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쳤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비단 너에 대한 기대만을 접는 것이 아니다. 하나 부질없는 인간관계와 유지하기 급급한 세금고지서들에 대해서. 모두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방적인 통보들에 더이상 흔들리고 싶지 않다. 얽매이고 싶지 않다. 나를 그동안 살게 한 것은 자괴감이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자괴감마저 느끼지 않는다. (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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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침대로 돌아가 벽을 보고 모로 누웠다. 그는 더 자고 싶었다. 더 자고 싶은 이유에 대해서, 편두통과 눈의 피로, 늘 무기력한 상태에 대해서, 그는 나이가 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25쪽)

E는 올해 봄부터 나이가 들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봄부터 망설임이 늘었다. 사소한 고민에 빠졌고, 별것 아닌 일에 쉽게 화가 났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수시로 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할 만한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과 별개로 E는 자주 포기하고 싶었다. 울적했고,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아도 땀이 났다. 식은땀의 원인에 대해서, 나이가 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E는 생각했다. (57~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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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들은 연말의 피곤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자를 만나는 것도 피곤하고 친구를 만나는 것도 피곤하고 부모를 만나는 것도 피곤하다는 이야기였다. E는 동료들의 이야기에 공감했다. 동료들의 이야기는 가끔 공감되기도 하는 것이었다.
나는 혼자 있을 거야. E는 31일과 1일에 혼자 있을 수 있음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다.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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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운 날의 예감이 있다. 똑같이 뜬눈으로 밤을 지새고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나 무기력하게 지하철에 몸을 싣고 출근할지라도, 유독 더 힘겹고 불행이 닥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몸이 계속 무겁고, 피부는 불길한 느낌으로 예민하며, 말은 입이 아닌 머릿속에서 맴도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몰아닥칠 불행을 도저히 받아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휩싸이고 만다. (14쪽)

나는 모멸감과 피로로 당장 쓰러져버리고 싶었다. 내가 왜 이런 멸시를 받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머릿속에 예이츠의 시구가 떠올랐다. "가장 선한 자들은 모든 신념을 잃고, 반면 가장 악한 자들은 격정에 차 있다." (46쪽)

응급실을 한번 둘러보았다. 이곳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나만 견디고 참으면 그만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내겐 일해야 하는 긴 밤과 하소연할 곳 없이 망가진 몸과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마음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밤은 산 하나를 지나듯 간신히 넘어갔다. 아침까지는 아무도 죽지 않았다. (48쪽)

나는 심상치 않은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터무니없는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나서, 원래 세상 일이란 인간들의 육신이 이토록 부서지고 시들어가는 과정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매번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불행의 변주를 의연하게 눈 하나 껌뻑하지 않고 받아들이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유난한 날이었다. (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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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정적으로 사는 것—
지치도록 일하고 노력하고 열기 있게 생활하고 많이 사랑하고
아무튼 뜨겁게 사는 것,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
산다는 일은 그렇게도 끔찍한 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만큼 더 나는 생을 사랑한다.
집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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