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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의에 대하여 - 무엇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가
문형배 지음 / 김영사 / 2025년 8월
평점 :

전 대통령의 탄핵선고를 하던 날,
라이브 방송을 하기 전부터 기다리고 있다가 시청할 만큼
한없이 어리석고 오만했던 전 대통령의 계엄 선포와
일련의 과정들에 적잖이 분노하며
돌아가는 상황을 예의주시해 왔기 때문에 관심있게 지켜봤었다.
내란 상황을 겪고 난 지금은
더이상 사법 권력을 우러러 보기만 하지 않는다.
마치 성역과도 같았던 그들에 대해서
야금야금 의심을 하기 시작했고
비판과 견제의 목소리도 키워가고 있는 요즘이다.
인간에게 이롭게 작용할 수 있도록 법을 수호하려는 측과
법을 악용하여 사적인 이익을 취하려는 무리로
극명히 나뉘어지는 시대인 것 같다.
계엄을 선포한 전 대통령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법비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도 한다.
이런 작금의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좌우하는
중대한 결정문을 써야 했던 헌법재판관들의 고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의한 집단의 작전에 놀아나지 않고
모든 시민의 상식으로 납득할 수 있는 결과를
이끌어 내길 고대했었고
마침내 그 결정적인 선고문을 문형배 재판관의 입을 통해 들었다.
계엄을 선포했던 전 대통령의 탄핵선고를 두고
제일 고심하며 결정문을 썼다고 들었다.
문형배 재판관의 첫 에세이가 김영사에서 나왔다.
역시 예상대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책인듯 싶다.
1998년 9월부터 2025년 8월까지 '자작나무'라는 필명으로
그의 블로그에 남긴 1500여편 중에서
120편을 선별하여 묶었다.
https://favor15.tistory.com/
1부는 일상과 나무 이야기, 2부는 독서일기,
3부는 사법부 게시판에 올렸던 글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자신이 블로그에 글을 쓰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법을 모르는 착한 사람들에게
법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함이라고 했다.
착한 사람은 법을 몰라서 곤경에 처하는 반면,
법을 아는 사람들 중에는 착하지 않아서
법의 사각지대를 교묘히 악용하며
죄없는 이들을 곤경에 빠뜨리곤 한다.
그래서 문형배 재판관이 내린 결론은
법을 아는 사람에게 착하기를 요구하는 건 어려우니
착한 사람이 법을 아는 게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의 호의는 호의를 온전히 누릴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 향한다.
어떤 삶을 살아왔으며, 어떤 경험과 사유를 하는 사람인지 궁금했다.
김영사의 문형배 에세이를 통해 만나보니
그저 소소한 일상에 감사할 줄 알며
책과 나무, 등산과 산책, 그리고 롯데 자이언츠 야구에 열광하는 보통 사람이었다.
살아 생전 처음으로 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보다
롯데 우승을 간절히 염원하는 사람이었다.^^
<호의에 대하여> 에세이 한 권을 다 읽고 나서 덮을 때쯤이면
영웅 이미지라는 판타지를 벗기게 된다.
착한 사람들이 법을 몰라서 인생이 곤란해지지 않도록
친밀하고도 세세한 팁들도 잊지 않는다.
이를테면 "민사 재판 잘 받는 법" 같은 거....^^
책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자신만의 책을 고르는 기준도 공유하고 있다.
신영복 교수, 정민 교수, 유시민 전 장관, 소설가 김훈, 오지탐험가 한비야(꽤 오래전...^^;),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고미숙 박사....
그리고 나 또한 너무나 좋아하는 장영희 교수도 언급하고 있다.
이렇게 저자를 보고 책을 고르기도 하고 때로는 주제어를 보고 고르기도 한다고.
정의, 소통, 성찰, 역사, 철학, 인생, 여행,
행복이라는 주제어에 관한 책들은
<정의란 무엇인가>, <서양철학사>, <행복의 정복>, <인생이란 무엇인가> 등등....
오프라인, 온라인 서점을 통해 직접 책을 구매하고
읽었는데 재미가 없거나 이해가 안 되는 책에 대하여는
독후감을 쓰지 않는 것으로 복수한다는 지점은
나도 좀 비슷하고.... ㅎㅎㅎ
블로그에 독후감을 쓰는 이유에서는 정말 많이 겹친다.
책 내용을 정리하는 효과가 있고 글쓰기 훈련도 되면서
다른 그을 쓸 때 인용하기도 쉽다는 점.
<호의에 대하여> 속에 소개된 그의 독후감들 중에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로 대표되는 러시아 문학작품을 소개해주는 대목들이 흥미로웠다.
읽은지 오래 되었거나, 읽었지만 내게는 다소 난해했던 작품들을
문형배 작가를 거쳐 다시 한번 접하니
조금 더 편하게 수용되기도 했다.
세 개의 챕터 중에서 두 번째 독서일기는
독서 에세이 장르와도 같아서
개인적 취향에 더 많이 닿아있어 좋았다.^^
모든 글이 하나같이 반가웠던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오래 전에 남긴 생각이라 그런걸까?
요즘 대한민국의 사법 권력을 보면 청렴하다는 문구는 당최 동의하기가 어렵다.
내부자로서 객관화가 안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지금도 같은 생각인지 묻고 싶다.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더더욱
청렴하면서도 상식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공직에 있음에도 몇몇 소수가 자신에게 부여된 힘이 자신의 것인 줄 착각하고
그것을 사적으로 악용하고 있으니 매의 눈을 거둘 수가 없다.
내란 정국에 문형배 재판관이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었다는 사실은
대한민국에게는 어쩌면 축복이었다.
참 다행이다....
브레히트는 "불의는 인간적이다. 그러나 더 인간적인 것은
불의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
브레히트는 또한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옳지 않다고 강조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했다.
즉 불의를 묵과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강조하는 일이다.
불의를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은 적지만
불의를 묵과할 수 있는 사람은 많다.
판사가 불의를 저지르는 삶을 살기는 어렵다.
그러나 불의를 묵과하는 삶을 사는 것은 가능하다.
헌법이 법관에게 부여한 지위와 역할을 소명으로서 받아들이고
소명을 실천할 자질과 역량이 있는지
늘 성찰해야 한다.
브레히트가 남긴 말을 인용한 것으로
판사로 살아가는 삶에 대한 문형배 재판관의 인식을 엿볼 수 있었다.
해야할 것보다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이었다.
정의로워야함을 쫓기 보다는 불의를 늘 경계해야 한다는 걸 잊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문형배 재판관에게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을 보여주었던
故 한기택 판사와의 일화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약자에게는 관대하고 강자에게는 엄격한 판결을 내리는 것으로 유명했던 분이라고 한다.
문형배 재판관의 궤적과 어쩌면 맞닿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시각 장애인에게만 안마사 자격을 인정하는 것은
장애인에 대한 국가의 보호 의무를 규정한 헌법에 따른 것이며
국가가 시각 장애인의 생계를
실질적으로 보장해주지 못하는 현실에서
이 제도가 부당하다고 볼 수는 없다.
비장애인의 직업 선택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시각장애인의 생존권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다."
인간은 직,간접적으로 인접해있는 존재로 인해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보이지 않지만 어떠한 고리로 인해 주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일테다.
다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살아가는 삶이 아름답다고 믿는다.
자신을 낮추며 겸손한 태도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나 자신만큼 다른 사람도 소중함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늘 품고 살아온 '호의'에 대한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