또 그렇게 둘째를 낳아 지금도 돌봄의 과정 속에 있다.


  결혼을 하기 전에는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상해 보였다. 결혼을 해서는 아이를 낳지 않는 사람들이 이상해 보였다. 이상하다기 보다는 이해를 겉으로만 했다고 해야 하나. 이해는 하지만 공감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결혼 생활을 경험하고 나니,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해가 되었다. 아이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아이를 낳지 않는 사람들에 공감을 할 수 있었다. 결혼과 아이들을 후회한다는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그만큼 나 스스로가 결혼과 육아를 너무 가볍게 생각을 했었다는 이야기다.


  해외 출장을 가야만 했다. 1주일 정도의 시간을 아내 혼자 독박 육아에 두는 일이 마음에 걸려 계속 반려를 했으나, 가야만 했다. 다소 무뚝뚝한 첫째임에도 처음 떨어지는 아빠였는지, 공항가는 버스를 타는 걸 보면서부터 울기 시작했다. 출장을 내내 반려하기도 했었지만, 내심 육아에서 합법적(?)으로 벗어나는 시간이 되지 않으려나, 하는 마음도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정말 그 마음은 몇 시간도 가지 않았다. 타국에서의 세미나가 끝나고 남겨지는 그 많은 시간들 속에서, 이국적인 풍경이 주는 색다름도 잠깐이었다. 이 시간, 이 공간에 아내와 아이들이 함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들이 남은 출장의 모든 시간들을 지배했다.


  예비심사가 끝은 아니다. 자괴감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려면 더 많은 시간들을 투입해서 본심사를 준비해야 한다. 이번 학기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저 노력할 뿐이다. 육아의 탓도, 일 탓도 하기 싫다. 그렇게 하다보면, 자괴감만 더 커질 것이다. 모든 것은 나의 부족함이다. 조금은 많이 날카로워진 요즘이다. 그 날카로움이 소중한 사람들에게 향하지 않기만을 바랄뿐이다.


  책 이야기보다는 개인적인 이야기들만 주저리주저리 늘어 놓은 것 같다. 좋은 책이다. 너무 좋은 책이다.

하지만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창조적인 작업은 정지되고 고독한 시간 속에서가 아니라 흘러가는 분주한 일상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이다. - P18

다만 어떤 순간에도 아이들이 있는 것이 행복했다. 아이들이 없던 삶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물론 아이를 낳지 않았더라도 행복했으리라는 것을 안다. 조금 다른 행복이었을 것이다. 조금 덜 고통스럽고 조금 덜 맹렬한 행복. - P41

첫째 아이를 낳을 때였다. 갑자기 정신이 혼미해지고 주변의 소리가 멀어지더니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 선생님이 산소마스크를 씌워주며 숨을 크게 쉬라고 했다. 그때 떠오른 생각이 대문자처럼 생생하다. 아기를 낳고 내가 죽는 것과 아기가 죽고 내가 사는 것 사이에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아기를 낳는 쪽을 택할 것이다. 망설일 필요도 없다. 왜일까? 내 선택이 아니라 자연의 선택이니까. 우리 어머니가, 할머니가, 수많은 엄마들이 똑같은 선택을 했고 나는 방금 그중 하나가 된 것뿐이니까. 지금부터 나는 비슷한 선택지 앞에서 끝없이 같은 선택을 하겠지. 그것이 앞으로의 내 삶이다. - P42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것이 미안해질 때면 나만 소설을 안 쓰면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에 빠졌다. 잘 쓰지도 못하면서 왜 모두를 외롭게 힘들게 하고 있나 자책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좀 더 깊이 있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소설을 쓴다는 건 노트에 열심히 기록하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글자 수를 늘리는 일이 아닌데 나는 그저 어떤 이야기를 잘 정리해서 전달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소설적 순간을 만나고 소설적인 장면을 만들고 소설적 깊이를 가지려면 어떤 대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피어오르는 생각을 이렇게 저렇게 만지작거려야 하는데, 예열만 하다 끝나거나 예열 없이 바로 써버리는 것 같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새벽에 깨어 마음에 들지 않는 문장과 베란다 창문을 번갈아 볼 때면 ‘그만 쓰는 게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절망적인 목소리로 찾아왔다. - P54

시간이 많았다면 소설을 더 잘 쓰지 않았을까, 돌아보는 게 대표적이었는데 그 생각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텼던 건 그게 진실이 아니라는 걸 내가 더 잘 알았기 때문이다. - P55

아이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도 어떤 겹이 생겨나는 걸 느꼈다. 이것을 성장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인간의 성장은 날개를 펴는 것처럼 자유로워지거나 꽃이 피듯 눈부신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어떤 일을 통과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다른 곳에 도달하게 되는 일인 것 같다. - P59

어디서 나왔을까 깊은 산길
갓 태어난 듯한 다람쥐새끼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맑은 눈빛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고집할 수가 없다
세상의 모든 어린것들은
내 앞에 눈부신 꼬리를 쳐들고
나를 어미라 부른다
괜히 가슴이 저릿저릿한 게
핑그르르 굳었던 젖이 돈다
젖이 차올라 겨드랑이까지 찡해오면
지금쯤 내 어린것은
얼마나 젖이 그리울까
울면서 젖을 짜버리던 생각이 문득 난다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
난만한 그 눈동자,
너를 떠나서는 아무 데도 갈 수 없다고
갈 수도 없다고
나는 오르던 산길을 내려오고 만다
하, 물웅덩이에는 무사한 송사리떼

- 나희덕, 「어린 것」,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창비, 1994. - P65

고결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성이 때로 사납고 난폭하게 폭발해서 나를 당황하게 하리라는 것도 예상하지 못했다. - P67

아이의 성취는 내가 축하할 일이고, 아이의 실패는 내가 위로할 일일 뿐이다. - P73

‘모성’은 열 달 아이를 품고 있다고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찾아 배워야 실현할 수 있는 것이었다. - P99

엄마를 ‘당연히 사과를 (껍질이 안 끊기게) 잘 깎아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한때 칼을 어떻게 쥐어야 하는 줄도 몰랐지만 사과 껍질을 잘 깎게 된, 변화된 인간’으로 봐줬으면. 나도 내 엄마를 떠올리며, 엄마니까 당연하다고만 여겼던 것들에 대해 반성한다. 내 엄마도 엄마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과 변화의 과정을 거쳤던 것일까? 어떤 이는 나와 다르게 사라진 것에 대한 회복을 갈망하는 방식으로 삶을 견뎌내기도 한다. - P128

모든 인간은 자신의 쓸모와 가치를 입증하지 않아도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을. 내가 이렇게 열심히 다른 사람들의 필요, 사회의 필요, 공적인 필요에 부응해내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것을.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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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건너기 소설의 첫 만남 30
천선란 지음, 리툰 그림 / 창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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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과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SF 소설을 잘 모름에도 우연히 읽었던 <노랜드>는 SF 소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해 주었다. 막연하게나마 짐작하고 있었던 어중간한 생각을 바꾸게 된 계기였다고나 할까. 그렇게 천선란 작가의 이름을 각인한 상태에서 표지의 그림까지 너무나 아름다운 책이라니. 구매했다. 책을 받고 나서는 이렇게 얇은 책일줄 몰라 놀랐다.


  역시 SF 소설이다. 그러나 <노랜드>에서 느꼈던 것처럼 장르를 SF라고만 한정지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정확하게 장르적 정의를 찾아본 것은 아니지만, 단지 미래의 이야기라고 해서 SF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책도 주인공은 우주비행사다. 새로운 우주 비행을 앞두고 훈련상 과거의 나를 만나야만 한다.


  그 설정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책의 뒷 표지에는 '가장 외로웠던 나를 만나러 간다. 잘 만나고 와. 그리고 한번은 꼭 끌어안아 주어야 해'라고 써 있다. 누구라도 과거의 나는 외로웠던 것일까. 지금의 외로움이 과거의 나를 반추하게 하는 것일까. 많은 생각들이 지나쳐 간다. 지금의 나를 형성하는 데에는 어느 시점의 내가 가장 큰 역할을 했을까. 궁금한 것들, 생각나게 하는 것들이 많아졌다.


  노을을 건너는 의미는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어렴풋하게만 남는다. 정확하게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가장 외로웠던 어린 날의 나를 만나 꼭 끌어안아 줄 수 있을까. 만약 그 후에라면 노을을 건널 수 있을까. 노을은 마주 볼 때만 아름다운 것은 아닐까. 오히려 그 건너에는 블랙홀 같은 암흑만 있는 것은 아닐까. 여전히 생각만 늘어날 뿐이다.

어린 공효는 늘 예기치 못한 곳에서 마음이 상했다. 엄마가 마트에서 장을 보며 전화를 너무 오래 할 때,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며 공효의 눈을 보지 않을 때, 늦은 시간에 귀가해 공효에게 밥을 먹었느냐 묻지 않을 때, 달이 예쁜데 엄마가 앞만 보고 걸을 때, 엄마가 싱크대 앞에 서서 물을 너무 오래도록 마실 때, 쓰레기를 버리러 갔다가 한참 동안 오지 않을 때, 금방이라도 놓을 듯 힘없이 손을 잡을 때, 공효가 어깨에 기대도 몸이 목석처럼 굳어 움직이지 않을 때, 자는 공효의 뺨을 만져 주지 않을 때, 엄마가 양말 짝을 맞추지 않고 신을 때. 그럴 때, 공효는 걸음을 멈췄다. - P32

아무런 준비 없이 엄마의 외로움을 보았던 거다. 그게 외로운 사람이 짓는 표정과 정적이라는 걸 모른 채로 그 마음의 중력을 온몸으로 받아 버린 거지. 소리를 지르고 싶었던 건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으리라. - P35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것들은 매달리기보다 포기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말하는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것들이란, 기록이나 시험 통과가 아니라 엄마의 기일이 오면 찾아오는 무기력함, 예고도 없이 밀어닥치는 자기혐오, 앞으로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는 확신 따위였다. 그런 기분이 들 때마다 공효는 도망쳤다.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을 직면해야 하는지, 무엇을 감싸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천천히 짚기에는 삶이 너무 바빴다. 공효는 해야 할 게 많았다. 당장 눈앞의 것들을 잘 해 내면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리라 믿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알아서 사라질 거라고. 하지만 그런 믿음은 틀렸다. 외면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정말로 죽여야 할 때가 온 것이다. - P47

"응. 나는 네가 보는 시선의 처음이고, 네가 느끼는 감정의 중심이고, 네가 선택하는 모든 순간의 기준이야. 내가 없으면 너는 안이 텅 빌 거야. 그럼 바람에 훅 날아가 버려."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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