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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雪], 서리, 얼음, 빙하, 북극해, 그린란드, 아이스란드.. 이 책을 따라 읽어내려가는 동안 만큼은 여름을 잊을 수 있다. 추리소설인만큼 흥미진진하고 중간중간 삶에 대한 서늘한 성찰들도 얼음 송곳처럼 솟아 있다.
이해하고 싶다는 것은 잃어버린 무언가를 되찾고자 하는 시도다.(55)
내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어떤 순간도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생의 어떤 것도 단순히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가는 통로가 될 수는 없다. 마치 남겨놓고 가는 유일한 것인 양 매 걸음을 떼어야 한다.(180)
지금 이 순간, [...] 선택의 자유라는 것은 단지 환상이라는 사실이 더 명확해졌다. 인생은 우리가 한번도 해결하지 못했던, 쓰디쓰고 본의 아니게 우스꽝스러우며 반복적인 갈등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는 사실도.(341)
죽음이 나쁜 것은 미래를 바꿔놓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를 기억과 함께 외로이 남겨놓기 때문이다.(415)
여러 곳을 여행하다가 아주 추운 곳까지 이르면 생존은 곧 단순히 깨어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죽음은 잠 속에서 이루어진다. 얼어 죽는 사람은 아주 짧은 수면 단계를 지난다. 출혈로 죽는 사람도 잠에 빠지게 된다. 빽빽하고 젖은 눈사태 속에 묻힌 사람은 질식해서 죽기 전에 잠에 빠진다.(453)
인생에서의 행복과 슬픔의 분포는 간단한 산수로 얻을 수 없고 표준 할당 같은 것도 없다.(541)
<스밀라 눈에 대한 감각>에 등장하는 '북방의 빛' 관장은 이런 말을 한다.
언어는 홀로그램입니다. [...] 모든 인간의 발화에는 그 사람의 언어적 과거가 총체적으로 깔려 있습니다.(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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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후 출간된 작가의 작품 <콰이어트 걸>의 주인공 카스퍼에서 이 관장의 말이 생각났다. 과연 작가는 이 문제에 10년 동안이나 골몰한 것일까? 암튼 멋진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스밀라 눈에 대한 감각>보다 <콰이어트 걸>이 더 마음에 든다.) 전체적으로 신비주의적 색채가 짙게 배여 있고 동화 같은 결말이기는 해도, 음악/음악가/소리/음향에 대한, 그리고 예술과 철학에 대한 빛나는 보석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침묵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지. 적어도 나한테는 그래. 먼저 고귀한 침묵, 기도 이면에 들리는 침묵이 있어. 사람이 하느님 가까이 있을 때 나오는 침묵. 그 침묵은 짙어. 모든 소리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와 같아. 그리고 또 하나의 침묵은 신에게서, 그리고 타인에게서 멀리 떨어진 부재의 침묵. 고독의 침묵이지.(289)
오늘 성당의 제대 앞에 서 있었던 나의 침묵은 어떤 종류였을까? 두 개의 침묵이 서로 공명(共鳴)하고 있었을게다..
"자긴 하느님을 믿으니까 우리 둘을 도와달라고 기도해줄 수 없어?"
"뭔가를 원하는 기도는 할 수 없어. 적어도 다른 음표를 달라고 기도할 수는 없어. 다만 자신이 타고난 음표를 최대한 잘 연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거지."(152)
카스파는 내게서 어떤 음조를 들을까?
그런데,
숭고한 순간이었다. 켐프[Wilhelm Kempf - 독일 피아니스트]가 베토벤 소나타 109번의 제1악장을 천천히 연주하는 것 같은.(294)
그녀는 이제 완전히 F단조였다. 슈베르트의 마지막 현악 4중주처럼.(231)
이런 구절은 해당 연주곡을 찾아서 들으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소 귀찮기는 하겠지만..
하지만,
그 비밀은 G단조의 비극이었다. [...] A장조의 완벽주의가 누그러지지 않았다.(157)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제5도에서 한 단계 높은 음조를 받아들이는데, 이것은 음향학적인 성숙과 같다.(158)
빠져나갈 길이 없다는 절박한 기분은 D단조다.(251)
누군가가 순수하지만 고르지 않은 C장조 현의 세 음(音)을 휘파람으로 불었다.(523)
나로서는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는 구절들.. 절대음감을 지닌 피아니스트인 친구에게 이 작품을 강력 추천한 이유는, 그 친구라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쩌랴.. 신이 내게 허락하지 않은 재능인 것을!