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양장) - 개정판 새움 세계문학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알베르 카뮈, 그리고 그의 이름을 지금까지 불리게 하는 그의 대표 작품인 소설 <이방인> 을


그동안 소장하고 있던 민음사 버전이 아닌 새움 출판사 이정서 번역으로 처음 만납니다!!!


이건 저로서는 예상치도 못한 전개였어요.


사실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을 참 좋아하고 아주 가끔 민음사의 번역이 문제가 있는 소설의 경우에만


다른 출판사의 번역을 찾곤 했었는데 그렇게 유명한 소설 <이방인>의 민음사 버전의 번역이


이슈의 중심에 있는 소설이라는 걸 까마득히 모르고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것이 제게는 꽤나 충격이었어요.


번역 하나하나 어떻게 다 꼼꼼히 따져가면서 책을 골라 보겠냐는 생각부터


피로감을 주기도 하지만 그래도 저 역시 나름 번역을 챙겨가면서 책을 골랐었는데


<이방인> 은 그냥 무조건 민음사 버전이지라는 인식으로 의심도 없이 골라서 구입했었고


새움 출판사의 <이방인> 으로 먼저 만나지 않았더라면


번역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이 책을 만나기 전처럼


가볍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한건 새움 <이방인> 을 번역한 이정서 번역가의 "직역이 아니면 안 된다"는 주장에


저도 기분좋게 설득당했고 두 번역의 차이점이 무엇일지에 대한 호기심과 약간의 의심으로


소장하고 있던 민음사 버전과 새움 버전의 <이방인> 첫 페이지를 비교하면서 보기 시작했습니다.


1장이 끝날 때까지 두 버전의 번역을 비교해 가면서 읽어봤죠.


불어로 쓰인 <이방인> 은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1942년에 처음 출간되었고


가장 정확한 번역으로 권위를 자랑하는 책으로는 미국의 번역서가 있다고 하는데


이 마저도 직역론자 이정서가 얘기하는 원문 그대로의 순서를 따르는 번역은 아니었어요.


그리고 시중에 나와있는 <이방인> 번역서 중에 가장 인지도 있는 민음사 버전을 포함하여


시공사, 열린책들의 번역들을 동시에 보면서


같은 문장인데도 미묘하게, 때로는 의미의 차이를 크게 보이는 번역들을 비교하는 부분은 흥미로웠습니다.


한편 놀라웠던 지점은 같은 문장을 이렇게 다르게 번역하게 되는 이유가


번역자들의 외국어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번역자들의 직업적 경험이나 재량(?) 에 따른 것이라는 지적.


그래서 그동안 우리가 읽은 <이방인> 은 알베르 카뮈의 것이 아니었다는,


다소 도발적인 번역에 대한 문제점을 6년전에 제기했던 이정서 번역가가


새움 출판사에서 6년만에 새롭게 개정판으로 내놓은 <이방인> 이라는 것.


번역자의 재량으로 의역을 했던 기존의 <이방인> 을 읽은 분들이라면


오랜만에 다시 알베르 카뮈의 걸작 <이방인> 을 원문 그대로 쉼표를 살리고 어순도 변함없이


원문을 직역 그대로 만나보시는 건 어떨까요.^^


 민음사 버전과 새움의 번역을 비교해서 본 바로는 개인적으로 저는


새움의 번역이 매끄러웠습니다.


그리고 오래 전에 번역된 것이라 그럴까요....민음사 버전의 번역은 쓰인 단어 자체가 어렵고


현 시대의 언어와 좀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도 받았어요.


어느 것 하나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두 개를 비교해보니 그렇더라구요.


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참 애정하는 독자입니다.^^


하지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도 번역이 좋지 않은 작품이

 

 

분명히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 계기는 되었어요!!


오랜 시간동안 읽혀져 온 인지도 있는 번역에 대해

 

 

의심없이 무조건 수용하는 것이 맞는가에 대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워낙 세계문학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원작자의 메시지 그대로 읽고 싶은 순수한 독자의 마음으로 번역에 대한 중요성을 새기면서


서론이 무지 길었습니다. ㅋㅋㅋ


그만큼 새움 버전의 <이방인> 은 번역에 대한 의미도

 

 

굉장히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어요.


절반으로 구분할 때 왼편이 <이방인> 소설 내용 분량이고


오른편이 역자노트와 이방인 깊이 읽기, 역자후기까지 담긴 부록이거든요.


2014년 이정서 번역가의 책이 6년만에 양장본으로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그동안 국내 번역에 대한 인식으로 오랜 시간 자리를 지켜온 기존 <이방인> 의 오역을 지적했던 바,


번역이 얼마나 달랐고 번역으로 소설을 이해하는데 난관이 있었다면 얼마나 차이가 있었는지


알베르 카뮈와 소설 <이방인> 을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이번 기회에 한번 더 ㅎㅎㅎ


이 소설 저도 이번에 처음 읽었지만 "이해가 안 되고 어려워서 또 읽어야겠다"가 아니라


묘하게 끌리는 알베르 카뮈의 문체 때문에 "또 읽어보고싶다" 는 생각이 들었던 소설이었어요.


전세계 101개 국가에서 번역된 우리 시대 최고의 소설이라는 타이틀이


정말이지 괜히 붙은 건 아닌듯!!!


그리고 우리 삶에 대한 이야기이며 각 개인의 실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 소설을 읽고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독서모임의 필요성을 더더욱 느꼈던 소설입니다.


소설 <이방인> 의 유명한 첫 문장, "오늘, 엄마가 돌아가셨다".


의역으로 인한 소설 <이방인> 의 오역을 안타까워했던 번역자 때문인지


저 역시도 번역의 차이에 따라 부분이 모여 

 

 

소설의 전체를 파악하는데 영향을 미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이 첫 문장에서부터 하게 됩니다.


주체, 주체의 행위, 시기. 어느 것에 힘주어 말했느냐라고 한다면

 

 

 알베르 카뮈는 "오늘" 이었더라구요.


하지만 다른 번역들은 다 조금씩 어감이 달랐고 힘주는 부분도 달랐거든요.


물론 부분을 가지고 전체 맥락을 규정할 수는 없겠지만 가늠은 해볼 수 있겠다라고 한다면,


 소설 <이방인> 에 대해서 여러 방면으로 얘기하게 될 때,


인간의 죽음이 불가피한 것임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삶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길 줄 알게 될진데


카뮈에게는 어머니의 죽음을 어찌 보면 순리로 받아들이며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되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바로 오늘은 언제든지 올 수 있는 것이지만 이 오늘의 일이


앞으로 뫼르소의 인생에 어떤 부조리한 시간들을 경험하게 하는지 멀찌감치 내다볼 때


중요한 시점이며 사건이 되기에 이 첫 문장이 오랫동안 유명하게 얘기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동시에 어머니의 장례식을 대하는 뫼르소의 행동이


이 사회에서는 이방인의 모습으로 여겨지는 이 세상에서의 부조리함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슬퍼하는 모습도, 눈물을 흘리는 모습도 없는 아들은


우연히 태양으로 인해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결국은 사형선고까지 받게 되는 이 연결고리를 과연 소설적인 허구라고만 볼 수 있을지.....


 뫼르소와 그의 어머니 사이에는 평범한 모자지간의 정이 표현되고 있지 않기에


장례식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하는 아들 뫼르소의 모습은 그리 어색하지만도 않은 듯 한데요.


문제는 이 세상에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아들이라면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의례 슬퍼해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그 당연할지도 모르는 생각으로부터 뫼르소는 분명히 벗어나 있기에 


'이방인' 이라고 말하자면 틀린 것 같진 않습니다.


대부분은 도덕적 지탄을 받지 않으려 타자를 의식해서 세상의 '유희' 에 편승하지만,


뫼르소는 그런 유희, 게임에 반응하지 않거든요.


이정서 번역자는 유희라는 기존의 번역을 '게임'이라고 표현하고 있기도 하는데요.


그 게임에 부응하지 않았기에 결국은 뫼르소가 사형 선고를 받는 과정이 


이 세상의 부조리함을 보여주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주변 사람들의 질문에 대해 대답도 간단히, 많은 얘기를 하지 않는 뫼르소는


말이 많아지다 보면 거짓말을 하게 확률도 높아지는

 

 

인간의 본성마저 꿰뚫고 뫼르소를 설정했나 싶기도 해요.


뫼르소는 말을 많이 하지 않음으로써 많은 말을 하는 인물인 것입니다.


카뮈는 말이 아니라 듣거나 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소설 속에서도 응시하는 것, 바라 보는 것에 힘이 실리고 있구나 미루어 짐작하게 합니다.


그렇게 주변 사람들도 뫼르소에 대한 신뢰를 가지며

 

 

법정에서 그를 변호하는 말들을 하기도 하니까요.


물론 대부분의 인간 관계가 그러하듯 각자의 이유와 이해관계로 다 그러하진 않습니다만.....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장례식에서 만난 사람들은 뫼르소의 태도를 보면서 그를 재단하게 됩니다.


사회 안에서의 유희, 게임 속에서 놀아나지 않으려는, 자신의 본 모습을 유지하는 뫼르소가 이방인인건지


아니면 타자를 의식해서 자신의 본 모습을 감추고 가면 쓴 모습을 보이는 세상 사람들이 이방인인건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제가 오히려 착각하게 되고 헷갈리는 경험을 하기도 했어요.


무엇이 본질이고 진심인 걸까요...... 뫼르소가 이방인으로 비춰지는 이 현실 사회의 본 모습은 과연 무엇일까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슬퍼하지 않고 눈물조차 흘리지 않는 아들이


친구와 함께 해변가에 놀러갔다가 친구 대신에 어찌하다 권총을 건네 받게 되고,


친구를 괴롭혔던 아랍인을 우연히 대면하게 되면서 뫼르소 입장에서는


뫼르소를 위협하고 칼로 눈을 찌른 아랍인을 향해 정당 방위로 권총을 꺼내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죠.


아랍인과 뫼르소는 서로를 응시하며 긴장감이 드는 순간을 마주합니다.


그 유명한 일명 "태양 살인" 이 일어나는 소설의 하이라이트는 저 역시 읽으면서 한 줄 한 줄


뫼르소에 이입되어 떨리고 긴박한 순간이 전해지는 듯 했어요.




"내가 뒤로 돌아서기만 하면 끝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햇볕으로 이글거리는 해변 전체가 뒤에서 나를 압박했다.


나는 샘을 향해 몇 걸음 내디뎠다.


아랍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아직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


나는 기다렸다. 타는 듯한 태양이 내 뺨에 엄습했고 나는 눈썹에 땀방울이 맺히는 것을 느꼈다.


.......


그 뜨거움 때문에 나는 서 있을 수가 없었고, 한 걸음을 더 앞으로 나아갔다.


나도 알았다. 그것이 어리석은 짓임을, 한 걸음을 더 옮겨 봤자 햇볕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한 걸음을, 다만 한 걸음을 더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이번엔,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아랍인이 칼을 뽑아서 햇볕 안에 있는 내게 겨누었다.


빛이 강철 위에서 반사되며 번쩍이는 길쭉한 칼날처럼 내 이마에 닿았다.


그 순간, 눈썹에 맺혔던 땀이 한꺼번에 눈꺼풀 위로 흘러내려 미지근하고 두꺼운 막이 되어


눈두덩을 덮었다. 내 눈은 눈물과 소금의 장막 뒤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


그 불타는 칼은 내 속눈썹을 물어뜯고 내 눈을 고통스럽게 파고들었다.


모든 것이 흔들린 것은 그때였다.


.......


내 존재 전체가 긴장했고 나는 손으로 권총을 꽉 움켜쥐었다.


방아쇠가 당겨졌고, 권총 손잡이의 매끈한 배가 만져졌다.


그리고 거기에서, 날카롭고 귀청이 터질 듯한 소음과 함께, 그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보였던 매정한 자식의 모습,


어머니 장례식이 있던 다음 날 수영하러 갔던 해변에서 옛날에 알던 여인 마리를 만나고


그녀와 잠자리를 했던 일들이 세상 사람들이 보이게는 부도덕한 편견으로 덧입혀지고


 이 살인이 뫼르소를 정당 방위한 것이 아니라 잔혹한 살인자로 몰아가는 법정에서


판사, 검사, 변호사와 기자들, 뫼르소의 재판을 지켜보는 법정의 객석에 있는 사람들 모두


그를 이방인으로 몰아가는 이 부조리한 상황에 읽는 저도 점점 힘이 빠지더라구요.


살인이 일어나고 1부가 끝, 2부 부터는 체포 되고 심문도 받으며 법정에서 재판하는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판사는 자신의 종교적 가치를 뫼르소에게 강요하면서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인상을 뫼르소에게 주기도 하는데요.


이는 법정 내에 있는 뫼르소를 위해 증언하러 온 친구들을 제외하고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모습으로 확장됩니다.


친구들이 뫼르소를 위해 강하게 변호를 하는데도 오히려 법정 관계자들이 가로막거나


더 말하려는 이들을 끌어서 증인석을 벗어나게 하는 등......


법정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 뫼르소가 살인을 저지르게 된 심리적 동기나


그의 인간성, 그의 행동을 미루어 그의 살인 행위에 대해 잔혹하게 몰아가요.


법원으로 뫼르소를 데리고 가는 호송차 내에 있는 경관들과의 대화에서도


짧지만 뫼르소라는 인물의 본 모습을 느낄 수 있던 부분도 흥미로웠습니다.


긴장되냐는 경관의 질문에 뫼르소는 아니라고,


어떤 점에서는 소송을 보게 되어 흥미롭고, 살면서 이런 기회가 한 번도 없었다 고 대답합니다.


저 상황에서 이런 대답을 한다는 것이 평범하진 않은 상황이긴 하죠....^^;;


뫼르소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던 거예요.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로 표현하고 딱 할 말만...


자신의 죽음을 모면하기 위해 이 세상의 유희, 게임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


뫼르소의 이 같은 대답은 한 개인에게 어쩌면 위협을 가하고 있는 법정을 향해 끄떡없는 모습이


반대로 법정의 재판을 주도하는 행위자들에게는 권위에 위협을 가하는 듯한 인상을 풍기는 대목이었어요.


"뫼르소" 라는 한 개인이 재판을 지켜보는 모든 이들에게는


굉장히 큰 사람처럼 다가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밖에도 내가 줄곧 숙고했던 두 가지 문제가 더 있었다.


새벽과 나 자신의 항소였다.


나는 하지만 따져보았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


나는 여전히 내 생각의 방향을 돌리려고 애썼다. 나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나는 이 소리가 그렇게 긴 시간 나와 함께 동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할 수 없었다.


나는 실제로 결코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럼에도 이 심장박동이 더 이상 계속되지 않을 어떤 순간을 머릿속에 그려 보려 했다.


하지만 무의미한 일이었다.


새벽 또는 내 항소는 거기 있었다.


나는 마침내 가장 이성적인 것은 나를 강제하지 않는 것이라고 내게 말했다."



어머니의 장례식, 살인, 재판과정 중에도 뫼르소는 보통의 사람들보다 평정을 잃지 않았지만


역시 뫼르소도 인간인지라 죽음에 직면해 있음을 느끼는 시간에는


여러 생각들로 내면이 흔들리고 있음을 느끼는 것 같았어요.



"그래, 난 그러면 죽는 거지. 다른 사람보다 더 일찍, 그것은 명백하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삶이 괴로워하며 살아갈 가치가 잇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본질적으로, 서른 살이나 예순 살이나 죽는다는 것에는 별 차이가 없었으므로.


......


지금이든 혹은 20년 후든, 죽을 것은 언제나 나였다.


......


우리가 죽는 이상, 어떻게건 언제이건,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그건 명백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 항소의 거부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사람들과의 대화나 뫼르소가 묘사하는 재판과정 속 인물들의 모습들도 지루함 없이 읽혀지지만

무엇보다도 결말로 다다를수록 죽음에 직면한 진실한 인간 뫼르소의 내면의 목소리는

이 소설에 더 몰입하게 만드는 부분이었습니다.

"내 미래의 깊은 곳으로부터, 내가 이끌어 온 이 부조리한 삶 내내,

모호한 바람이 아직 오지 않은 수년의 시간을 건너 내게 불어왔고,

그 바람은 자신의 행로 위에서, 내가 살아 있을 때보다 현실적이랄 게 없는 그 시간 동안

사람들이 내게 강요한 모든 것들을 평탄하게 만들었다.

......

우리가 선택한 삶, 우리가 고른 운명, 단지 하나의 운명은 내 스스로 고르는 것이기에,

......

다른 사람들 역시, 어느 날 사형선고를 받을 것이다.

그 역시, 사형선고를 받을 것이다.

만약, 그가 살인범으로 고발되고 그의 어머니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형을 당한다 한들 뭐가 문제란 말일까?

​......

그가 떠나고, 나는 냉정을 되찾았다."

부조리한 이 세상에 진실이라는 무기로 저항했던 뫼르소의 내면을 따라


소설의 막바지로 가는 과정에서 소설이 주는 재미와 깊은 인상을


<이방인> 을 통해 정말 오랜만에 찐~하게 느낀 것 같습니다.


<이방인> 의 미국판 서문을 깊이 읽기에서 언급하며 설명해 주는 내용들을 통해서도


알베르 카뮈가 소설 <이방인> 을 어떻게 생각하며 써내려갔는지 가늠해 볼 수 있었어요.


개인적이고, 외로워 보였던 뫼르소는 타자의 관점에서 보기에 이방인이기도 했으나


뫼르소 자신으로서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 하거나 거짓말 하는 것을 거부했던 것이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하려 하거나 항소하고자 하지도 않았어요.


가식없는 완고함으로 진실에 대한 열정을 보여준 인물로 지금까지 독자들에게 남아있는


인간 뫼르소와의 만남, 기대했던 것만큼이나 진한 여운이 있습니다.

 

부조리한 현실 속에 놓인 인간이 어떤 운명을 만들어 갈 것이며


인간의 근본적 탐구를 위해 노력하고 자아를 발견하고자 하는 실존주의 문학의 흐름에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 이 많이 거론되는데 왜 그런지 읽어보니 좀 알 것 같습니다.^^


인간이 극한 상황에 놓이게 될 때 어떻게 극복해 가는지

 

 

소설을 통해 보여주는 주인공의 내면 심리묘사가 재밌었고


독자의 입장에서도 어차피 모든 인간이 사형수라면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더욱더 진지하게 하게 만들었던 시간이었어요!!!


어려울 거라는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 을 원문만으로는

 

 

이만큼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을 겁니다.


지금의 이해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도 알아요.

 

 

더 읽어봐야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기에 제게 영향을 미쳤던 그것 만큼은 잊지 않으려구요. 


클래식 클라우드의 카뮈 책을 읽고 이해하는 데 분명 도움이 되었어요.


언젠가는 읽으려고 사두었던 카뮈의 에세이 <페스트> 도


기존의 삶의 가치에 대한 부정을 표현했던 <이방인> 과 반대로 긍정을 표현했다고 하니


때가 되면 읽게 되겠죠..... 이렇게 새움 출판사의 2020년 개정판 <이방인> 을 만난 것처럼요.


세상과 인간을 좀 더 넓게, 그리고 깊이 보는데 저를 변화시켜주는 좋은 소설들 중에서도


역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은 조용히 강했습니다~ ㅎㅎㅎ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