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같이.
세면대 앞에서 얼굴을 씻으며, 그녀는 떨리는 입술로 바보같이라고 되된다.
기껏 해칠 수 있는 건 네 몸이지. 네 뜻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게 그거지. 그런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지. - P214

그녀는 덩굴처럼 알몸으로 얽혀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것은 분명히 충격적인 영상이었지만, 이상하게도시간이 흐를수록 성적인 것으로 기억되지 않았다. 꽃과 잎사귀, 푸른 줄기들로 뒤덮인 그들의 몸은 마치 더이상 사람이 아닌 듯 낯설었다. 

그들의 몸짓은 흡사 사람에서 벗어나오려는 몸부림처럼 보였다. 그는 무슨 마음으로 그런 테이프를 만들고 싶어했을까. 그 기묘하고 황량한 영상에 자신의 전부를 걸고 전부를 잃었을까. - P218

그녀는 설명할 수 없다. 어떻게 자신이 그렇듯 쉽게 아이를버리려 할 수 있었는지, 자신에게도 납득시킬 수 없을 잔인한 무책임의 죄였으므로, 누군가에게 고백할 수도, 용서를 구할수도 없다. 다만 소름끼칠 만큼 담담한 진실의 감각으로 느낄뿐이다. 그와 영혜가 그렇게 경계를 뚫고 달려나가지 않았다면, 모든 것을 모래산처럼 허물어뜨리지 않았다면, 무너졌을 사람은 바로 그녀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다시 무너졌다면 돌아오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그렇다면, 오늘 영혜가 토한 피는 그녀의 가승에서 터져나왔어야 할 피일까. - P220

영혜는 피를 토하는 대신 눈을 뜬다. 검은 눈동자가 똑바로그녀를 바라본다. 저 눈 뒤에서 무엇이 술렁거리고 있을까. 어떤 공포, 어떤 분노, 어떤 고통이, 그녀가 모르는 어떤 지옥이 도사리고 있을까. - P220

그녀는 고개를 든다. 구급차는 축성산을 벗어나는 마지막 굽잇길을 달려나가고 있다. 솔개로 보이는 검은 새가 먹구름장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이 보인다. 쏘는 듯한 여름햇살이 눈을 찔러, 그녀의 시선은 그 날갯짓을 더 따라가지 못한다.
조용히, 그녀는 숨을 들이마신다.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아니,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그녀의 눈길은 어둡고 끈질기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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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부터, 그녀는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스스로 감당할 줄 알았으며, 성실은 천성과 같았다. 

딸로서,
언니나 누나로서, 아내와 엄마로서, 가게를 꾸리는 생활인으로서, 하다못해 지하철에서 스치는 행인으로서까지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그 성실의 관성으로 그녀는 시간과 함께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난 삼월 영혜가 갑자기 사라지지 않았다면, 비내리는 밤의 숲에서 발견되지 않았다면. 그날 이후 모든 증세가 급격히 악화되지 않았다면. - P169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신경성 거식증의 경우 십오에서이십 퍼센트가 기아로 사망합니다. 뼈만 남았어도 본인은 살이 썼다고 생각하죠. 지배적인 어머니와의 갈등이 주된 심리적 이유가 되고…………. 

하지만 김영혜씨 같은 경우는 정신분열중이면서 식사를 거부하는 특수한 경우예요. 중중의 정신분열중은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는데, 이렇게 될 줄은 솔직히 예측못했습니다. 

차라리 피독망상이 있는 경우엔 설득할 수 있지요. 보는 앞에서 의사가 같이 음식을 먹는다거나. 

하지만 김영혜씨는 음식을 거부하는 이유 자체가 불분명하고, 약도 전혀 효과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저희도 이런 말씀 드리는 게 쉽지 않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일단 생명을 보존해야 하는데..
저희 병원에선 그걸 장담할 수가 없으니까요. - P171

그녀는 대답했다.
지난번에도 그 말씀만 믿고 퇴원했었어요. 퇴원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의사에게 표했던 재발에 대한 우려는 단지 표면적인 이유이며, 영혜를 가까이 둔다는 사실 자체가 불가능하게 느껴졌다는 것을. 그애가 상기시키는 모든것을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을, 사실은, 그애를 은밀히 미워했다는 것을. 이 진창의 삶을 그녀에게 남겨두고 혼자서 경계 저편으로 건너간 동생의 정신을, 그 무책임을 용서할 수 없었다는 것을. - P173

마침내 6인용 병실에 입원가방을 내려놓는 그녀의 눈에 촘촘한 창살들이 세로질러진 창문이 들어왔다.

순간, 미처 느끼지 못했던 죄의식이 무거운 덩어리처럼 가슴에 만져져 그녀는 당혹했다. 영혜가
소리없이 걸어와 그녀 곁에 선 것은 그때였다.

......여기서도 나무들이 보이네.

입술을 단단히 다문 채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약한 마음 먹지 마. 어차피 네가 지고 갈 수 없는 짐이야. 아무도 너를비난하지 않아, 이만큼 버티는 것도 잘하고 있는 거야.

그녀는 곁에 선 영혜의 옆얼굴을 보지 않았다. 아직 잎을 다 떨구지 않은 낙엽송들 위로 부서지는 청명한 초겨울 햇살만을내려다보았다. 

마치 위로하듯 평온하고 낮은 목소리로 영혜는그녀를 불렀다.
언니.
영혜의 낡은 검은 스웨터에서 희미한 나프탈렌 냄새가 났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영혜는 한번 더 언니, 하고 속삭였다.
언니.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 - P175

수속을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영혜에게 말했다.
여긴 공기가 좋아서 입맛이 더 좋아질 거야. 좀 많이 먹고살이 붙어야지.
그즈음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한 영혜는 창밖의 느티나무에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응・・・・・・ 여기엔 큰 나무들이 있네. - P174

영혜가 소리없이 걸어와 
그녀 곁에 선 것은 그때였다.
......여기서도 나무들이 보이네. - P175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영혜는 한번 더 언니, 하고 속삭였다.
언니.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 - P175

・・・・・・ 언니도 똑같구나.
그게 무슨 소리야. 난...…………아무도 날 이해 못해…………… 의사도, 간호사도, 다 똑같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약만 주고, 주사를 찌르는 거지.
영혜의 음성은 느리고 낮았지만 단호했다. 더이상 냉정할수 없을 것 같은 어조였다. 마침내 그녀는 참았던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네가! 죽을까봐 그러잖아! - P190

영혜는 고개를 돌려, 낯선 여자를 바라보듯 그녀를 물끄러미 건너다보았다. 이윽고 흘러나온 질문을 마지막으로 영혜는입을 다물었다.
......왜 죽으면 안되는 거야? - P191

그게 무슨 소리야. 금방 어두워질 텐데, 어서 길을 찾아야지.
시간이 훌쩍 흐른 뒤에야 그녀는 그때의 영혜를 이해했다.
아버지의 손찌검은 유독 영혜를 향한 것이었다. 영호야 맞은 만큼 동네 아이들을 패주고 다니는 녀석이었으니 괴로움이 덜했을 것이고, 그녀 자신은 지친 어머니 대신 술국을 끓여주는 맏딸이었으니 아버지도 알게 모르게 그녀에게만은 조심스러워했다. 

온순하나 고지식해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던 영혜는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고, 다만 그 모든 것을 뼛속까지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안다.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 - P191

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뼛속에 아무도 짐작 못할 것들이 스며드는 것을. 

해질녘이면 대문간에 혼자 나가 서 있던 영혜의 어린 뒷모습을. 

결국 산 반대편 길로 내려가 집이 있는 소읍으로 나가는 경운기를 얻어타고 그들은 저물녘의 낯선 길을달렸다. 

그녀는 안도했지만 영혜는 기뻐하지 않았다. 

아무 말없이, 저녁빛에 불타는 미루나무들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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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든 호감을 줄 법한 그 단정한 인상 덕분에,
희미하게 얼굴에 배어 있는 그늘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 P151

석달 전 그녀의 여동생 영혜가 발견되었다던 숲이 저 산기슭 어디쯤이었을까.  - P152

거의 기적이라고 동생의 담당의는 그녀에게 말했다. 깊은 산비탈의 외딴 자리에서 영혜는 마치 비에 젖은 나무들 중 한그루인 듯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고 했다. - P153

이제는 수요일마다 영혜의 경과를 보러 가지만, 그 비내리던 날 영혜가 실종되었다가 발견되기 전에는 한달에 한번쯤 지나던 길이다. - P157

영혜는 그녀보다 네살 어렸다. 터울이 제법 져서인지, 그녀들은 자매간에 흔히 볼 수 있는 티격태격하는 갈등 없이 자랐다. 

손이 거칠던 아버지에게 차례로 뺨을 맞던 어린시절부터 영혜는 그녀에게 무한히 보살펴야 할, 흡사 모성애와 같은 책임감을 안겨주는 존재였다. 

발뒤꿈치에 새카만 때가 끼어 있고 여름이면 콧잔등에 땀띠가 빨긋하게 돋던 여동생이 성장하여 결혼하는 것을 그녀는 신기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다만,
나이를 먹을수록 동생의 말수가 적어진 것이 내심 안타까울뿐이었다. 

그녀 역시 신중한 성격이긴 하지만 분위기에 따라밝고 싹싹한 편인 데 반해, 영혜의 심중은 어느 때건 들여다보기 어려웠다. 너무 어려워 때로는 타인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다. - P158

그것은 남편의 우울한 태도와는 전혀 닮은 데가 없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동일하게 그녀를 좌절하게 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 다 비슷하게 말수가 적어서였을까. - P159

그냥 저런 걸 넣게 돼. 넣고 나면 마음이 편해져
그러고는 익숙한 침묵이었다.

결코 관통할 수 없을 것 같은 침묵에 싸여 있던 남편의 실체를 과연 그녀는 만난 적이 있었을까. 

그의 작업이 그것을 보여줄지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는 짧게는 2분에서 길게는 한시간 분량의 비디오작품을 만들어 전시했는데, 사실 그녀는 그를 알기 전에 그런 미술분야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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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께서 그 사실을 염두에 두는 게 좋겠군.
그걸 못 보거나 아니면 본성이 선량하여 카시오에게 나타나는 미덕만 칭찬하고 악에는 무관심하시겠지. 그게 사실 아닌가?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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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한텐 말하지 마라. 안 그래도 저 때문에 내가 학교 못 다녔다고 눈치 보는데. 중학교 검정고시 합격할 때까지만 모르는 척해줘.

얼굴에서 무슨 풀꽃 같은 게 연달아 피어나는 것처럼 눈웃음을 짓는 그녀의 얼굴을 너는 멍하게 바라보았다.

혹시 알아. 정대 대학 보낸 다음엔, 나도 열심히 해서 대학 갈수 있을지.
- P38

캄캄한 이 덤불숲에서 내가 붙들어야 할 기억이 바로 그거였어.
내가 아직 몸을 가지고 있었던 그 밤의 모든 것. 늦은 밤 창문으로 불어들어오던 습기찬 바람, 그게 벗은 발등에 부드럽게 닿던 감촉.

잠든 누나로부터 희미하게 날아오는 로션과 파스 냄새. 삐르르 삐르르, 숨죽여 울던 마당의 풀벌레들. 우리 방 앞으로 끝없이 솟아오르는 커다란 접시꽃들. 네 부엌머리 방 맞은편 블록담을 타고 오르는 흐드러진 들장미들의 기척. 누나가 두번 쓰다듬어준 내 얼굴. 누나가 사랑한 내 눈 감은 얼굴.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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