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크림은 적어도 베이킹 분야와 비교하면 쉬운 편에 해당한다. 얼음이 살짝 어는 정도라던가, 달걀, 우유등의 재료의 양 조절 등이 약간 문제점이 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쉽다.
아니 심지어 기계라도 구입한다면 머리는 돌아가고 손은 쉬는 셈이다.
그걸 아니까 저 노인도 이때까지 꾸준하게 아이스크림을 만들었던 거겠지만.
나는 화이트 초콜릿 아몬드 아이스크림 한 입을 넘기면서 노인이 판매대에서 조용히 계산하는 것을 보았다.
저 노인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있는 거지?

"더 갖다드릴까요?"

학교에 아이스크림을 공짜로 제공하는 일이나, 경찰들에게 50% 할인가로 판매하는 건 그의 재산을 고려하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은 다들 별 거 아닌 일로 생각하지만 옛날에 저 길노인은 목공업을 해서 큰 재산을 모았다. 아들 일만 아니었다면 목공일을 거쳐 마련한 건축업을 그리 쉽게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오. 되었습니다. 선생님. 잘 먹고 갑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참 많았다.
내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이 이 가게의 간판을 자진해서 만들고, 메뉴를 많이 만들어 달라고 요구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겁없이 그에게 덤벼들어서 점점 더 앞으로 나가게 만들었다.

"잠깐만요."

노인이 날 불러세웠다.

"아까전에 한 손님이 이걸 선생님에게 전해 달라고..."

"네. 감사합니다."

기계적으로 대답한다. 이것은 ...그러니까...

<아직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손수건에 쌓인 책갈피 하나. 그는 늘 그런 식으로 내 뒤를 쫓아다닌다.
길노인이 자기 자신의 저열한 호기심을 만족시킬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기에, 이번에도 한숨을 쉴 뿐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이 물건이 자신의 손에 들어올 일도 없었을테니.

길노인은 이상한 사람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예전에, 아주 예전에 그의 아들이 이곳에 가게를 얻었다. 길지 않았다. 그녀가 부임해 오기 전, 그 책갈피의 주인이 이곳에 있었을 때...
그때 길노인의 아들은 아이스크림을 팔았다.

무엇때문에 그는 아이스크림만 팔았던 것일까.
분식집과 겸했더라면 돈을 더 벌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이유를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요.]

밝게 웃던 책갈피의 그.
부임받기 전 얼마동안 사귀다가 그의 순수한 얼굴에 속고 말았다. 용서할 수 없었다. 그대로 헤어졌고, 그는 부임지를 떠나고 얼마 뒤에 교사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이어진 피투성이 소식들. 그는 얼마 후 교도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건 그맘때쯤 아들이 행방불명된 후 이 가게를 사들인 길노인이 이곳으로 온 것과 거의 비슷했다.

[나는 노 선생님만 보면 웃음이 나요.]

그가 그렇게 말했다.

[왜요?]

[세상 시름을 다 잊고 사는 것 같아서, 아직 어려서 그렇겠지만, 난 그래서 노 선생님이 부러워요. 사진 한번 같이 찍지 않을래요?]

그런 식으로 넘어간 여자들이 많다는 걸 안 건 훨씬 뒤의 일이었다. 그리고 몇 여자들로부터는 그가 스토커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헤어지자고 하는데도 억지로 따라다녔다고...
하지만 내가 헤어지자고 한 후 그는 조금 섭섭해하긴 했지만 이내 떨어져나갔다.
그제서야 알았다. 그가 다른 여자에게 쏟았던 만큼의 애정이 없었다는 걸.

잠시 안도했지만 내내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어째서 난 그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걸까. 그리고 그는 어떻게 나온 거지? 소름이 어깨에 오소소 돋았다. 어째서 나온 거지? 어떻게 나온 거야? 내겐 어떻게 연락을...
나는 허겁지겁 손수건을 풀어헤쳤다. 그리고 나온 책갈피...

[내가 지은 죄가 많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노선생. 당신에게도 폐를 많이 끼쳤지요. 난 너무 내 감정만 생각한 것 같습니다. 노 선생. 지금이라도 날 용서하고 다시 시작해줄 순 없나요? 출소일은 아직 멀었습니다만, 곧 출소하게 될 것 같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배신감이 들었다. 
배신감. 그 많은 여자들에게 했던 말들.

만약 용서해준다면...

그가 한 말들.

노 선생. 예뻐요.
노 선생. 잠시 업어줘도 될까요.
노 선생. 낙엽 이쁘죠?

노 선생.


노 선생.


노 선생.

노 선생님!

목소리에 그만 깨버렸다.

"선생님."

문예부 부장이 날 내려다봤다. 아, 방과후 교실에서 그만 졸고 말았구나.

"응?"

"오늘 숙제 내주시기로 했잖아요. 그리고 아이스크림 사주신다면서 혼자서 드시고 오셨죠!"

"그건 너희들이 숙제를 다 해왔을 때 이야기고! 오늘은 너 하나밖에 안 가지고 왔잖아!"

문예부는 느슨한 조직이다. 열심을 가지고 있는 건 부장 한 사람뿐이고, 나머지는 그저 건성건성.
그나마 부장이라는 녀석도 뭔가 노리고 있는 것 같다. 주로 아이스크림에 꽂힌 모양이지만.

"읽어주세요."

읽기도 힘든 갱지에 빽빽하게도 쓰여 있다. 아니, 이녀석은 원고지에 작성해오라니까 그 말도 안 듣고!

"읽기 힘드니까 네가 읽어줄래?"

"오늘 선생님 많이 힘드신 것 같은데...그냥 숙제만 내주세요. 읽는 건 나중에..."

"읽어!"

내가 종주먹을 들어올리자, 그제서야 녀석이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첫마디가.

"내가 사랑하는 선생님께."

푸웁! 그만 공기를 내뱉으며 나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부장을 봤다.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아이...그러니까 선생님이 읽으시라니까..."

그걸 끝까지 다 읽은 부장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알았다. 아이스크림 사주마. 가서 이야기하자?"

"숙제는요?"

"스토커로 해와."

녀석의 얼굴이 암울해졌다.

-----------------------------------------------------------------------------------------------------그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나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다. 나는 선생님이고, 너는 아직 어리다.그리고 사랑이란 건 그런 게 아니다. 등등...

"근데 왜 숙제가 스토커에요?"

"음...그건."

책갈피에 적힌 날짜를 읽는다.

"8월 3일이 되면 알게 돼."

"왜요?"

그걸 왜 말로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아직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지도...

<내가 너무 사랑하는 노 선생! 만약 8월 3일에 내가 출소하게 되면 나는 예전에 내가 부임했던 그 학교로 돌아갈 겁니다. 그 학교에 옛날 우리 둘이 갔었던 아이스크림 가게가 다시 문을 열었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잘 먹던 아이스크림을, 그 사장님께 부탁해서 노란 아이스크림, 내가 잘 먹던 ,딱 1인분만 만들어달라고 해주세요...아마 그 날 수업중일테고, 당신은 날 보진 못할 겁니다. 하지만 만약 그 메뉴가 올라와 있다면,나는 당신이 날 용서하고 다...>
그 이야기를 들은 부장이 화를 냈다.

"그건 자기 멋대로 잖아요."

"그래도."

"선생님, 그 아저씨보다는 내가 더 나아요! 잘 할게요!"

"뭘 잘해!"

그제서야 나는 기분이 탁 풀려서 부장의 머리에 알밤을 먹였다.
 
"근데 너무 고리타분하다. 노란 손수건 같네."

"1인분이니까 만들기도 귀찮을 거야."

나는 떠올렸다. 그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
그는 베스킨라빈스 31도 꽤 좋아했었다. 하지만 그 인공적인 색감은 그가 원하는 건 아닐테고...
도대체 그가 말하는 메뉴라는 게 뭘까?

나는 나도 모르게 길노인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내 말에 그가 날 쳐다보았다.

"그 손수건 남자가 잘 먹던  노란 아이스크림 생각나시나요?"

"...음, 전 그때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손수건 남자라면 그 노란 손수건의?"

그러고보니 이때까지 전달받은 손수건은 다 노란색이었다.
이렇게 되면 용서해주고 싶어도 메뉴를 알 수 가 없다. 하긴, 어차피 우린...헤어진 사이니까.

------------------------------------------------------------------------------------------------------다 잊어버렸다는 내 말에 부장이 화를 냈다.

"왜 잊어버렸어요!"

"그걸 알면 내가 왜 여기에..."

"차라리 잘 됐어요. 선생님. 차라리 나랑 사귀어요!"

"에라이. 이녀석아!"

길노인은 참견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하게 그날 그날 분의 아이스크림을 내갈 뿐.


"그럼 있잖아요. 선생님."

"응?"

"아주 신 아이스크림을 내놓는 거에요...시고 달고...노랗고. 손수건처럼."

"......"

"너하고는 상관없잖아."

나는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선생님, 거절도 명확하게 해야 한다고요. 그냥 어영부영 넘어갈 생각이에요? 그래도 옛날 애인이라면서요."
"......"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할말이 없었다. 중학생인 애가 저렇게 똑부러지게 말하는 데 나이도 먹은 넌 도대체 뭐하는 거니. 노영희!

"...맞아. 그러고보니 그 사람, 신 걸 좋아했었어..."

레몬에이드,자몽주스, 오렌지 주스(는 하지만 색소들어간다고 그렇게 썩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를 좋아했다. 그 사람은...

"노란색...흐음.  할아버지는 모르시겠다고 하고..지금 메뉴에는 노란 메뉴가 없는데요? 그래도 오렌지하고, 레몬은 될 것같은데..."

"레몬은."

그때 길노인이 참견했다.

"레몬아이스크림을 만들면 색깔이 노랗지 않습니다. 아주 하얗죠."

"오렌지 아이스크림은요?"

"그건 주황색이고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16-02-08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아스크림 가게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소설이군요. 다음이 기대됩니다 ^^

태인 2016-02-08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