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속의 고요라 해야 할지...
한두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그 기차에 대해서 외쳐야만 할까? 부질없는 짓이었다.
별 것도 아닌 일로(조국을 모욕했다는 점에서는 중요하겠지만)상대 한 두명의 메다꽂아봤댔자인것이다.
그는 평정을 가장한 얼굴로-어차피 사람들은 그의 얼굴을 잘 보지도 않겠지만.-두번 정도 플랫폼을 거닐었다.
그의 거니는 모습은 얼핏 모던 보이를 연상케했다.
"우정 선생!"
어느새 저 멀리에서 한 추종자가 달려오고 있었다. 약 500미터 거리였을텐데, 용하게도 우정의 옷차림을 알아본 것이다. 그제서야 한두는 왜 자신이 그의 옷을 아직 입고 있었는지 후회했다.
"반도로 가신다더니 여기는 웬일이신가요? 정말 우정 선생님이신건가...? 난 지금 꿈을 거닐고 있습니다! 아, 정말 기쁩니다. 책에 사인도 받을 수 있고..."
먼지투성이 옷차림이라는 건 신경도 쓰지 않고 그 추종자는 계속 떠들어댔다.
차라리 생각할 시간을 번 것이라고 생각하려는데, 그 추종자는 이내 다른 추종자들과 관련 업자들을 끌어모았다.
깜짝 사인회라도 만들 참인가...싶었는데 역시 그랬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데도 막상 한두는 어렵게 느껴지질 않았다.
그건 아마도 반도인도 섞여 있는 이 사인회가 막상 반도어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철두철미하게 제국어로 진행되고 있으니 흑백사진만으로 우정을 만났던 사람들이라면 알아챌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갑작스럽게 우정의 시와 작품 몇 개가 낭송되었다.
한두는 그제서야 제정신이 들었다. 이런 사인회를 특징 상 원작자의 작품 낭송도 들어가기 마련이었다.
'부디 나한테 낭송이나, 진행 감사에 대한 설을 풀어놓으라고 하면 안될텐데...'
한두는 책은 많이 읽지 않았지만, 대륙에서 유명한 시인들과 소설가들의 무리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어왔다.
어떻게든 자리를 모면하여 대륙횡단 열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한 제국인 기자가 끼어들었다.
"우정 선생! 취재 간다고 들었는데, 여기 계셨군요. 그래 그 미개한 공기는 맘에 드셨습니까? 아무래도 고향 공기이니까 마음껏 쉬셨겠지요?"
한두는 주먹이 근질거렸지만, 얌전히 있기로 했다. 진상을 밝히기 좋은 상황인 것이다. 맘에 안든다고 큰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그럼요...맘에 무척 들었지요..."
천천히 한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아까까지는 기운이 없었습니다만, 여러분들의 호응을 받으니 기운이 조금 돌아오는 군요. 그래요 대륙의 벌판의 그 분위기와 눈보라가 얼마나 상쾌하였는지 , 고향으로 가는 길이 얼마나 가깝게 느껴지던지...
물론 바다와만 가까운 섬에서 이런 정취는 느끼지 못하셨겠지만..."
한두는 조금씩 튀어나오는 사투리를 되도록 표준어로 쓰려고 노력하면서 말했다. 잠시 그 제국 기자가 얼굴이 울그락푸르락 거리는 것이 보였지만, 그건 되도록 무시하기로 했다.
"대륙은 반도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 광대한 자유 앞에서 나는 우리 본토의 이육사 시인의 시를 읊조릴 수 밖에 없었던 것 입니다. 이제야 생각하건대 제국은 철로 된 무지개인가보다..."
제국인들이니 식민지의 시인이 뭐라고 하는지야 제대로 몰랐을 것이고, 한두는 흥분 상태에서 말하다보니 실수했다. 하지만 기자는 실수하지 않았다. 모르지도 않았다. 얼굴이 씨벌겋게 달아오를대로 달아오른 그가 주전자 쉭쉭거리듯이 거칠게 말했다.
"선생. 그 시는 틀려먹었소. 그 시는..."
그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두는 그만 도취해 말하기 시작했다.
"이런 열악한 장소에서 날 알아보고 자리를 마련해주는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다음 작품을 미리 말씀해올리겠소. 괜찮으시다면, 내 이야기를 들어주시겠습니까? 이 이야기는...대륙을 출발하여 반도로 향하는 어느 기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