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부터, 그녀는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스스로 감당할 줄 알았으며, 성실은 천성과 같았다. 

딸로서,
언니나 누나로서, 아내와 엄마로서, 가게를 꾸리는 생활인으로서, 하다못해 지하철에서 스치는 행인으로서까지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그 성실의 관성으로 그녀는 시간과 함께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난 삼월 영혜가 갑자기 사라지지 않았다면, 비내리는 밤의 숲에서 발견되지 않았다면. 그날 이후 모든 증세가 급격히 악화되지 않았다면. - P169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신경성 거식증의 경우 십오에서이십 퍼센트가 기아로 사망합니다. 뼈만 남았어도 본인은 살이 썼다고 생각하죠. 지배적인 어머니와의 갈등이 주된 심리적 이유가 되고…………. 

하지만 김영혜씨 같은 경우는 정신분열중이면서 식사를 거부하는 특수한 경우예요. 중중의 정신분열중은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는데, 이렇게 될 줄은 솔직히 예측못했습니다. 

차라리 피독망상이 있는 경우엔 설득할 수 있지요. 보는 앞에서 의사가 같이 음식을 먹는다거나. 

하지만 김영혜씨는 음식을 거부하는 이유 자체가 불분명하고, 약도 전혀 효과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저희도 이런 말씀 드리는 게 쉽지 않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일단 생명을 보존해야 하는데..
저희 병원에선 그걸 장담할 수가 없으니까요. - P171

그녀는 대답했다.
지난번에도 그 말씀만 믿고 퇴원했었어요. 퇴원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의사에게 표했던 재발에 대한 우려는 단지 표면적인 이유이며, 영혜를 가까이 둔다는 사실 자체가 불가능하게 느껴졌다는 것을. 그애가 상기시키는 모든것을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을, 사실은, 그애를 은밀히 미워했다는 것을. 이 진창의 삶을 그녀에게 남겨두고 혼자서 경계 저편으로 건너간 동생의 정신을, 그 무책임을 용서할 수 없었다는 것을. - P173

마침내 6인용 병실에 입원가방을 내려놓는 그녀의 눈에 촘촘한 창살들이 세로질러진 창문이 들어왔다.

순간, 미처 느끼지 못했던 죄의식이 무거운 덩어리처럼 가슴에 만져져 그녀는 당혹했다. 영혜가
소리없이 걸어와 그녀 곁에 선 것은 그때였다.

......여기서도 나무들이 보이네.

입술을 단단히 다문 채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약한 마음 먹지 마. 어차피 네가 지고 갈 수 없는 짐이야. 아무도 너를비난하지 않아, 이만큼 버티는 것도 잘하고 있는 거야.

그녀는 곁에 선 영혜의 옆얼굴을 보지 않았다. 아직 잎을 다 떨구지 않은 낙엽송들 위로 부서지는 청명한 초겨울 햇살만을내려다보았다. 

마치 위로하듯 평온하고 낮은 목소리로 영혜는그녀를 불렀다.
언니.
영혜의 낡은 검은 스웨터에서 희미한 나프탈렌 냄새가 났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영혜는 한번 더 언니, 하고 속삭였다.
언니.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 - P175

수속을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영혜에게 말했다.
여긴 공기가 좋아서 입맛이 더 좋아질 거야. 좀 많이 먹고살이 붙어야지.
그즈음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한 영혜는 창밖의 느티나무에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응・・・・・・ 여기엔 큰 나무들이 있네. - P174

영혜가 소리없이 걸어와 
그녀 곁에 선 것은 그때였다.
......여기서도 나무들이 보이네. - P175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영혜는 한번 더 언니, 하고 속삭였다.
언니.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 - P175

・・・・・・ 언니도 똑같구나.
그게 무슨 소리야. 난...…………아무도 날 이해 못해…………… 의사도, 간호사도, 다 똑같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약만 주고, 주사를 찌르는 거지.
영혜의 음성은 느리고 낮았지만 단호했다. 더이상 냉정할수 없을 것 같은 어조였다. 마침내 그녀는 참았던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네가! 죽을까봐 그러잖아! - P190

영혜는 고개를 돌려, 낯선 여자를 바라보듯 그녀를 물끄러미 건너다보았다. 이윽고 흘러나온 질문을 마지막으로 영혜는입을 다물었다.
......왜 죽으면 안되는 거야? - P191

그게 무슨 소리야. 금방 어두워질 텐데, 어서 길을 찾아야지.
시간이 훌쩍 흐른 뒤에야 그녀는 그때의 영혜를 이해했다.
아버지의 손찌검은 유독 영혜를 향한 것이었다. 영호야 맞은 만큼 동네 아이들을 패주고 다니는 녀석이었으니 괴로움이 덜했을 것이고, 그녀 자신은 지친 어머니 대신 술국을 끓여주는 맏딸이었으니 아버지도 알게 모르게 그녀에게만은 조심스러워했다. 

온순하나 고지식해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던 영혜는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고, 다만 그 모든 것을 뼛속까지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안다.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 - P191

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뼛속에 아무도 짐작 못할 것들이 스며드는 것을. 

해질녘이면 대문간에 혼자 나가 서 있던 영혜의 어린 뒷모습을. 

결국 산 반대편 길로 내려가 집이 있는 소읍으로 나가는 경운기를 얻어타고 그들은 저물녘의 낯선 길을달렸다. 

그녀는 안도했지만 영혜는 기뻐하지 않았다. 

아무 말없이, 저녁빛에 불타는 미루나무들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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