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지 않겠다고 말했다.
더 이상 고민하지도 않겠다고 말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누군가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니까.
하지만 도움 받을 수 있다면 받겠다고 나는 말했다.
어느 누구도 내게 고개 젓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어떤 사람은 긍정은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받아들인다는 얼굴로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나이 서른에 최초로 얻은 긍정이었다.
부모를 떠나서 처음으로 얻는 자유였다,
꿈은 항상 꿈꾼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억지로 찾으려 한다고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나는 서른 살에 배웠다,
아는 동생을 며칠 전에 만났다.
내 나이를 다시 살아가는 그 아이는 무언가를 애타게 찾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답을 내린 그 시기에 그 아이는 도로 시작하고 있었다. 어느 누가 맞는 답을 내린 건지는 모른다.
너무 일찍 답을 내었던가. 나는 나도 모르게 읊조리곤 한다.
어느 한 곳의 부품으로 부지런히 돌아가는 나에게 그 아이는 묻는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편안한 얼굴로 체념할 수 있느냐고.
내가 가진 무엇이 다른 사람에게는 실패나, 체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서른 다섯에 새로 배웠다.
나이 사십이 되면 또 무엇인가를 배울 것인가.
나는 나에게 묻는다.
나는 그 아이에게 답을 해주고 싶지만,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열병에 정의를 내리고 약을 처방해 줄 수 없다.
그 상처가 곪고 진물과 고름이 흘러내려도 어느 누구도 답을 해줄 수 없다. 설마 직장이 없다고 해서 하늘에서, 아니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해서 실업율을 떨어뜨리겠다고 정부에서 직업을 안겨줘도.
어느 누구도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누구는 내게 걸맞지 않는 직장이라고 할테고, 어느 누군가는 과분한 자리라고 할 것이다.
아니, 혈투를 벌여가면서 자기 것으로 만든다고 해도 스스로에게 긍정하기란 참 힘든 일일 것이다.
답을 내려주는 것은 나이니까.
내가 서른에 답을 내렸고, 사십에 그걸 뒤집어 다시 답을 만들어내고. 오십에 또 새로운 답을 내리고 그리고 서서히 시들어갈 때라도. 만들어가는 답은 내게 소중하다.
적어도 그 답에 만족하고 살아가는 한 나는 인생을 증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