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 연 책표지에는 분홍빛이 채 가시지 않은 벚꽃잎이 붙어 있었다. 홍설은 자신도 모르게 표지의 꽃잎을 연분홍 손가락으로 스르르 스쳤다.
책장을 넘기자 아름다운 필체로 적힌 제국어 시와 반도의 시가 여기저기 필사되어 있었다.
노천명의 시도 있었고, 그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이육사의 시도 있었다.
그가 그토록 호언장담하는 그의 인생이 이 시들이었단 말인가...? 잠시 그녀는 의심했다.
하지만 첫표지의 벚꽃이 계속 생각나는 것이었다. 이 시들이 벚꽃이라고?
글자체도 우아하다기보다는 끝물이 다 되어가는 노숙한 꽃잎 같았다. 떨어질 때를 알았던 꽃잎들.
잠시 넘기면서 하선생이 있는 쪽을 살짝 넘겨다보았지만 하선생은 한두와 대화 중인지 심각한 얼굴로 둘이서 뭔가를 종이에 적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매끄러운 가죽 장정에 잉크가 뚜렷하게 선을 그은 종이.
만약 자신이 무사히 결혼을 하고 나중에 정착하게 된다면 이런 종이를 쓴 가계부를 쓰고 싶었다.
그녀가 그렇게 안도하면서 시가 적힌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마지막 페이지에는 몸의 왼쪽에는 한복을 걸치고 다른 반쪽에는 기모노를 입은 여인의 초상화가 나왔다. 그리고 어울리지 않게...김소월의 '초혼'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이 꼼꼼한 사내는 그녀가 실재했던 인물임을 보여주려고 했던 듯. 기모노 천 조금과 한복 천 조금을 붙여놓았다.
'누구일까?'
그리고 마치 미친듯한 사랑의 고백인 듯, 그 그림밑에 날려쓴 글씨가 있었다.
어느 쯔음엔가 그녀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으로 광포해진 듯, 사내의 손톱자국이 그 종이에 깊게 남아 있었다.
막 찢어내려고 한 순간에 억제했던 것일까...
이와시게 바카야로! 바카야로! 바카야로!!
일어로 미친 듯이 적힌 그 밑에 마치 커피를 엎지른 것 같은 자국이 있고...
그 밑에 미친듯했던 그 문장보다 침착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이와시게 타츠히로(몰)
드디어 누이의 뒤를 따르다.
나는 그가 부럽다.
초혼을 할 수 있다면...
아니, 나도 저승으로 갈 수 있다면!
내가 그렇게 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했건만! 바카야로 타츠히로!
내 손에 피를 묻히게 하다니...
그리고 그 뒷장을 넘기는 순간, 그녀는 알았다. 이것이 그의 진짜 고백이란 것을. 첫페이지부터 읽지 않았다면 별 거 아닌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그의 책과 편지를 받고 읽었을 때 그 진면모를 알 수 있을까? 아마도 모를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모르는 것이 나았으리라.
그녀는 두번째 장에 붙여져 있는 하선생의 사진을 보았다.
좀 더 젊었을 때의 사진으로, 지나치게 핸섬한 것이 부담스럽기는 했으나 절반쯤은 슈트의 힘이었다.
그는 지금은 좀 더 몸이 붙어 인상이 좋아졌지만 그 사진에는 턱이 지나치게 각이 져 있었던 것이다.
흑백이라 그 단점이 더 두드러져 보였다.
마치 명화의 한 장면을 흉내 내듯, 그는 후지산 위 구름 자욱한 가운데 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당시 그의 연인인 듯한 게이샤 하나가 우산을 받쳐 들고 서 있었다.
그녀는 그림의 연인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와 주고받은 엽서를 노트에 붙여놓았다.
미츠코라는 그 게이샤는 미모에 비해 속이 허한 사람이었는지 그저 짤막짤막한 날씨 이야기나 해놓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의 애정을 다소 부담스럽게 생각한 듯, 단나가 되는 것은 포기해달라고 적기도 했다.
하지만 하선생은 거의 전재산을 털다시피 하며 미츠코의 단나가 되었다.
미츠코의 마지막 편지에는 그를 원망하는 어조로 날 도망치게 만든 것은 당신이니, 날 원망하지 말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그녀의 편지는 없었다.
그리고 붙어 있는 대륙일보의 사진에는 애인과 동반자살한 미츠코의 최후가 찍혀 있었을 뿐이었다.
하선생은 매우 냉소적으로 그녀의 사진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난 도망가는 미츠코를 죽이고 싶었다. 그래서 죽였다. 이와시게 마사코에는 미치지도 못한 열화판이었으니...
증거가 없으니 아무도 모를 것이다. 더더군다나 함께 죽은 사람이 자신의 애인으로 알려져 있는 바에야.
완전범죄다."
그리고 밑에는 그녀를 죽게 한 약물의 이름이 죽 나열되어 있었다. 그는 확신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