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두는 꿈을 꾸고 있었다. 무슨 꿈? 헝클어지고 색바랜 그 꿈에서 그는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들어오면 문을 닫아야지. 그는 한번도 본 적 없는 싸릿대의 문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어디선가 곡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갑자기 하늘에 제국의 깃발이 휘날렸다. 아이고. 아이고. 가미사마 반자이! 반자이! 반자이! 아이고! 반자이! 아이고! 아이고! 반자이! 반자이!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반자이...반자이...
소리는 점점 줄어들었고...
소년 김한두는 그제서야 하얀 옷을 입은 행렬이 싸리문으로 들어오려고 한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 아버지가 돌아가셨구나...우리의 장군이."
그리고 그는 눈을 떴다. 옆에는 하우정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입가에 진 주름이 삐뚤어져 있는 걸 보며 알 수 있었다.
"뭔꿈을 그렇게 요란하게 꿉니까?"
"아..."
저녁에 비아냥 거렸던 것이 아직 상처로 남은 듯 했다. 한두는 고개를 젓고 제국어로 말했다.
"미안합니다. 시끄럽게 굴었네요."
"...뭐, 어쨌든 좋소. 잠시 역에 정차했으니 역사에서 저녁이나 듭시다."
횡단 열차에 탄 사람은 약 100명. 걔중에는 중간에 내리거나 타는 사람도 있었고, 대륙의 끝에서부터 끝까지 가는 사람도 있었다. 아마 김한두의 생각으로는 하우정도 그 중 하나일 듯 싶었다. 하우정이 노리는 아가씨는 끝에서부터는 아니었지만 결국 반도까지 갈 것이다.
"저분하고 안 드십니까?"
한두의 말에 하우정은 더 짜증이 난 얼굴이었다.
"난 변태가 아니니까."
그 저분이, 성모송을 읊조리던 대륙어가 유창한 여성이라는 건 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더더군다나 나는 홍기언 백작과는 막역지간이오. 딸은 이번에 처음 보지만. 잘못 건드렸다간 근친상간이라는 소리나 듣기 딱 좋지."
하긴, 그럴 거라고 자신도 모르게 한두가 중얼거렸다. 본인이 들으면 그렇겠지만 제국에 충성하는 하우정과 홍기언이 만난 적이 없다면 그것이 이상하리라.
한번쯤 반도에서 열리는 파티에서 만났으리라.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니 조금 우습군요."
하우정에게 한두가 조금 공격적으로 말했다.
"소문으로는 당신이 누님과 근친상간 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요?"
"...흠."
하우정은 의외로 격분하지 않았다.
"그건 내 천재성에 대한 찬사요."
"에?"
"제국대학 재학시절, 교수가 바이런에 대해서 강의해주었지."
"...바이런?"
"바이런은 모르는군."
하여간, 바이런은 단 한 작품으로 단번에 뜬 작가로, 그의 미모와 활력은 모든 여인들의 사랑의 대상이었다고. 하지만 그가 사랑한 여인은 오직 단 하나. 그의 누이, 오거스타.
"하지만 난 누이가 없소."
하우정이 잘라 말했다.
"교수가 내게 바이런 같은 작가가 될거라 한 말이 와전된거요."
"그리고 거기에는."
어느새 뒤에 와 있었는지 홍설이 냉랭하게 말했다.
"그 정도로 당신이 모든 여인들에게 마음을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지요. 학교에서 교수 자리를 못 얻은 건 그 교수의 연적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죠."
"홍양."
하우정이 조용하게 대꾸했다.
"여자분들이 가시는 료칸에 가신 줄 알았습니다만?"
"...료칸은 너무 멀고, 책상이 있는 데가 이 식당 밖에 없으니까요."
"그건 아니겠지요?"
하우정이 냉랭하게 웃었다. 마음은 홍설이 자신을 싫어하지 않았으면 했지만 겉은 그렇지가 못했다. 그는 점점 초조해지고 있었다.
"반도가 낳은 사나이 중의 사나이, 당신의 약혼자 백명이 쓴 편지가 올지도 모르니까 역사에서 기다리는 거 아닙니까? 계모는 벌써 다른 사나이를 정혼자로 생각중일텐데 말입니다."
"하선생님!"
비밀이 노출되자 귀까지 새빨개진 홍설이 외쳤다.
"순수한 마음을 버리시오. 홍설. 이 반도에 사랑으로 다 되는 것이 없단 말입니다."
끝까지 미운 소리를 하면서 하우정은 김한두의 소매를 끌고 역사의 우동집으로 들어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