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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샤베르 대령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0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선영아 옮김 / 민음사 / 2023년 3월
평점 :
사라진
랑티백작가문에서는 멋진 무도회가 열린다. 그 백작 가문의 막대한 부는 출처가 불분명하며, 기괴하고 생명력 없는 노인 한 명이 구석에 앉아있다. 백작 가문에는 아름다운 인물의 초상화도 걸려있다. 화자의 애인은 이에 대해 궁금해 하며, 주인공은 그녀에게 노인은 초상화와 동일인물이며 과거 사라진과 노인과 있었던 에피소드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스포일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화자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여자가 사교계에 환멸을 느끼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정도로 적는다. 사라진과 노인의 이야기는 발자크의 천성이 이야기꾼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줄 정도로 흥미진진하게 기술되어 있다. 다만 그것이 사교계에 대한 환멸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라고 보며, 굳이 복잡한 액자식 구성을 채택할 이유는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작가라면 그럭저럭 잘 썼다고 생각했겠지만 작가가 발자크다 보니 기대를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샤베르 대령
나폴레옹 치하 시절 전쟁에 참여한 샤베르 대령은 심각한 부상을 입는다. 중상이지만 생명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의사의 오진으로 인해 그는 전사자로 등록된다. 살아있지만 죽어 있기도 한 그는 자신이 샤베르 대령이라고 주장하나 주변으로부터 비웃음만 산다. 다행히 샤베르 대령의 처지에 흥미를 느끼는 데르빌 이라는 소송 대리인을 만나고, 그는 대령이 살아있음을 주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치미를 떼고 있는 대령의 부인을 상대로 법정 공방전을 펼치고자 한다...
발자크는 전업작가가 되기 전 법률사무소의 서기로 수년 간 일했다고 한다.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들도 날카롭게 관찰하는 사람이 본인이 경험하고 목격한 일을 적으니 그 묘사가 가히 예사롭지 않다. 당대 파리의 법률 시스템, 법조계에 종사하는 상급자 및 하급자들의 행태 묘사를 보며 엄청난 걸작을 하나 읽겠거니 하고 두근대며 페이지를 천천히 넘겼다. 중반부 까지는 이야기의 전개도 대단히 자연스럽다.
그러나 긴 페이지를 할애해야 할 법한 내용을 작가는 노벨레, 즉 중편소설로 기획하였고 이는 캐릭터성의 급격한 붕괴와 급작스러운 내용 전개로 이어진다. 고귀한 정신의 소유자 샤베르 대령의 IQ가 고작 10페이지도 안되어 80 이하로 떨어지며, 이로 인해 대령은 우수한 소설의 단계적인 절차를 차근차근 따르지 않고 갑작스럽게 파멸하고 만다. 조금만 더 플롯을 가다듬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그랬다면 작가가 80편이 넘는 소설을 쓰지는 못했을 것이므로 독자는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