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건너기 소설의 첫 만남 30
천선란 지음, 리툰 그림 / 창비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과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SF 소설을 잘 모름에도 우연히 읽었던 <노랜드>는 SF 소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해 주었다. 막연하게나마 짐작하고 있었던 어중간한 생각을 바꾸게 된 계기였다고나 할까. 그렇게 천선란 작가의 이름을 각인한 상태에서 표지의 그림까지 너무나 아름다운 책이라니. 구매했다. 책을 받고 나서는 이렇게 얇은 책일줄 몰라 놀랐다.


  역시 SF 소설이다. 그러나 <노랜드>에서 느꼈던 것처럼 장르를 SF라고만 한정지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정확하게 장르적 정의를 찾아본 것은 아니지만, 단지 미래의 이야기라고 해서 SF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책도 주인공은 우주비행사다. 새로운 우주 비행을 앞두고 훈련상 과거의 나를 만나야만 한다.


  그 설정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책의 뒷 표지에는 '가장 외로웠던 나를 만나러 간다. 잘 만나고 와. 그리고 한번은 꼭 끌어안아 주어야 해'라고 써 있다. 누구라도 과거의 나는 외로웠던 것일까. 지금의 외로움이 과거의 나를 반추하게 하는 것일까. 많은 생각들이 지나쳐 간다. 지금의 나를 형성하는 데에는 어느 시점의 내가 가장 큰 역할을 했을까. 궁금한 것들, 생각나게 하는 것들이 많아졌다.


  노을을 건너는 의미는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어렴풋하게만 남는다. 정확하게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가장 외로웠던 어린 날의 나를 만나 꼭 끌어안아 줄 수 있을까. 만약 그 후에라면 노을을 건널 수 있을까. 노을은 마주 볼 때만 아름다운 것은 아닐까. 오히려 그 건너에는 블랙홀 같은 암흑만 있는 것은 아닐까. 여전히 생각만 늘어날 뿐이다.

어린 공효는 늘 예기치 못한 곳에서 마음이 상했다. 엄마가 마트에서 장을 보며 전화를 너무 오래 할 때,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며 공효의 눈을 보지 않을 때, 늦은 시간에 귀가해 공효에게 밥을 먹었느냐 묻지 않을 때, 달이 예쁜데 엄마가 앞만 보고 걸을 때, 엄마가 싱크대 앞에 서서 물을 너무 오래도록 마실 때, 쓰레기를 버리러 갔다가 한참 동안 오지 않을 때, 금방이라도 놓을 듯 힘없이 손을 잡을 때, 공효가 어깨에 기대도 몸이 목석처럼 굳어 움직이지 않을 때, 자는 공효의 뺨을 만져 주지 않을 때, 엄마가 양말 짝을 맞추지 않고 신을 때. 그럴 때, 공효는 걸음을 멈췄다. - P32

아무런 준비 없이 엄마의 외로움을 보았던 거다. 그게 외로운 사람이 짓는 표정과 정적이라는 걸 모른 채로 그 마음의 중력을 온몸으로 받아 버린 거지. 소리를 지르고 싶었던 건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으리라. - P35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것들은 매달리기보다 포기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말하는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것들이란, 기록이나 시험 통과가 아니라 엄마의 기일이 오면 찾아오는 무기력함, 예고도 없이 밀어닥치는 자기혐오, 앞으로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는 확신 따위였다. 그런 기분이 들 때마다 공효는 도망쳤다.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을 직면해야 하는지, 무엇을 감싸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천천히 짚기에는 삶이 너무 바빴다. 공효는 해야 할 게 많았다. 당장 눈앞의 것들을 잘 해 내면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리라 믿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알아서 사라질 거라고. 하지만 그런 믿음은 틀렸다. 외면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정말로 죽여야 할 때가 온 것이다. - P47

"응. 나는 네가 보는 시선의 처음이고, 네가 느끼는 감정의 중심이고, 네가 선택하는 모든 순간의 기준이야. 내가 없으면 너는 안이 텅 빌 거야. 그럼 바람에 훅 날아가 버려." - P6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