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기를 돌아보다가 어떤 일이 좋은 일이었는지 안좋은 일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될 때가 있다. 그것은 당연한것일지도 모른다. 기쁨과 슬픔은 사실 하나니까. 행복과 불행은 언제나 맞닿아 있으니까. 좋은 이야기는 두 가지를 동떨어진 것처럼 다루지 않는다. <남매의 여름밤>도 그런 영화다. - P85
이것이 동주의 마음자리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로 흘려보내는 것. 상처받을 수도 있지만 보고 싶으면 일단만나러 가는 것. 옥주는 그게 잘 되지 않는다. 내 마음은 동주와 함께 홀가분해졌다가 옥주와 함께 축축해지고 서글퍼진다. - P87
우리는 글을 쓰고 음악을 만드는 게 기쁜 일인지 슬픈 일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삶이 기쁨인지 슬픔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아는 것은 잘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지 않듯이.. - P9091
《낯선 행성》의 아이 생명체는 나쁜 일에 대한 역치가아직 낮다. 나는 그가 가능한 오래 그렇게 지낼 수 있기를바란다. 아늑한 보호 속에서, 큰 공포 말고 오로지 작은 공포에만 살짝 흔들렸으면 좋겠다. 아이 생명체는 혼자 자는게 무섭다. 그래서 어른 생명체에게 복도 불을 끄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어른 생명체는 복도 불을 켜둔 뒤 아이에게부드럽게 말한다. "즐겁고 터무니없는 일상상해라." 그 문장을 읽자 내 마음에 초롱불이 켜지는 것 같았다. - P95
자의식 지옥에는 꼴 보기 싫은 내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잔뜩 널브러져 있다. 이젠 버릴 때도 되었다 싶어 분리수거하여 내놓았다. 후회스러운 짓들의 목록으로 빼곡한종이는 반듯하게 접어 주머니에 넣는다. 그리고 천국도 지옥도 아닌 중간 지대로 챙겨간다. 삶은 대체로 중간 지대에서 흐른다.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도 어여삐 여기지도 않는채로 기억해야 할 일이란 게 있다. 주머니에 손을 넣을 때마다 날카로운 종이의 단면이 닿는다. 후회를 만지작거리며 살아가는 법을 알려준 건 번역하는 여자다. 그의 주머니속 종이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는 모르지만 도움이 되었다. 누구의 삶에나 되돌리고 싶은 일이 있는 법이라고, 그는 말해주었다. - P136
나는 이훤이 찬바람을 쐬며 서 있을 먼 도시의 어느 발코니를 상상한다. 그 역시 마음에 쏙 드는 원고는 아주 드물게 쓸 것이다. 대개의 마감은 시간과 체력의 부족으로 적절히 타협한 채 끝이 날 것이다. 욕심 때문에 작업 진도가 너무 나가지 않을 때면 그는 자신이 그렇게까지 대단한 작가가 아님을 기억해낸다고 한다. "I remind myself that I‘m not the greatest writerin the world. Because I know I am not." 나는 그의 말이 비관적인 자조가 아님을 안다. 그건그저 계속하고 다시 하겠다는 담담한 의지 같은 것이다. - P145
"이게 뭐죠?" 이슬아가 묻자 현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열어보시면 뭔가가 시작됩니다." 이슬아는 영문을 모른 채 봉투를 뜯었고 그 안엔 한장의 종이가 들어 있었다. 종이에 적힌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생일잔치 식순1. 인사 및 소개2. 케이크 먹기(노래는 속으로만)3. 선물 전달4. 태어난 소감 발표5. 인사 및 마무리 "이슬아는 몹시 바쁜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귀하게내준 시간을 알차게 쓰기 위해 순서를 정해보았습니다." - P152
새로 태어난다는 건 늘 아프고 난 뒤의 일임을 이슬아는 그제야 깨달았다. 생일이 몹시 아픈 날이기도 하다는 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자 아무 소감이나 말할 수 없게 되었다.
5. 인사 및 마무리 그래도 그는 계속해서 새사람이 되고 싶었다. 잊을 만하면 신인의 광채를 내뿜으며 할머니를 향해 가고 싶었다. 신인은 자신과 세상의 새로움에 깜짝 놀라는 사람이다. 어제의 나라면 상상도 못 했을 좋은 시도를 오늘 하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미래로부터 기대받는 사람이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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