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하다가 무심해져버리는 우리들.
뒤늦게 옛날에 읽다 만 박민규의 ‘카스테라’를 읽었다. 예전에는 여기저기로 튀어오르는 박민규의 문장이 즐거웠다면, 이번에는 그 행간행간에 숨겨진 절망이 읽혀졌다.
비터스윗...
옛날에 초콜릿에 정통한 한 여인이 했다는 말이다. 박민규의 글은 스윗비터...한 게 아닌가 싶은데.
초기 단편작 카스테라 이후로 더블, (제목이 기억이 잘 안나지만)황녀를 위한 파반 등을 썼다는데 난 사실 카스테라도 아직 다 완독을 못해서...
서재턴데이니만큼 완독을 하고나서 쓰면 좋겠지만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를 보니 안 쓸 수가 없었다.
잘 놀던 학생이 어느 날 아버지가 자신을 키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하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그걸 [산수]라고 부르는 그는 자신 나름의 [산수]를 위해서 아르바이트는 물론 몸 사리지 않고 열심히 한다. 그래도 그의 [산수]는 시간당 천원에서 삼천원을 넘지 못한다. 푸쉬맨이라는 좋은 아르바이트를 구한 후로 그는 아버지의 [산수]를 단순히 [산수]가 아니라 [생활의 절망]으로 받아들인다.
아버지는 [산수]를 하기 위해서 지하철에서 아들을 만나고 그때마다 둘은 서로의 [산수]에 대해서 절망감을 느낀다. 결국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 폭을 좁히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말을 걸지만 아들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아버지를 푸쉬해버린다.
그리고 아버지의 실종. 어머니의 병마.
삶은 주인공에게 [산수]만을 강요할 뿐이다. 어머니의 병이 낫고 난 다음, 아들은 아버지인 것으로 추정되는 [기린]에게 말을 걸지만.
기린은 아버지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기린이 아버지였다면 이 소설의 결말은 처절한 비극이었을 것이다. 아들과 아버지의 그 희망없었던 잿빛 눈동자가 무심하게 스쳐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든 아니든 개인의 [산수]하는 시간에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는 시선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기린의 대답은 박민규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난 표제작 카스테라도 좋아했지만, 사실 가슴이 저리고 공감이 되는 건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였다. 여기에는 허무맹랑한 캐릭터들이 나와서 허무맹랑하게 끝내는 그런 작품들은 이 작품선에 하나도 없다.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 밖에서 해결될 수 있는 해답을 줄 뿐이다.
비터스윗, 혹은 스윗 비터. 우리의 삶은 결국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