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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은 유독 "살인"과 시집이 많다. 세간에는 모 로맨스 소설이 폭풍처럼 유행하는 모양이던데, 개인적으로는 장르 쪽 신간에 더 마음이 쏠린다.
[안 그러면 아비규환]
닉 혼비 외 지음, 엄일녀 옮김, 톨 펴냄.
이거야말로 이 달의 대박 신간. 제목부터 꽤 재미있는 기획이다. “위대한 작가들이 위대한 단편을 쓰던 전통을 복구하는 것”을 목표로, ‘오싹한 이야기’를 주제로 모은 단편집이라고 한다. 게다가 기존 작품의 선집이 아니라 새로 쓴 작품들이다. 20명의 20 작품으로 750페이지. 충실하다. 목록에 장르 작가들이 많이 보이는 건 그들이 그만큼 재미있는 글을 쓰기 때문이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참여한 작가 전부를 아는 건 아니지만, 닐 게이먼을 좋아하고, 마이클 크라이튼이 잘 팔리는 책을 써왔다는 걸 알고, 할란 앨리슨에 감탄한 적이 있기 때문에 꼭 읽어보려고 하고 있다. 스티븐 킹이나 마이클 무어콕도 있다. 어떻게 읽어도 손해는 안 보겠다.
덧붙여, 작품집을 전체적으로 주도한 사람은 수상 작가인 마이클 셰이본이다. 그는 이런 발상에서 작품을 시작했다고 한다. "1950년대의 어느 시기에, 이제부터는 간호사가 등장하는 로맨스물을 제외한 모든 종류의 소설을 문헌목록에 일체 수록하지 않고, 서점의 서가와 도서관에서도 금지된다면? 설령 '문학의 신'이라 할지라도 간호사 로맨스물이 아니라면 어떤 장르든 소설을 써서 돈을 받지도, 책을 출간하지도, 유명인사 대우를 받지도, 독자들에게 사랑받지도 못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로맨스 중에서도 하필이면 간호사 로맨스물이라는 점이 참 뜬금없는데, 과연 어떤 단편을 썼을지 궁금하다.
[파저란트]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지음, 김진혜 김태환 옮김, 문학과 지성사 펴냄.
내가 왜 독일 소설을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쩐지 독일이라고 하면 문학적으로 학문적으로 신뢰가 간다. 저녁 시간대 TV에서, 보통은 예능이 뒤덮을 시간에, 평행우주와 관련된 물리학적/철학적 토론 프로그램을 버젓이 방영하는 곳이기 때문이라든가. 독일에서 독일사를 전공한 사람들은(최소한 지금까지 만나본 중에는) 어쩐지 다 온화하고 학자풍의 사람이었다든가. 맥주와 아이스와인과 빵이 맛있는 곳이라든가. 헤르만 헤세와 괴테와 릴케 등등의 나라라든가. 근근이 접했던 독일 현대 소설도 매우 좋았다든가. 그런 저런 편협하고도 주관적인 이유들 때문에 이 책도 관심이 간다.
화자인 ‘나’는 여행 중 가는 곳마다 나치의 흔적을 발견한다. 그 흔적은 여행하며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도 살아있는 현재진행형 사상이다. 책의 제목 “파저랜드(Faserland)”는 작가가 만들어낸 말이지만 우리는 로버트 해리스의 소설 [파더랜드(Fatherland)]에서 그 어원을 유추할 수 있다. 파더랜드(조국)는 나치가 2차대전에서 패배하지 않았다고 가정하는 대체역사소설이다. “파더랜드”의 독일이 여전히 나치즘 국가라면, “파저란트”는 여전히 나치의 과거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포스트 나치즘 국가다.
“크라흐트는 나치즘을 역사의 우연이 만들어낸 지극히 특수하고 비정상적인 괴물이라기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어떤 본질적인 면에 대한 반영으로 본다. (...) 요컨대 『파저란트』에서 나치라고 욕을 먹는 것은 전체의 규율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 개인들이다.”
독재와 자유의 문제를 분석한 책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에리히 프롬은 2차대전 당시 사람들이 왜 자유를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나치즘을 따랐는지를 분석한다. 답은 자유가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개인에게 자유가 부과될수록 그는 ‘자유로운 선택’을 대신 결정해줄 영웅에게 저항하기 어렵다. 당시 나치즘이 독일 국민들에게 힘을 얻은 이유다. 만약 그렇다면, 개인에게 책임을 넘기는 자본주의 논리가 세상의 이치가 된 현재 나치즘을 들먹이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독일은 과거를 철저히 청산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최근 젊은 세대에는 네오 나치즘 사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들었다. 살기 힘들수록 개인보다 집단을 주장하는 민족주의/집단주의적 논리는 설득력 있게 들린다. [파저란트]의 문제는 지금의 문제다.
[판타스틱한 세상의 개 같은 나의 일]
맥스 애플 외 지음, 리차드 포드 엮음, 강주헌 하윤숙 옮김, 홍시 펴냄
이쪽의 테마는 “일”이다. 화이트 칼라, 블루 칼라, 노 칼라 시리즈라는 이름이 붙어있는데, 과연 화이트-블루-노를 망라하는 다양한 직업을 다루는 모양이다. 수리공이나 변호사의 삶은 예상할 수 있지만, 카우보이나 비밀군사기지 연구원의 일은 어떤 작품으로 나왔을지 궁금하다.
문학에서 직업을 다루는 것이 어떤 점에서 매력적인가? 엮은이는 여기에 암암리에 반복되었던 문학과 현실의 대립을 끌어들인다.
“영국의 소설가이던 V. S. 프리쳇은 "나는 산업체에서 일하며 살기를 바랐다. 전통적인 전문가의 숙련된 솜씨를 보고 듣고 싶은 충동은 지금도 견디기 힘들다"라고 말했다. 물론, 그 위대한 단편소설가였다면 내 어머니의 생각을 오래전에 은밀히 인정했을 것이다. 또 내 어머니의 생각에 나는 항상 실패한 사람이었고, 글쓰는 일은 진정으로 일하는 게 아니며, 우리가 각자 고유한 이야기를 지어내기는 하지만 글 쓰는 일은 기껏해야 우리 같은 작가들이 진실이라고 끝까지 우기는 허구에 불과하다고도 인정했을 것이다.”
그는 생산의 측면에서 보면 예술이란 쓰잘데기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인정한다. 얼기설기 구성된 단어들의 나열에 비해 “전통적인 전문가의 숙련된 솜씨”란 말 한 마디 없이도 얼마나 분명하고 강렬한지. 하지만 그렇기에 직업의 세계는 문학적으로도 강력한 힘을 가진다. “우리가 인간사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일의 진실한 모습도 우리 상상의 행위에서 가장 분명하게 찾아진다.”
이 시리즈에는 총 32명의 작가가 참여했고, 2권으로 나뉘어 나오는 듯하다. 잡다한 직업을 다루는 만큼 작가들의 배경도 다양하다. 생각해보면 이런 민족적/문화적 다양성이 미국의 강점이긴 하다.
[모자에서 튀어나온 죽음]
클레이튼 로슨 지음, 장경현 옮김, 피니스아프리카에 펴냄.
밀실 미스터리 소설. 마술사, 오컬트, 서커스가 나온다. ‘고전’ 시기에 나온 추리소설이라 관심이 간다. 추리소설에 한해서만은 20세기도 무조건 환영이다. 덧붙여 출판사 '피니스 아프리카에'는 [스틸 라이프] 등의 추리소설을 내고 있는데,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으면서 주목할 가치가 있는 책들이라 좋아하고 있다.
책의 내용은 이렇다. 안에서 문이 잠긴 방에서 마술사 하나가 살해당했다. 그를 방문했던 사람들, 즉 용의자 역시 모두 마술사다. 쇠사슬로 묶어놔도 감쪽같이 탈출하고, 손짓 하나로 물건을 여기서 저기로 옮길 수 있고, 공중 부양이나 인체 절단을 할 수 있다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물론 진짜 마법이 아닌 이상 이들의 능력은 속임수에 불과하지만, 트릭을 알기 전까지는 전부 마술이다. 따라서 마술사를 잡기 위해서는 마술사가 필요하다. 이 소설의 탐정은 개비건 경감과, 마술사이자 아마추어 탐정인 그레이트 멀리니 두 사람이다.
저자의 미스터리 경력은 일러스트레이터부터다. 그는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첫 미국판 표지를 디자인했고, 『트루 디텍티브 매거진』의 편집장을 지냈고, 7년 동안 『엘러리 퀸 미스터리 매거진』의 편집 주간으로 있었다. 그리고 미국추리작가협회의 창립 멤버이자 영국추리작가협회의 멤버였으며, 프로 마술사였다고 한다. 놀랄 일은 아니지만 예상하지는 못했다. 이 책은 마술사 탐정 그레이트 멀리니 시리즈의 1권이다.
나로서는 처음 듣는 이름이지만, 이 탐정도 꽤나 매력적이다. 본문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멀리니는 종종 자신을 드러내지 않다가 갑자기 입을 뗄 때가 있는데 그 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을 완벽하게 사로잡는다. 마술로 속임수를 쓸 때면 간단히 관객의 주의를 옆으로 돌리고 일순간에 현혹시켜 버리는 것이다. 늘 천연덕스럽고 아이러니하며 유머러스한 그의 언변은, 때때로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최면술이나 다름없는 설득력 있는 말투로 바뀌곤 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어떤 것이든 팔 수 있다. 그는 불가능을 파는 것이다.”
그는 분명히 솜씨 좋은 탐정일 것이다.
[메타트로폴리스]
존 스칼지 외 지음, 홍인수 옮김, 책세상 펴냄.
이거 나왔네! ‘미래 도시’를 주제로 한 SF 단편집. [노인의 전쟁]으로 수많은 팬을 만든 존 스칼지가 주도했다. 이 아저씨라면 분명히 재미있는 기획을 했을 것이다. SF쪽이 워낙 근간이 잘 소개되지 않다 보니 더 반갑다. 최근에 나온 작품이니까 절대 촌스럽진 않겠지 하고 막 믿음이 간다. 참여한 작가는 다섯 명. 국내에서는 낯선 이름이지만 다들 한창 이름을 알리고 있는 작가들이다. 개중 칼 슈뢰더는 [하드 SF 르네상스] 1권에서 <헤일로>로 소개된 적이 있다.
미래 도시라고 해도, 80년대에 상상하던 해저 도시 이런 걸 다룬 작품은 아닌 모양이다. 다섯 작가가 모여서 하나의 세계관을 만들고, 그 도시가 지닌 각 면모를 각기 다른 스타일로 썼다. 그렇게 만들어진 ‘한 권’은 개별적이면서도 유기적인 완성도를 갖는다. 팀으로 창작할 때의 꿈이지만 실현되긴 어려운 방법이기도 하다. 다들 글 깨나 쓰는 사람들이니 완성도에 있어서는 안심해도 되리라 보인다.
[사막에서 연어낚시]
폴 토데이 지음, 김소정 옮김, 마시멜로 펴냄.
“예멘에서의 연어낚시”가 주제다. 예멘이라고? 거기서 연어? 작가는 영국 사람이다. 정치판과 유머와 풍자가 주요 내용이고, 2007년 작인데 이미 냉큼 영화화되었다.
주인공은 영국 정부 산하 국립해양원에서 근무하는 어류학자 알프레드. 그는 어느 날 스코틀랜드의 연어를 예멘에 도입하는 프로젝트를 제안 받는다. 예멘 어느 부족의 족장님이 사막에서 연어를 보고 싶으시단다. 알프레드는 합리적인 사람인지라 말도 안 된다며 거절하지만, 높으신 분들이 얽힌 복잡미묘하고도 불가해한 이유로 프로젝트 담당자로 발령이 난다.
꽤나 어이없고 현실적인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데, 거기다가 진지한 면도 있는 모양이다. 예를 들면 연어, 족장님이 원하는 게 왜 하필 연어인가. 그는 고향인 강으로 돌아오는 연어의 여행이 신에게 가까이 가려는 자신의 여행을 상징한다고 믿었고, 자신의 부족민들에게 이런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은 마음에서 프로젝트를 의뢰했다고 한다. 중동과는 한참 떨어진 곳에서 합리적이고도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던 알프레드 입장에서는 생각할 게 많다.
중동 지방의 이야기를 다루되 유쾌하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영국 유머는 취향을 탄다는 게 문제지만, 이 책은 한번 보고 싶다.
[흰 개]
로맹 가리 지음, 백선희 옮김, 마음산책 펴냄.
[자기 앞의 생]과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의 저자인 로맹 가리의 소설. 주인공으로 로맹 가리 본인과 아내 진 세버그가 등장하는 자전적 소설이라고 한다. 모르긴 몰라도 이 소설 역시 “냉소적이고 신랄하고 사색적”일 게 분명하다. 읽는 내내 인간의 어리석음과 세상의 부조리가 쓸쓸하게 펼쳐질 테고, 다 읽고 나면 작가가 택한 자살에 감정적으로나마 동참하게 될 것이다. 책을 덮고 나서도 텍스트가 머릿속을 떠다니는 동안은 우울함과 회의에 젖어들게 될 것이다. 그는 집단이나 이념에서 광기를 발견하는 데 더 익숙하다. 그리고 그걸 쓴다. 이 사람의 소설이 사랑스러운 점이다.
소설의 배경은 1960년대 미국, 베트남전과 인종 차별이 한창일 때다. 로맹 가리는 러시아에서 태어난 프랑스 인이고, 이곳에서는 외부인이다. 아내 진 세버그는 백인이지만 흑인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이다. 그들이 혼란스러운 미국 사회 안에서 겪는 충돌은 다양한 대립으로 나타난다. 흑인과 백인, 개인과 집단, 남자와 여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한쪽이 틀렸다면 다른 한쪽은 옳을 것이다. 그러나 로맹 가리는 어느 쪽 편도 들지 못한 채 양쪽의 부조리를 본다. 어쩔 수 없다. “악한 진영에도 있듯이 이 ‘착한 진영’에도 상황을 이용하는 자들과 개자식들이 있다는 걸 내가 알기 때문이다.”
출판사 소개글을 더 끌어와보면, “이 작품은 인종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흑인을 두둔하지도, 백인을 정당화하지도 않는다. 로맹 가리의 눈에 집단의 이념에 사로잡힌 인간은 늘 광기에 빠질 우려가 있었다. 로맹 가리는 이 책의 전면에 나서 인종주의를 고발하는 동시에, 당시 흑인 인권 운동에 앞장선 과격파 흑인 단체의 위선과 말론 브란도 등 스타급 인사들의 '숟가락 얹기'를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흑인 단체에 놀아나는 아내 진 세버그의 혼란과 자기모순을 비판적으로 어루만진다.”
로맹 가리의 말에 끌리는 사람이 있으면, 반대로 손도 대고 싶지 않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굳이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생각을 떠맡을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 거 없이 살아도 우리네 삶은 충분히 바쁘니까. 하지만 비록 우울해질지라도,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쪽이 더 좋다.
[한국 추리소설 걸작선]
김내성 외 지음, 한국추리작가협회 엮음, 한즈미디어 펴냄
국내에서도 추리소설 역사는 상당히 길다. 그리고 모르는 사람도 많겠지만, 한국 추리작가 협회에서는 매년 추리 전문 잡지 [계간 미스터리]를 출판하고 있다. 계간 미스터리가 국내 유일한 장르 전문지라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어쨌건 추리소설 창작이 계속 이어져 온 건 사실이다. 이 책은 [한국 추리소설 걸작선]이라는 담백한 이름답게 1930년대 데뷔한 [마인]의 작가 김내성부터 시작해서 2012년 현대의 작품까지 수록되어 있다. 모두 44편이고 총 2권으로 나왔다.
추리소설은 읽지만 국내 추리소설은 잘 몰랐다면, 참고 삼아 읽어보길 권한다.
[조이 이야기]
존 스칼지 지음, 이원경 옮김, 샘터 펴냄
존 스칼지의 [노인의 전쟁] 시리즈 마지막 편. 앞 편이 인기가 좋다보니 시리즈가 전부 번역되는 모양이다. 이전 작품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따로 추천할 말이 필요 없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