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타사르,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다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지음, 윤주현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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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으로 각인된 존재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짧은 인생에 '영원'을 각인하려는 염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형태로든 각자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영원'의 조각을 새리려 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이러한 모든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합니다. 마치 냉엄한 사형 집행인처럼 말입니다. 영원을 갈망하지만 그 시작부터 사형 선고를 받은 비극적 존재, 인간의 이러한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죽음에 대한 의문을 풀 해결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있습니다................................................... 6쪽

인생에서 사랑이든 작품이든 결정적인 그 무엇을 열망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바쳐야 한다. 무엇인가 가치 있는 것을 사려면 자신을 그 값으로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가능한 한 자신을 완전히 정확하게 표현하고자 한다면, 남은 자신을 '포기'해야 한다..................... 38쪽

사명을 완수하는 예수님의 살아 있는 육체는 세상의 예술과 사랑을 넘어서는 최고의 작품이다. 우리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끔찍했던 실재가 바로 이 육체를 통해 극명하게 현실적으로 드러났으며, 동시에 거기서부터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변화되었다.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인류의 무게를 짊어지고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며 인류를 변화 시켜 주셨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념비적 사건이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에게 영원히 선사되는 것은 마땅하다........................................................................................................... 53쪽

사도 신경의 마지막 고백에 따라 우리가 희망에는 영원한 생명의 모습이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물론 영원한 생명은 진실로 아주 신비스럽지만, 지금은 불가사의한 의미로 '하느님을 보는 것'이 될 것이다.................................................................................... 60쪽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기꺼이 당신의 생명을 내어 놓으심으로써, 이제 죽음은 가장 활력 있고 신적인 차원으로 들어 올려진 생명으로 변화된다. 그분께서는 이러한 행동을 바탕으로 "아버지께서는 나를 사랑하신다."라고 말씀하셨다................................... 69쪽

예수님의 생명은 죽음에 대한 권능을 지녔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통해 당신을 온전히 내어 주심으로써 가장 수준 높은 생명의 상태에 이르셨다. 그러므로 그분에게서 누리시는 생명은 죽음을 대면해야 할 우리 모두에게 궁극적인 희망을 주는 죽음으로 깊이 각인된 생명이다..................... 72쪽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 나는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있다."(묵시 1.18)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열쇠들을 갖고 계시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친히 돌아가시고 '셰올Sheol '에 계셨으며, 따라서 이것을 넘어서 죽은 이들의 나라 전체에 대한 권한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는 보편적인 가치를 갖는 이러한 죽음을 향해 집중되었으므로, 그분께서 선사하시는 영원한 생명은 이 죽음에서 출발하여 성체를 통해 드러난다.................................................................... 92쪽

죽음과 부활이라는 두 가지 실재는 순수 현세적인 것에 대해 금욕하고 그리스도의 사명을 자신의 삼 속에서 구현하는 가운데 살아가게 한다.

성금요일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성토요일, 그리고 성부께 돌아가는 승천을 향해 이루어진 부활 주일과 함께, 신자 개개인의 삶과 교회의 삶에서 서로 깊이 얽혀 있다. 신자는 파스카에서 시작하여 성금요일로 보내진다. 그는 세례의 죽음에서 떠오르는 가운데, 죽음으로부터 시작해서 성체적으로 살아가도록 파견된다. 그리고 다시금 죽음을 향해 살아가도록 파견된다...................................................... 104쪽

죽음의 바위는 모든 공격을 견디지 못한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혼돈의 강물이 "그 불을 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누구도 죽기 전에는, 자신이 성인들의 통공이 이루어지는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기까지 자신이 받은 사명이 얼마나 많은 것을 요구할지 알 수 없다......... 115쪽

나의 생각 ))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때가 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인이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까?

그리스도 예수님을 매주 만나면서도 더 많이 차지하려고 더 많은 명예를 얻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을 본다.

포기할 수 없는 삶 속에서 죽음은 끝난다는 생각으로 대부분 사는 것이다.

발타사르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다'의 책에서는 두려움보다는 신비로 말하는 죽음이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을 묵상하게 되면서 죽음은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하게 된다.

성체 성사를 통해, 수없는 말씀을 통해, 듣고 또 들어도 왜 두려워하는 죽음이 될까?

몇 년 전에 몸이 많이 아프시어 안식년 들어가 신 신부님을 찾아갔는데 "지금 당장 죽어도 두렵지 않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럴 때 그 신부님의 병환이 고통에서 일까?

아님 진정한 그리스도의 성령이 임하신 것일까?

저렇게 말씀하실 정도면 진정한 신부님 아니실까?

그래도 병이 완치되어 다시 뵐 수 있기를 바랐는데 몇 년 되지 않아 젊은 나이에 선종하셨다.

우리는 몹시 안타까워하셨지만 그때 한 말씀이 생각났다.

진정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셨으리라 생각 든다.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을 때로는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을 보면서 인류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 오시고 성체성사를 제정하시어 믿는 이들에게 성령을 주신다.

죽음과 부활의 믿음을 다시 주신다.

죽음을 긍정적인 실재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님과 일치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신앙인에게 죽음은 자신을 결정적으로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과 결합시키는 기쁨과 희망의 사건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성인들의 통공 신비를 전하며 지상교회와 천상 교회가 하나 되는 가운데 그리스도인이 지녀할 모습을 말한다,

이 책을 통해 죽음 속에서 인생의 모순을 넘어서는 참된 희망의 빛을 발견하고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이 되기를 바라면서 그리스도께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가지며

우리의 죽음은 이 세상을 정화하는 봉사의 삶이자, 삼위일체적 사랑에 다가가는 여정이라 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주님 부활을 기다리며 사순시기를 보내는 요즘,

죽음, 부활, 생명의 참 의미를 깨닫고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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