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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영혼의 연대기 - 왜 그들은 윤석열을 선택했나
배수찬 지음 / 통나무 / 2025년 5월
평점 :
책을 구매해 읽은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책의 출판사 ‘통나무’는 도올 김용옥 선생의 ‘전속 출판사(?)’와 같아
선생의 저술만을 출간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다른 저자의 책을 내놓다니 어떤 책일까?”라는 호기심이었습니다.
방대한 자료조사와 제시, ‘날 것 그대로, 신랄하게, 직설적으로’ 표현된
내용의 성격과 메시지의 진중함,
그리고 독자를 성찰케 하는 것이 도올 선생의 저서들과 유사한 성격이란 생각에
“그래서...”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습니다.
둘째, 책의 제목 때문입니다.
본제목은 문학적 혹은 예술적으로 보이나
부제목에서 느껴지는 구체적인 솔직함(?)이 그것입니다.
왠지 “왼쪽과 오른쪽 중 방향을 정하고 봐야하나?
사회학, 인류학, 신문방송학, 칼럼 인가?” 등등의 의문을 갖게 했습니다.
“답은 읽어보면 알아, 새 책이잖아 . 사라!”라는 책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일반 대중이 자주 목격하는 ‘국회의원들 혹은 일부 정치인들’의 눈살찌푸리게 하는 정치가 아닌
이론과 현실이 잘 어울어진 정치 평론(?),
사회학적이면서도 인류학적인 보고와 분석이 잘 버무려진
쉬우면서도 가볍지 않은 2030의 영혼 혹은 정신과 태도에 대한 인문학 성격의 책이었습니다.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그에 대한 가공없는 현실 보고, 이해와 해결책을 찾는 길을 안내합니다.
셋째, 기성세대라 스스로 인정하는(?) 제가 직장과 대중 매체를 통해 접하는 2030 세대.
“그들은 대체 누구인가? 어느 별에서 왔나?” 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관련 연구자들이 내놓는 재료들을 폄훼하기 위한 것은 아니나,
제가 접한 내용들은 아쉬움이 컸습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개인적으로 현실에서 만나는 그들 모습과 거리가 있었고,
제 자신이 납득이나 설득되지 않더군요.
연구와 주장을 위한 대상이 교실에서 만나는 학생으로 제한된 점,
수치와 통계에 근거, 학자들 이론에 근거한 분석들이 오히려 장애물로 여겨졌고,
현실을 왜곡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마치 반찬 없이 맨밥만 먹어 깔끔하게 식욕이 채워지지 않아 또 다른 먹거리를 찾거나,
애꿎은 혈당 수치만 치솟아 어지러운 꼴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지적 호기심은 계속 폭주(?)했고,
위대한 집요함과 끈기(?)를 발휘해 용기 반
“혹시 또?” 하는 걱정 섞인 기대감 반의 마음이 작용했습니다.
국문학과 독문학을 모두 섭렵한 저자답게 인터넷과 기사, 영상 매체을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의 뜻과 표현에 실린 화자(話者)의 감정까지 읽어 전달합니다.
연구자 중심이 아닌 대상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신랄하고 솔직합니다. 가감이 없습니다.
그래서 2030세대가 남긴 흔적과 기성세대의 반응을
'사실넘어 섬세하고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보고 자료나 연구서의 한계를 넘어서고
유사한 자료에 대한 필요성이 줄어드는 체험을 했습니다.
2030세대에 대한 고집스럽고 틀에 얽매었던 저의 시선을 반성하게 됩니다.
저와 비슷한 이유를 가진 분,
같은 체험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일독(一讀)을 권합니다.
저자는 저술의도를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인용하며 글을 마칩니다.
“나는 나이 지긋한 교수님들과 동료 선생들, 내가 모르는 젊고 어린 누군가를 위해 이 글을 쓴다.
나도 딸이 있지만, “ 아이들만이 희망입니다”라는 류의 이야기는 정말이지 낯뜨겁고 싫다.
세상이 얼마나 개차반이면 그런 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오겠는가!
그런데도 할 말은 없고 종이(요즘은 화면)는 채워야 하니
한다는 소리가 “아이들만이 희망”이라고?
그런 개차반같은 세상에 살아야할 아이들이 무슨 죄냐?
나는 아직도 2030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아이들만이 희망이라고
우리 세대가 말하면 2030들이 뭐라고 할지는 확실히 알 것 같다:
“아이들이 있어야 희망이지 ㅆㅂ. 그리고 아저씨, 아이들은 아이들 본인의 희망이에요.
아저씨 희망이 아니라구요. 아저씨, 솔직히 아저씨 희망없죠?
그러게 잘하(시)지 그랬어요.”<중략>
영리한 2030 중에는 4050 내지 5060의 본진에 들어가
그들의 내심을 알고 싶은 갸륵한 친구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들이 내 글을 읽으면서 X세대와 86세대의 갈등을 발견하고
샤덴프로이데(타인의 고통에 기쁨을 느낀다는 뜻의 독일어 단어)라도 느껴보면 좋겠다.
우리 세대의 논리에도 일리가 있는 것을 납득한다면 더 좋겠다.
분열과 혐오의 대한민국 한 구석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을 모이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염라대왕에게 할 말이 있을 것이다.”(42-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