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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그네 (10주년 기념 리커버 특별판)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문학동네에서 세계문학전집 출간 10주년을 기념하는 리커버 특별판이 있는데
그 많은 소설들 중에서 선택된 10종중 <숨그네> 가 들어 있네요.
소설을 사랑하지만 세계문학을 특히나 애정하기 때문에
이렇게 예쁘게 나오기까지 했는데 일독을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 ㅋㅋ
루마니아 출신 헤르타 뮐러가 200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는 하지만
혼자 쓴 소설은 아닙니다.
헤르타 뮐러의 조국 루마니아는 1세기에 로마 제국에 정복 당한 후
13세기 경에는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으며,
19세기 후반까지 오스만 제국의 간접 지배를 받았던 나라더라구요.
유럽의 남동부에 있는 루마니아가 한국과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별로 없다보니 저도 이번에 살짝 조사를.^^
이 나라의 역사부터 알고 봐야 <숨그네> 의 탄생배경까지 연결이 되거든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흐름 속에서 루마니아는 독일, 이탈리아와 근접해진 여파로
1940년 안토네스쿠 장군에 의한 독재 체제, 파시즘 정권하에 들어섭니다.
1944년 독재자 안토네스쿠는 체포되어 처형당하고 소련에 항복한 루마니아는
나치에 의해 파괴된 소련의 재건을 위해 루마니아에 거주하는 독일인들을 넘겨줄것을 요구합니다.
17세부터 45세 사이의 독일계 루마니아인들, 남녀를 불문하고
소련의 강제수용소로 유형을 가게 되는데 이 속에는 헤르타 뮐러의 어머니,
그리고 <숨그네> 를 함께 쓰다시피 한 작가의 동료 시인 오스카 파스티오르가 있었어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때쯤 세계 곳곳에서 격동의 시간들을 보내게 되는데
독일에 사는 루마니아인들도 참전을 하지 않았지만 강제추방을 당했던 아픈 역사가 있었더라구요.
이 당시 강제수용소에 이송되는 사람들이 유대인들만 있던 건 아니었다는,
드러나는 것만 알고 있었던 제 지식의 부족함을 한번 더 느낍니다.^^;;
힘이 없는 국가의 국민들은 이렇게 인권을 유린당할 수밖에 없었네요, 어디에서나......
마음 아픈 현실, 과거의 역사가 있었지만 지금까지도 계속 되뇌이며
이렇게 문학과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 지켜야 하는 것들, 후대에게 물려줄 유산에 대해
깊은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이겠죠.
재미에 더해 그런 작은 사명감까지 더해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 를 읽었습니다.
1953년생 헤르타 뮐러는 어린 시절 과거 루마니아 독재정권 속에서
침묵하고 불안해하며 공포를 느껴야 했던 시골 마을의 분위기를 온 몸으로 느끼며 성장했어요.
두려움으로 인해 금기시 되었던 수용소 시절 강제추방을 당했던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 기록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알게 된 시인 오스카 파스티오르 로부터
실제 우크라이나 강제수용소로 레오처럼
17세의 나이에 5년간 강제 노역한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쓰게 됩니다.
시인이 하는 말을 받아 적으며 소설을 완성한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 는
그래서 상징과 은유가 담겨 있는 소설의 면면을 볼 수 있어요.
헤르타 뮐러에게는 <숨그네> 를 쓰게 된 것은 거의 "숙명"과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침묵하는 것마저 고통이 되었던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외쳐야만 조금이라도 그들의 아픔이 치유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헤르타 뮐러의 기록이
소설 <숨그네> 로 탈바꿈 되었을지도 모르겠어요.

레오가 사는 마을 사람들이 특별한 날이면 모이는 박람회장에
소련 강제수용소로 이송될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가축운반용 열차를 타고 어딘지로 모를 곳으로 떠납니다.
잠시 단체로 볼 일을 봐야 해서 기차가 멈추고 모두가 우루루 눈 위에서 수치스러움도 감당하며
열차가 자신만을 두고 떠나지 않기를 전전긍긍해야 했던,
생존 본능으로 며칠을 달려 강제수용소에 도착.
강제수용소의 생활은 정말 열악하고 참혹했습니다.
같은 수감자이지만 러시아인들의 말을 수용소 사람들에게 통역해 주며
자신은 우월한 존재임을 과시하는, 이런 부역자들이 꼭 있다니까요.ㅜㅜ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를 봐도 같은 수감자 입장이지만
그 안에서 나치당원들에게 붙어서 다른 수감자들을
괴롭혔던 사람들이 더 나쁘다고도 표현하고 있죠.
평화로운 삶을 박탈당했던 수용소 생활 속에서도 특권을 누리는 자들은
꼭 존재한다는 사실도 달갑지 않지만 접하게 됩니다.
<숨그네> 에서는 그런 인물이 투어 프리쿨리치 였고,
1950년 1월에 수용소를 나온 후에 오스트리아에서 당시 수감자에 의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도끼에 찍혀 죽었다는 그의 죽음은 한편 씁쓸하게 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게 하는 장면이었죠.
눈을 감고 운명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운명의 여신이 이번에는 응징을 해준거 같기도 하구요.
레오와 함께 수감하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강제수용소 생활이 그려지고 있는데, 전체 흐름을 큰 맥락에서 보여주기 보다는
강제수용소의 참상의 부분 부분을 돋보기로 확대해서 보여주듯 세밀하게,
레오의 심리도 내밀하게 묘사하고 있어요.
레오의 강제수용소 생활을 현실적으로, 때로는 꿈 속에서
레오의 목소리를 통해 헤르타 뮐러는 "박탈당한 인간의 삶의 풍경" 에 대해
소설 <숨그네> 에서 끊임없이 사유합니다.
평범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송두리째 빼앗겨 버린 수용소 사람들은
황폐한 환경, 배고픔, 소련의 강추위, 향수병과 싸우며 때로는 버티며 살아가야 했어요.
배고픈 천사가 발작하여 우리 주변을 맴돌고
타인의 배고픔을 나눌 수조차 없는 뼈와가죽의시간이 오고,
남녀의 구분이 없어지며 점점 성은 퇴화되어 간다고도 표현하고 있을 정도.
손가락 두개 만한 널빤지로 밑창만 나무로 만든 나무신으로 6개월은 버텨야 했고
고무덧신은 수용소 사람들에게는 사치였어요.
설탕과 소금은 이미 그곳에서는 귀중품이 되었고
양배추수프만 먹던 "뼈와가죽의시간"도 견뎌내야 했습니다.
인간을 인내의 한계로 몰고 가는 수용소 상황을 헤르타 뮐러는
"실존의 절대영도" 라는 키워드로 표현하고 있고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 몸부림쳐야 하는 수용소들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곳곳에서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현재 존재하는 세계로 생각을 옮기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것을 말하기도 하는듯!!
뼈와가죽의시간, 수용소의 삶을 살면서도 레오가 놓을 수 없는 것,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의 운명이었고 우연히 러시아인 마을로 나가 구걸을 하면서
석탄 판매를 하다가 방문하게 된 늙은 러시아 인에게 받은
손수건이 레오에게는 희망이 되어 자리하게 됩니다.
러시아 인이 레오에게 손수건을 준 것은 자신의 아들도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났고
레오를 마치 자신의 아들로 여기며 응원의 메시지를 준 것이 아닐까.....
두 명의 강제추방자가 된다는 것은 레오에게 버거운 일이긴 하지만
이를 계기로 레오는 귀향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해주는 손수건을 소중히 여기며
먹을 것과 충분히 바꿀 수 있음에도 손수건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포기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두려움은 시간이 흐를수록 커지다가 무심의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는데
이렇게 되면 정말 마지막 희망까지 포기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헤아릴 수조차 없는 수용소 상황도 마침내 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죽기도 했지만 그 안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1949년 마지막 겨울이 되어서는 러시아인 마을의 극장에서
수용소 사람들을 위한 영화와 주간뉴스도 볼 수 있게 되었고,
노동에 대가로 임금도 손에 쥘 수 있게 되었으며,
물물 교환 장터에서 물건도 살 수 있는.....
점점 정상적인 생활, 정상적인 영양상태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면서 다시 두번째 사춘기를 맞이하는 남자와 여자로 돌아와
수용소 사람들 사이에서 아이도 태어나게 되구요.
소설 제목 <숨그네> 처럼 헤르타 뮐러와 오스카 파스티오르가 만들어낸 언어들이
곳곳에 볼드체로 등장하는 것도 독특했어요.
파고다, 귀부인, 피아노, 배고픈 천사, 심장삽, 감자인간, 양철키스, 볼빵.....
시인의 이야기를 옮겨 적은 이 소설 속에는 이렇게 은유의 언어들이 있어서
술술 읽혀지지 않은 지점들도 있었지만 이 또한 노벨문학상 수상작의 면면이 아닐까요!!
"숨그네" 는 인간의 숨이 삶과 죽음 사이에서 그네처럼 흔들리는 것을 상징하는, 작가가 만든 말.
전체주의의 횡포로 인해 공포에 떨며 살아야했던 나약한 개개인들은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으려 자신만의 '손수건' 을 소중히 간직합니다.
손수건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믿었던 레오처럼
여러분에게도 손수건이 있냐고 노벨문학상 수상연설에서 말했던 헤르타 뮐러.
보이는 것은 레오를 중심으로 전쟁으로 인해
소중한 삶을 박탈당한 강제수용소 사람들의 참상이지만
보이지 않게는 자신의 삶을 지키는 것, 자유로움을 향한 저항과 투쟁이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글을 쓰고 비밀 경찰의 탄압과 감시를 피해
독일로 망명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자유를 찾아 떠난 헤르타 뮐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