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언제나 나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그를 생각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오. 황비?”
황제는 두꺼운 안경을 쓰고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아마 고문을 읽고 있었던 모양이다.
두툼한 소가죽이 죽간을 묶고 있는 옛 고서...
“최근 있었던 왕국의 숭문관 탈주 사건 때문에...”
왕국에서 숭문관에 근무하던 죄수가 탈옥했다. 왕국의 왕비의 말에 의하면 숭문관은 본래 금강석으로 만든 가는 줄을 여러개 쳐놓기 때문에 안에서 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나 안에서 안으로 이동하는 것은 가능하고-그것 또한 특별한 기술이 있어야 하지만.-특히 무공에 익숙한 자라면 가능하다고 했다.(그러나 이 경우에도 외부로 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 그거라면 들어 알고 있소,”
“폐하. 패관들이 벌이는 행태가...”
“당신은 그 패관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있는거요.”
황제는 말을 뚝 끊어버리고 다시 책에 집중했다.
“폐하. 하지만 패관들의 행동이 너무 자유로워서, 그 권한을 남용하는 일이 잦습니다.”
“...황비.”
황제는 그제서야 책을 덮고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저번에 두던 오목을 마저 두려오?”
“......”
황제가 이렇게 나올때는 천천히 생각해보자는 뜻이 담겨 있다. 나는 옷을 단정히 하고 그의 맞은 편에 앉아 백알과 흑알, 바둑판을 꺼냈다. 황제와 나는 바둑을 뜰 줄 몰랐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궁에서 살면서 너무 바빠 바둑을 배울 틈이 없었고, 황제는 잡기에 신경쓸 시간이 없다고 바둑 기사들을 궁에서 몰아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둘은 직위에 맞지 않게 오목밖에는 둘 줄 몰랐다.
“당신이...”
흰알을 골라서 천원지점에 둔 황제가 말했다.
“왜 패관들을 그리 싫어하는지 모르겠소. 탈옥사건이 있기 전에도 내게 패관들의 수를 줄이자고 한 적 있지 않았소.”
“폐하. 패설사관이 이번에 무장 하나를 데리고 나갔다가 거의 시체가 된 걸 데리고 오지 않았습니까?”
“무장의 말들을 들어보면 그자는 원래 그랬다고 하오. 그런 자를 데리고 나가서 반란을 제압하는데 성공까지 했으니 그만하면 되지 않았소. 나는 그자에게 유배형과 근신형을 내렸으니 그만하면 되었소.”
“......”
나는 오목이 되도록 쉽게 끝이 나지 않기를 기대하면서 천천히 두었다. 어차피 시간 제한도 없으니 느리게 둘수록 황제의 시간은 내 것이 된다.
“패관을 둔 것은 애초에 백성들의 말을 제대로 듣기 위함이요. 반란을 위한 패설이나, 참요같은 것도 무조건 억압하기 보다는 들어볼 필요가 있는 것이지. 패관들은 바로 그러한 것들을 수집하기 위해 있는 것인데 그대는 지나치게 싫어하는 것 같소.”
황제는 모른다. 그 패설 하나하나에는 피가 맺혀 있다는 것을.
내가 황비가 된다는 예언 하나 때문에 일가가 다 몰살당한 적이 있다는 것을 황제는 모르고 있었다. 그 참요가 퍼졌던 걸 들었던 패관 하나가 입을 잘못 놀려 권세가의 가문에서 우리 집안을 다 몰살시켰던 것을. 후에 듣기로 그 뒤에 있던 것이 그 당시 황제가 되기 전의 황자였다는 말을 들었다.
아아, 황제는 몰라도 좋았다. 내가 당신에게 품는 감정이 무엇인지.
“폐하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그 당시 패관이 채미홍. 미축의 스승이 된다고 하던가...
처음에는 미축을 사랑하였다. 정원에서 검을 놀리던 모습, 그저 꿈의 공간처럼 여겨졌던 무림에서 왔던 그를. 하지만 그의 눈안에 있는 것은 자무홍꽃 아래 잠든 자신의 연인일뿐.
채미홍과 그의 관계를 알게 된 후로 그를 증오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 아들과 나를 감싸던 그 모습을 보고 더욱 증오하게 되었다.
“그대가 황비가 된 것은 그 참요덕이 아니오?”
건드리지 말아야 할 선을 순간 황제가 넘었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참요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대를 황비로 삼지 않았을 것이오. 수많은 비빈들이 있는데 어째서 그대를 선택했는지 생각해 보기 바라오.”
나는 황제를 사랑할 수도 있었다. 황제도 나를 사랑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 둘의 사이에는 강이 하나 있었다. 결코 건널 수 없는 원한이라는 강이.
그는 모른다. 내가 그를 죽이고 무엇을 건설하려 하는지.
나도 모른다. 그가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나를 어째서 황비에 까지 올렸는지.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것이다.
“폐하 제가 이겼습니다.”
언젠가 나는 황제를 앞에 두고 말하리라. 내가 당신에게 복수를 했다고. 나의 대리자 제 6황자로 당신에게 복수했다고.
그리고 나는 그의 씨들을 다 죽여버린 후 황제가 되리라.
참요에 있던 그대로, 황비가 황제가 되었네. 그 참요대로.
그러기에 그 전에 미리 그 수를 읽을 패관들을 모조리 몰살하리라.
오목에서 이겼듯이,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